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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實)의 여섯가지 '뜻'

이제 '열매/여물다'를 일차적인 뜻으로 가진 실(實)자가 파생된 의미를 갖게 된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實)자의 새김 중에서 '여물다/열매'의 뜻 이외에 다른 뜻으로 풀렸던 예들과 실(實)자가 들어간 여러 낱말들의 어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세기 이후의 문헌에는 '열매/여물다' 이외에도 실(實)의 새김이 다양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컨대 <주해 천자문(중간본, 1804년)>에서는 실(實)의 새김으로 '몌올 실'과 '진실 실'을 제시했고, 20세기 들어 편찬된 <신정천자문(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소장본)>에서는 실(實)을 '실상 실'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실(實)을 '진실 실'이나 '실상 실'이라고 푸는 것은 그다지 온당한 일은 아닙니다. 진실(眞實)이나 실상(實狀)이라는 새김에 이미 실(實)자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실(實)자의 뜻을 알기 위해서 '참된 실(實)'이나 '실(實)한 모습'의 뜻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사실 동어반복을 포함하는 설명의 오류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런 새김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실(實)자의 의미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實)이 무슨 뜻인지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 뜻을 좀 더 구체화시킨 '실상'이나 '진실'같은 말들이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19세기 이후부터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한 실(實)자가 들어간 낱말들의 찾아보고 그 어법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근대시기까지만 해도 사전 편찬 문화가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實)자가 들어간 낱말들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오늘날 사용되는 국어 사전에 나타난 낱말들을 먼저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제가 가진 두 국어사전을 종합해 보니까 실(實)자를 부분어로 가진 한자어는 총 93개에 달했습니다. 여기에서는 매실(梅實, 매화의 열매)이나 견실(떡갈나무 열매)와 같이 명백하게 '열매'를 가리키는 말들은 제외했습니다. 그 낱말들은 모두 모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堅實 結實 果實 其實 記實 事實 寫實 査實 史實 誠實 成實 實價 實感 實景 實工 實科 實果 實權 實根 實記 實技 實꾼 實念 實談 實답다 實力 實例 實로 實錄 實利 實머슴 實綿 實名 實務 實物 實否 實不實 實費 實事 實事求是 實相 實狀 實生法 實生活 實線 實性 實勢 實속 實數 實需要 實習 實施 實額 實業 實演 實用 實은 實益 實印 實字 實子 實在 實積 實戰 實情 實際 實存 實株 實竹 實證 實地 實質 實踐 實體 實測 實彈 實態 實吐 實하다 實學 實學主義 實行 實驗 實現 實刑 實話 實況 實效 眞實 忠實 充實 現實 確實

이 낱말들에 나타난 실(實)자의 뜻은 어법상 조금씩 다릅니다. 그 의미를 구분해 보면 대체로 다음의 여섯가지로 대별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꽉 찼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실죽(實竹, 속이 찬 대나무), 충실(充實, 가득 찼다), 견실(堅實, 단단히 찼다) 등의 한자어가 포함됩니다.

둘째는 "씨가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실면(實綿, 목화에서 씨를 빼지 않은 솜) 과 실생법(實生法, 씨를 심어 식물이나 농작물을 번식시키는 방법) 등의 한자어가 포함됩니다. 또한 여기에서의 "씨"를 사물의 알맹이나 핵심(核心), 즉 가장 중요한 요체(要諦)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실속이나 실권(實權) 등의 낱말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셋째는 꾸밈없는 "있는 그대로이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런 뜻의 실(實)자가 든 한자어가 가장 많았는데, 몇 가지만 예로 든다면, 실감(實感, 있는 그대로 느끼다, 혹은 그런 느낌), 실기(實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은 기록), 실담(實談,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 실례(實例, 실제로 있었던 예), 실록(實錄,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은 기록), 실물(實物, 견본이나 모형, 사진 따위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물건), 실사(實事, 실제로 있는 일), 사실(事實, 실제로 있거나 있었던 일), 실상(實相, 있는 그대로의 모습), 실상(實狀, 있는 그대로의 실제의 상태), 사실(寫實, 사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타냄), 사실(史實, 역사상에 실제로 있었던 일) 등이 그것입니다.

네 번째의 뜻은 "쓸모가 있다"입니다. 여기에는 실기(實技, 유용한 기능이나 기술), 실업(實業, 농업 수산업 공업 상업 따위의 생산, 제작, 판매에 관한 사업), 실(實)머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착실한 머슴)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다섯 번째는 "힘(영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속하는 한자어로는 실권(實權, 실제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나 권세), 실(實)꾼(일을 능히 해낼 만한 일꾼), 실력(實力, 실제로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 무력, 완력) 등이 있습니다.

끝으로 실(實)자는 "참이다"는 뜻으로도 쓰였습니다. 여기에는 진실(眞實, 거짓이 없이 바르고 참됨, 참), 실성(實性, 진여(眞如)의 딴이름, 거짓없는 천성(天性)), 실증(實證, 논리나 관념에 의하지 않고 실물이나 사실에 근거하여 증명함. 또는 그에 따른 증거. 확실한 증거), 실(實)답다(진실하고 미덥다.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참되다) 등이 속합니다.

