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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미레를 평미레질하기

첫 번째 '평미레질'의 대상으로 평미레질 자체를 잡았습니다. 우선 평미레질이라는 게 뭔지 좀 구체적으로 짚어보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앞에서 든 '싸전' 풍경 이야기대로라면 평미레질이란 기본적으로 '모으고 담아서 다지고 깎는 일'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평미레질 자체는 '모으고 담고 다지는' 과정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이 없다면 평미레질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제대로 모으지도 않고 그릇에 담지도 않고 잘 다지지도 않은 것을 깎아내어 봤자 '정확히 한 말'이라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모으고 담고 다지는 것'은 평미레질의 전제조건이며 '다듬어 깎는 것'과 함께 넓은 의미의 평미레질에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싸전의 평미레질을 생각의 평미레질에 적용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미레질 된 생각'으로서의 개념(槪念)은 '생각을 모아 담아서 다지고 다듬는 것' 혹은 '그렇게 만들어진 생각'을 가리킵니다.

생각을 깎아 다듬을 때에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말통에 담은 쌀을 '정확히 한 말'로 만들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 평미레가 필요하듯이 말이지요. 저는 앞에서 그 기준으로 평미레로서의 '실증(實證)'을 제시했습니다. 물론 이때의 실증은 서양의 포지티비즘과 유사해 보일지라도 훨씬 더 깊이 있는 개념입니다. 그것은 '실증'의 실(實)자가 가진 뜻이 생각보다 아주 깊기 때문입니다.

실(實)

사실 한국 근대사에서 '실(實)'이 '주목할 만한 현상'으로 떠올랐던 적이 두 번 있었습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와 무실역행(務實力行)이 그것입니다. '실사구시'는 18세기 이후 실학(實學)의 핵심어였고 '무실역행'은 20세기초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 흥사단의 지향이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실(實)' 개념을 가지고서 근대와 독립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지요.

두 현상은 당면한 목적을 이루어 내지 못했습니다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냥 퍼져 있는 게 아니고 아주 사랑받는 개념이지요. 초등학교에서부터 가르치기 때문이기도 하겠거니와 가르칠 때에도 긍정적인 의미를 많이 부여하기 때문일 겝니다.

물론 그 개념들이 우리의 생각과 말글살이에 긍정적으로 자리잡았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된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 말들이 사랑 받고 있다고 해서 잘 실천되고 있다는 뜻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사실 그 말이 이미 잘 실천되고 있는 상태라면 그것이 '-해야 한다'는 당위의 형태나 '-할 것이다'는 미래/의지의 형태가 말과 글에 그렇게 자주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개념이 실천되지 않는 것은 그 뜻을 잘 모르기 때문이거나, 알더라도 실천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거나, 뜻과 방법을 알더라도 실천할 힘이 없기 때문이거나, 뜻과 방법을 알고 실천할 힘이 있어도 제 이익을 헤치기 때문일 것입니다.

뜻이나 방법을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이고, 알지만 힘이 없어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무기력하기 때문이고, 실천을 위한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는데도 제 이익 때문에 실천하지 않는 것은 이기적이기 때문이겠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것은 깨우치면 되고 힘은 키우면 됩니다. 이기심 때문이라면 자기 이익을 해치지 않고도 남의 이익을 함께 도모할 방법을 찾으면 되지요.

저는 적어도 한국사회가 실사구시나 무실역행을 좋은 개념으로 강조하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무기력하기 때문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일제의 강점과 한국 전쟁을 딛고서 경제를 일으키고 민주화를 일구어낸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 결과가 그다지 만족스러운 게 아니었다는 평가가 자꾸 나오는 것은 그것이 충실하지 못했다는 말이기는 하겠습니다만, 그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적어도 사회적 실천을 위한 힘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실(實)이 실천되지 못했다는 것은 '생각이 모자랐기 때문'이거나 '이기적이기 때문'이겠습니다. 이기심의 문제는 좀 더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우선 '생각이 모자랐던 때문'이라는 점에만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근대 이후 선각자들은 우리의 모자란 생각을 많이 개탄했습니다. 제게 얼른 떠오르는 말은 함석헌 선생의 '생각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라는 말씀입니다. 좀 극단적이고 과장의 측면은 있습니다만 적확한 말씀이라고 봅니다.

저는 함석헌 선생의 '생각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평미레질이 모자란다'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좀더 학문의 냄새가 나는 용어를 쓰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일상적인 생각은 많이 하지만 정확성을 기하기 위한 생각에는 좀 약하다는 관찰 때문입니다. 평미레질은 바로 '정확하기 위해서 생각하기'의 다른 말일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은 있어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 평미레질 자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 한데 모여도 제대로 된 틀에 담기지 않으면 평미레질을 할 수 없습니다. 또 말통에 생각을 챙겨 넣어도 그것을 잘 다지지 않으면 평미레질을 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정확히 한 말'이라는 선언은커녕 '속임수 시비'가 불거질 수 있습니다. 또 아무리 생각 모으기와 틀에 넣기와 다지기를 잘 해도 평미레질 자체가 있어야 합니다. 깎고 다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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