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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수


ⓒ이철수


'한국 1승!'을 보면서 밑그림을 그리고, 한국 1승 1무를 보면서 판화를 새기고, 한국 대 포르투갈의 경기를 기다리면서 갓 찍어낸 판화를 보냅니다. 나라가 온통 축구판입니다. 저 역시 승리를 기뻐했습니다. 무승부는 아쉬웠고, 미국에게는 꼭 이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축구야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뜨겁게 응원하고 승리에 열광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요. 온 국민이 한 목소리로 조국을 연호하는 것도 드물고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다만, 축구를 축구로 두고 보자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작은 것과 큰 것을 가려서 보자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작은 기쁨을 너무 과장하지 않는 것도 성숙한 태도가 아닌가 합니다.

축구 경기의 작은 승리를 국가적 승리로 여기다 보면 작은 패배에 크게 낙망해서 국가적 패배로 여기기도 십상입니다. 축구 잘하는 브라질은 흥하고 16강 탈락의 졸전을 보인 프랑스는 곧 망하게 되나요? 그럴리가 없지요. 월드컵 축구라도 그렇고 동네 축구라도 그렇고 축구는 그저 축구일 뿐입니다.

FX사업에 F15가 채택되는 치욕에 국민적 자존심이 상하고, 남북대화가 부시의 막된 언사로 벽에 부딪치고, 미군이 고층 아파트를 짓고, 미대사관이 덕수궁을 안뜰로 삼아 직원용 아파트를 짓겠다고 해서 조례를 개정한다는데, 스케이트 경기에 이기고 축구 경기에 이기면 대수인가요?

큰 것을 잊고 작은 것에 열광하는 '붉은 악마의 함성!'은 동대문에서 뺨맞고 남대문에서 성내는 꼴 아닌가요? 정치는 갈짓자 걸음을 하고, 선거판은 더러운 돈판·개판이 되고 있는데, 불안정해진 노동 때문에 가계빚·카드빚이 개인 파산을 양산하고 있다는데, 우리는 축구공 하나에 눈도 미움도 다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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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의 돈장사에 이렇게 쉽게 놀아나도 좋은 것인지? 뜨거운 감정도 때론 감추어 두어야 하는건 아닌지? 와신상담이라고 했나요? 쓸개를 빨면서 지난 수모를 잊지 않는다면 뒷날 여유있게 승리를 즐길 수 있겠지만 그러지 못하면 치욕과 수모의 시대를 끝내기는 어려울 터입니다. 지금이 그럴 때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습니다.

오노를 흉내낸 우리 선수들의 골 세레모니를 두고 히딩크는 '오줌 싸는 숫캐들의 다리들기 같았다'고 야유하였다지요? 그런 냉정한 힐난을 경청했으면 합니다. 그를 두고 망언이라할 이유가 없지요. 잊어도 좋을 것 그 작은 것을 기억하기보다 잊어서는 안될 큰 것을 잊지 않는 냉정한 이성이 필요합니다.

월드컵을 계기로 어렵사리 한 목소리가 될 수 있었던 우리들이 이 나라의 진정한 발전을 위한 변화에도 크게 한목소리를 내고 함께 나설 수만 있다면, 이 지리한 잔소리 다 거두겠습니다. 사과도 드려야겠지요. 그러시다면, 기꺼이 즐기시기를!

오~ 필승 코리아! 대~한민국!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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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수의 매일메일(mail)'은 매일 아침 독자 여러분들에게 편지를 쓰듯이 엽서로 전달하는 생활-시사 이야기입니다. 판화가 이철수씨는 80년대 민중판화운동으로 미술 활동을 시작했으며, 지금은 시정과 선(禪)적인 표현이 어우러진 판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충북 제천에서 농사를 지으며 책읽기와 지역사회 활동을 하면서 국내외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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