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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선생님께, 안녕하십니까? 지난번에 전주에 강연차 내려갔을 때 바쁘신데도 들러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환대를 해주신 것 잊지 않고 있습니다. 판소리가 흘러나오던 예향 전주의 밥집의 고풍스런 모습 역시 기억에 남고, 열두 시가 넘은 시간에 고속버스 정류장까지 나와서 손을 흔들어 주시던 모습이 아직 기억 속에 영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은 최근 '노풍'에 드리우고 있는 어떤 우려할 만한 경향과 관련하여 시민사회에서 유권자의 올바른 투표 행태에 관해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은 것이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선생님께서 작년에 내신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이라는 책에서 표명한 견해와 관련이 있습니다.

1. 부패정국과 이문옥

▲ 이문옥 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 ⓒ 오마이뉴스 이종호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이라는 다분히 도발적인 저서에서 강준만 선생님은 "누구나 개혁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 대다수의 국민은 개혁을 원치 않는다"고 단정짓고, "사람들은 정치를 비판하고 정치인을 욕할 뿐, 대안을 찾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득권층이 만들어놓은 허위의식을 제 생각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말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국민들 전체가 거대한 사기극을 벌이고 있고, 이 사기극의 희생자가 바로 노무현이라는 것이지요. 이 말씀에 저는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최근에 이 낡은 사기극에 종지부를 찍어버린 '노무현 돌풍'에 저 역시 열광하여 마음이 잔뜩 들뜨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사기"의 경향을 우리는 이문옥에 대한 유권자들의 태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이문옥은 90년대 초에 감사원 비리를 폭로하는 양심선언으로 옥고를 치렀고, 그후로도 양심선언자와 내부고발자의 보호와 부패방지법의 제정 등 부패척결을 위해 일생을 바쳐왔습니다.

그 때문에 브리태니커 세계연감에 화제의 인물로 등록되기도 하고, 그 활동이 정직한 시민의 사표가 되어 우리의 자녀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지금은 정권의 부정부패와 비리의혹이 거의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 터져나오는 형국입니다. 한마디로 부패 정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선지 국민들은 누구나 부패는 척결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신변의 불이익을 무릅써가며 부패척결에 일생을 바쳐온 한 사람이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감사원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그의 경력으로 보아 적어도 부패척결의 의지와 능력에 관한 한 그에 필적할 만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 객관적 평가일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국민들은 단지 힘없는 소수정당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진지한 시장후보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국민들은 누구나 부패척결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부패척결을 원하지 않는 듯합니다.

이 역시 어떤 면에서는 국민 사기극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노무현이 국민 사기극의 희생자라면 이문옥 씨 역시 또 다른 국민 사기극의 희생자가 아닐까요?

듣자 하니 어제 MBC 스페셜 <국민참여 경선 1부 : 정치, 시민이 바꾼다>에서 국민이 바라는 차기 대통령이 해야 할 일로 부정부패척결을 제일의 과제로 꼽는다는 국민여론조사를 소개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차기 대통령의 제1의 개혁의 과제는 바로 부패한 정치구조를 바로잡는 것이라는 얘기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차기 대통령을 노리는 노무현 씨의 과제와 이문옥 씨의 삶의 궤적 및 목표 사이에 또 다른 친화성을 보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의 살아온 길이 너무나 유사한 듯하여, 여기에 대한 강준만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어졌습니다.

2. 지역차별의 희생자

▲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책 표지 ⓒ 오마이뉴스 이종호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이라는 저서에 관한 어느 신문의 서평에서 인용합니다. "노무현은 또한 '지역감정'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선거 때마다 지역감정에 몸을 던져 도전해보지만 번번히 쓴잔을 마실 뿐이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지역감정이 망국병이라고 한탄하면서도, 지역감정을 부추긴 정치인에 대해서는 금방 잊는다. 오로지 중요한 건 눈앞의 승리일 뿐인가?" 여기에 대해서도 저는 선생님의 견해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당선이 보장된 지역구를 버리고 지역주의의 장벽을 넘기 위해 바보처럼 부산으로 내려가 낙선했던 노무현 후보의 소신과 원칙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문제를 놓고서도 노무현과 이문옥은 놀랄 만한 유사점을 갖고 있습니다. 영남 사람인 노무현이 영남의 지역주의에 맞서 싸우다가 희생자가 되었다면, 호남 사람인 이문옥은 시민단체가 추천하는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여 영남의 지역감정에 대한 반사물로 생긴 호남의 작은 지역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고향땅에서 낙선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지역감정은 "망국병"이라 탓하면서 정작 지역감정에 맞서 싸우는 사람을 번번히 낙선시키곤 하지요. 다들 지역주의가 나쁘다고 얘기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지역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을 저버리는 것. 이 역시 거대한 국민사기극이 아닌지요? 여기에 대한 강준만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3. 옥석 논쟁

다음은 최근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지는 '옥석논쟁'에서 드러난 몇 가지 우려할 만한 경향에 관한 지적입니다. 최근 일부 열성적인 노무현 지지자들 사이에는 '옳기 때문에 노무현이 아니라 노무현이기 때문에 옳다'고 말하는 경향이 보이고 있습니다.