실(實)의 '구체'적인 뜻과 '추상'적인 뜻

그런데 한가지 눈에 띄는 점은 첫 세 가지의 의미는 다소 구체적인 반면에 뒤의 세 가지 뜻은 조금 추상적이라는 것입니다. 즉, '꽉 찼다'와 '씨가 있다'와 '있는 그대로이다'는 뜻은 대체로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서술어들입니다. 대개의 경우 시각(視覺)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뜻들이지요.

그런데 뒤의 세 가지 뜻, 즉 '쓸모가 있다'와 '힘(영향력)이 있다'와 '참이다'는 다소 판단적이며 해석이 뒤따라야 하는 추상적인 서술어들입니다. 오랫동안 누적된 경험이나 공동체의 합의에 의해 그런 판단들이 '객관적'이라고 이름 붙여질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감각적으로 곧바로 느낄 수 있다는 뜻으로서의 구체적인 뜻들은 아닙니다.

또 한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각각의 구체적, 추상적 의미가 서로 쌍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꽉 찼다"는 구체적 의미는 "쓸모가 있다"는 추상적인 의미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뜻은 심지어 인과적으로 연결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꽉 찼기 때문에 쓸모가 있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그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개념 형성 과정에서는 아무래도 추상적인 뜻보다는 구체적인 뜻이 먼저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고, 또 추상적인 뜻은 대체로 구체적인 뜻에 기반을 두고 유추된 것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관계가 '씨가 있다'는 구체적인 뜻과 '힘이 있다'는 추상적인 뜻에도 성립합니다. 그래서 '씨가 있기 때문에 힘이 있다'고 풀이할 수 있는 것이지요.

씨라는 것은 그 종류를 막론하고 열매의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 아니라 얼른 보면 딱딱하기만 하고 쓸모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발아의 조건만 만나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자신이 그 일부인 개체를 재생산함으로써 종(種)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씨가 하는 일이며, 잘 생각해 보면 그처럼 엄청난 일이 없습니다. 그런 '힘'이 바로 그 작은 '씨'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있는 그대로이다'는 구체적인 뜻과 '참되다'는 추상적인 뜻도 인과적으로 연관될 수 있습니다. '참된 것'이란 가식(假飾), 즉 꾸밈이 없는 원래 모습 그대로의 것을 가리키는 것이 일차적인 뜻이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것과 참된 것 사이의 관계는 반의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명(假名)이란 '가짜 이름'이라는 뜻인데 그 반의어는 실명(實名)입니다. 이때 실(實)자는 '참되다'는 뜻과 함께 '있는 그대로이다'는 뜻을 갖는 것이지요. '있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참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다.

실(實)의 뜻을 구성하는 세 가지 '의미쌍'들

지금까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실(實)자의 뜻을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어원적인 측면에서는 실(實)이 '집안에 갈무리된 끈에 꿴 돈'이라는 구체적인 뜻과 '벼리에 따라 관리되는 가용한 자원'이라는 추상적인 뜻으로 새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실(實)자가 한국에서 '열매' 혹은 '여물다'는 뜻으로 전화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어원적인 뜻과 열매 사이의 일대일 대응관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즉 실(實)자를 구성하는 세 요소인 '집'과 '돈'과 '끈'은 열매의 '껍질'과 '살'과 '씨'에 일대일로 대응됨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실(實)을 '열매 실'이나 '여물 실'이라고 푸는 것은 아주 논리적인 귀결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90여 개의 실(實)자의 용례를 확인한 결과 거기에서 여섯 가지 의미군을 추출할 수 있었습니다. '꽉 찼다'와 '씨가 있다'와 '있는 그대로이다'는 뜻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서술어들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쓸모가 있다'와 '힘(영향력)이 있다'와 '참이다'는 판단과 해석이 필요한 추상적인 서술어들입니다.

이 구체적인 뜻들과 추상적인 뜻들 사이에는 '인과적'이라고 볼 수 있는 연관관계가 있음도 보았습니다. '꽉 찼기 때문에 쓸모가 있다'와 '씨가 있으므로 힘(영향력)이 있다'와 '있는 그대로이므로 참이다'는 세 가지 의미 쌍이 성립되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실(實)자가 가진 다양한 차원과 측면의 의미들입니다. 실(實)자가 가진 다양하고도 풍부한 의미들이 한 낱말에 모두 구현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때로는 그 중에서 한 가지나 두 가지 정도의 뜻이 반영될 뿐이겠습니다.

그러나 실사구시(實事求是)라든가 무실역행(務實力行)같은 철학적일 뿐 아니라 실천적인 개념, 학문적이면서 동시에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개념들을 고찰할 때에는 그 모든 의미들을 잘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실(實)자의 통상적인 의미보다 훨씬 외연이 넓고 내포가 깊은 개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상에서 살펴본 각 차원과 측면의 실(實)자의 의미를 사용해서 실사구시(實事求是)와 무실역행(務實力行)이라는 두 개념의 좀 더 깊은 뜻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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