메뉴 건너뛰기

close

신사라고 하면 우리는 일제의 전범들의 위패가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떠올리며 '신사=군국주의'를 연상케 한다. 그렇지만 군국주의의 대명사라 불려지는 야스쿠니와 같은 신사는 일본 내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반대로 박혁거세를 모신 신라신사가 현재 2000여개나 존재하고 있으며 고구려, 백제 등과 관련된 신사를 찾아내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지만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한 신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 큐슈의 카고시마현 중서부의 히가시이치키쪼우의 미야마(美山)에 옥산신사(玉山神社)라는 신사가 있다.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 시바료타로의 '고향을 어찌 잊으리오'라는 소설에서는 이 신사의 배경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도자기전쟁으로도 불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도공들을 싣고 가던 왜군의 배는 조선수군을 맞아 패주하게 된다. 방향을 잃어 표류된 배는 큐슈 서쪽의 무인도를 전전하다 1598년 쿠시키노의 해안가에 상륙하게 되는데 그 인원이 17성(性) 70여명. 그들은 도중에 사망한 도공들의 장례를 치르고 언문으로 새긴 석비를 세웠는데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그곳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지내던 이들은 토착민들의 핍박으로 내륙쪽으로 이주하던 도중 그들의 고향 남원성과 너무나 닮은 산세에 정착하게 된 곳이 나에시로가와(苗代川), 지금의 미야마라고 한다. 그 지역 번주(藩主)는 그들에게 무사(武士)에 해당하는 자격을 주며 그들을 정착시키게 되고 이들이 구워낸 도자기는 일본 내에서도 유명한 사츠마(薩摩)도자기의 기원이 된다.

하지만 망향(望鄕)의 설움을 지우지 못했던 그들은 1673년 사당을 건립하여 단군을 모시고 이름을 환단신궁(桓檀神宮), 옥산궁(玉山宮)이라 불렀다. 그리고 매년 음력 8월 14일에는 이 사당에 나가 고국에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기원과 함께 제사를 지냈는데 제주(祭主)만은 한국의 도포를 입고, 한국음식과 함께 제기(祭器)나 악기도 한국 고유의 것을 썼다고 한다.

「オノリ オノリラ オノリラ…」

오늘이 오늘이라
제물(祭物)도 차렸다
오늘이라 오늘이구나 모두 함께 노세
이리도 노세 이리도 노세
제일(祭日)이 제일(祭日)이라
우리 어버이 단군은 잊지 않으리라
고수레 고수레 자나깨나 잊지 않으리라

이는 그 날 제를 지낼 때 불렀다는 신무가(神舞歌)이다. 이 신무가는 1610년 남원의 양덕수가 발간한 '양금신보(梁琴新譜)를 원전으로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100년 전 일제식민지 시기에 소멸된 노래가 옥산신사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또한 놀라운 것은 이 노래가가 언문으로 전해 내려왔으며 제를 지낼 때도 언문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때 옥산신사라는 이름으로 격하되고 1956년 나에시로가와도 한국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미야마로 개칭되고 히가시이치키쪼우로 편입되면서부터 애석하게 이 제례도 본연의 의미를 상실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내가 이 옥산신사를 찾은 것은 작년 5월쯤이었을 게다. 일반적으로 이름있는 신사는 마을 초입부터 토리이(鳥居)가 있어 신사로 안내하는 데 반해 히가시이치키역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올라간 후에야 비로소 옥산신사의 토리이를 만날 수 있었다.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 두 개의 토리이를 더 지나 수풀 우거진 산길을 따라 올라가서야 비로소 옥산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신사의 처마와 기와 등 건축양식이 한국적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것 뿐, 초라하게 퇴색한 신사에서 단군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또한 신전에는 조선시대의 한글소설 '숙향전'이 단군위패와 함께 모셔져 있다고 하였으나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어 이젠 아무도 찾지 않는 폐사가 된 듯했다. 과거 매년 제를 올리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일까? 아쉬움을 남기며 옥산신사를 등져야 했다.

▲ 미야마(美山)에 있는 옥산신사(玉山神社)
ⓒ 정해식
하지만 옥산신사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나에시로가와의 인구의 증가로 1704년 일부 도공들이 카노야시(鹿屋市) 카사노하라(笠野原)로 강제 이주되는데, 이주 후 가끔씩 나타나는 밝은 빛이 나에시로가와의 단군신령이 이주민을 수호하기 위해 날아드는 것으로 여긴 그들은 번주(藩主)에게 건의해 1707년 나에시로가와의 옥산신사와 동명(同名)의 신사를 짓는다.

이곳엔 아직도 매년 음력 8월 14일이면 제례를 올린다. 한편, 이곳에서 남쪽으로 8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또 다른 동명의 신사가 있다. 전해지기로는 카사노하라 350명의 주민이 이주해 1866년 지은 것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다.

낯선 이국 땅에서 갖은 박해 속에서 강제 이주될 때마다 세운 이 단군 사당들, 그들에게 있어 단군은 어떠한 존재였을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입 속에서 수없이 되뇌었을 단군이라는 이름. 한민족의 피가 흐르던 그들에게 단군은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정신적인 구심점 아니 그 이상의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맘때만 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왜 단군상의 목이 날아가야만 하는가? 단군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편협한 종교관과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도 문제지만 왜 다른 사람들은 분노하지 않는 것인가? 단군이란 존재가 과연 한 종교에서 숭배하는 대상일 뿐인가?

개천절에 즈음하여 낯선 일본 땅에 끌려온 조선도공들을 생각하며 우리 한민족에 있어 단군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