가령 노무현 후보와 관련하여 족벌언론을 위해 18일간 단식을 한 한나라당 박종웅 의원을 부산경선의 후보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보도가 나가자, 한때 박종웅 의원의 단식을 비웃었을 사람들 사이에서 "박종웅은 민정계가 아니라 민주계"라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네티즌들이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 이유 중의 하나가 조선일보에 대한 그의 단호한 반대의 표명이었다는 점을 볼 때, 일부 네티즌들의 이런 경향은 안티조선의 입장에서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울시장 후보에 관해서도 이와 비슷한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진보정당에서 후보를 내는 것은 수구세력의 집권을 돕는 일이다", "독자 후보를 내는 진보정당은 한나라당의 2중대다"라는 거친 발언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강준만 선생께서도 지난 대선에선가 '진보정당은 출마할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라"고 말했다가 <말>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 발언에 대해 사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 발언을 하셨던 당시에 강준만 선생이 갖고 있던 그 생각이 아직 열성적인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듯합니다.

저는 진보정당에서 독자 후보를 내는 것이 우리 헌법에서 보장하는 참정권, 즉 공무담임권의 행사라 보며, 이를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천부의 인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민주사회의 상식이라 생각합니다.

과연 일부 네티즌들이 얘기하듯이 진보정당에서 독자 후보를 내는 것이 수구세력을 돕는 일이며, "제2의 김문수, 이재오"가 되는 길로 비난을 받아야 하는 일인지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다른 한편 "지방선거는 대선의 전초전"이라며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려면 지방선거에서 무조건 그와 같은 당에 속하는 후보를 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인터넷 논객은 "노무현과 김민석은 운명공동체"라고까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언제부터 김민석이 노무현과 "운명공동체"였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민주당 쇄신파동 때 김민석 씨는 이인제 씨를 지원했던 동교동계를 육탄으로 방어하다가 빈축을 산 적이 있는 것으로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저는 대선과 총선, 지방선거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가설은 우리의 정치사에서 한번도 입증된 바 없는 미신일 뿐이라고 봅니다. 더욱이 서울시장은 노무현이나 이회창 씨를 위해서 뽑는 것이 아니라 1000만 서울시민을 위해 뽑는 것이 상식이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건전한 시민사회의 상식을 바탕으로 발언해야 할 일부 인터넷 논객들의 이 정치성 짙은 발언에 대해 강준만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마지막으로 "될 사람을 밀어주자"는 견해가 있습니다. 소위 '대세론'이라는 것이죠. 저는 강준만 선생님이 어디선가 '될 사람이 아니라 되어야 할 사람을 밀어주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혜안과 통찰에 동의합니다. 과연 강준만 선생님의 말씀이 적중해 이인제, 이회창 대세론은 일주일만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선이 시작되기도 전에 당선가능성에서 멀다는 예단을 내리고, 거기에 입각해 특정 후보의 당선을 처음부터 배제하는 이 어법이 건전한 시민의 상식에 위배된다고 판단합니다. '될 사람을 밀어주자'는 무지막지한 생각을 버리고, 시민 모두가 '되어야 할 사람'을 밀어준다면 그 사람은 저절로 '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되어야 할 사람'의 당선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될 사람을 밀어주자'는 생각이겠지요. 모두들 되어야 할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한탄하면서 정작 투표장에 나가서 될 사람을 밀어주는 것 역시 또 하나의 국민 사기극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저는 특히 진보적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기 의사를 미래를 위해 투명하게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소위 전략적 투표, 정치적 고려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실용주의적 지지자들은 이런 투명한 표를 전략적인 실패라 비난할 것이 아니라 이들의 자리를 더 많이 마련해주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혜경 시인이 최근에 이문옥 감사관을 "시대의 표상"이라 부르며 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저는 바로 이 말 속에 시민사회의 상식이 들어 있다고 봅니다.

우리의 낙후된 정치문화를 바꾸는 지름길은 시민 모두가 자디잔 정치적 계산에 휘둘리지 않고 원칙과 소신에 따라 표를 던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바로 그럴 때에 정치가들도 얄팍한 정략적 계산을 포기하고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올바른 정치를 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의 마지막 질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노무현 후보와 비슷한 길을 걸었던 이문옥 후보에 대한 강준만 씨의 견해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일신상의 불이익을 무릅쓰면서까지 원칙과 소신의 길을 걸었던 사람에게 시민사회가 보상을 하지 않는 것은 강준만 선생님이 개탄해 하신 '국민 사기극'의 또 다른 측면이라고 봅니다.

안티조선과 함께 노무현과 이문옥은 우리 시대를 가늠하는 하나의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감히 조심스럽게 이 시험지를 강준만 선생님께 갖다대는 것입니다.

4. 차이의 연대

곧 대선이 다가옵니다. 조중동 족벌언론의 논조를 보면 벌써부터 노무현 후보에게 "두고 보자"는 식으로 날카로운 발톱을 갈고 있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 진중권 씨 ⓒ 오마이뉴스 노순택
아마도 노무현 후보에게는 힘겨운 싸움이 되겠지요. 불행히도 정치적 견해가 달라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중동이 노후보에게 부당한 정치공세에를 펼 때 시민사회의 상식을 넘지 않는 선에서 그를 '엄호'할 수는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엄호하는 것은 노무현이라는 어느 탁월한 정치가도 아니고, 그가 속한 민주당이라는 정당은 더 더욱 아니며, 노무현에게서 마지막 희망을 보는 수많은 시민의 염원입니다. 비록 생각은 다르지만 이 중요한 시기에 뜨거운 연대를 할 것임을 맹세하면서 이 편지 형식의 글을 여기에서 접습니다. 건필하시고 내내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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