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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하늘 아래 봄이 왔나 싶은 요즘, 최악의 황사가 을씨년스런 삼월을 붙잡고 지나갔다. 황사로 뒤덮인 하늘을 바라보면 이런 말이 생각난다. "가난한 유관순보다 부자 마돈나가 좋다!"

그림1 1919년 서대문감옥 수형기록부에 남아있는 유관순 열사 사진. 구타와 고문으로 얼굴이 심하게 부어 올라 있다.
얼마 전 젊은 유곽여성들의 실태를 심층 취재한 TV방송에서 어떤 여성이 했던 말이다. 그녀의 말은 유곽여성 혼자만의 생각이 결코 아닐게다. 사회의 가치관과 세태를 말해주는 한 예일 뿐이다. 우리는 '세계 1위 초고속 인터넷 사용국'답게 오직 외모, 돈, 권력만을 향해 광속으로 질주하고 있지 않은가.

대체 사람들이 떠올리는 '유관순 이미지'는 어디서 온 것인가. 아마 죄수복을 입고 있는 열사의 사진이 아닌가 싶다(그림 1). 현재 목천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는 교과서나 각종 자료에 나오는 1919년 서대문감옥 수형 기록부에 붙어있던 사진 말이다. 사진 속 누님의 얼굴은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일제의 고문으로 얼굴이 '퉁퉁' 부어올라 있기 때문이다. 미인이 되기위해 성형수술도 마다않는 인간들이 소위 "견적 많이 나올" 이런 얼굴을 좋아할리 없다.

허나 누님의 본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3.1운동으로 이화학당이 폐쇄되기 전, 학우들과 찍은 사진까지는(그림 2). 원래 누님은 윤곽이 또렷하고 갸름하고 청순하면서 영민한 얼굴형이었다(그림 3). 제대로 된 눈을 갖고 있다면 본래의 얼굴을 보라. 세상은 왜 이런 누님을 욕되게 하는가. "마돈나가 더 좋다"는 세태 때문만은 아니다.

그림 2(왼쪽) 3.1운동으로 폐쇄되기 전 이화학당에서 학우들과 찍은 사진. 맨 오른쪽 뒤편에 서있는 사람이 유 열사. 이 사진은 수형기록부의 부어 오른 사진과 달리 유 열사가 윤곽이 또렷하고 갸름하면서 영민한 얼굴형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림 3(오른쪽). 옆의 사진에 기초해 복원한 유 열사의 초상화(작자 미상).

천안 병천 유관순 기념관에 가면, 추모각에 1986년 광복절에 봉안된 유 열사 영정이 있다(그림 4). 모르는 사람들은 앉아 있는 유 열사의 영정을 보며 숙연해질지 모른다.

그림 4 유관순 기념관 추모각의 유 열사 영정. 1986년 8.15 광복절에 월전 장우성에 의해 그려져 봉안되었다.
하지만 나는 영정 앞에서 유 열사의 혼백이 두 번 통곡하는 소리를 듣는다. 누님은 말한다. "내 얼굴 돌려줘!"

온갖 폭행과 고문으로 살해하고(그림 5),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힌 무덤마저도 말살한 일제의 '죄수 사진'으로 영정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또 누님은 오열한다. "누가 나를 친일파 화가의 손으로 그려달라고 했니?" 영정을 그린 화가는 월전 장우성이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초기 원로교수 장발, 노수현과 함께 "지금까지 알려진 친일미술가 50여명 중 한사람"으로 학계에 알려져 있다(이태호, "1940년대 초반 친일 미술의 군국주의적 경향성",『근대한국미술논총』학고재, 1992년, 322쪽).

장우성은 18세 꽃다운 누님의 얼굴을 은폐시키고 일제의 죄수사진 보다 더 부어 오른 중늙은이의 모습으로 심하게 왜곡시켜 놓았다. 마음가는 곳에 붓 따라 가는 법이다.

사람들은 누님이 해방된 우리를 위해 순국하신 날을 기린다며 매년 10월 12일 이 영정 앞에 모여 추모제를 지낸다. 이 꼴을 보며 누님이 말한다.

"더 이상 날 능욕치 말라. 해방된 것은 너희가 아니라 친일파들이다. 이 얼빠진 것들아!"

그림 5. 서울 서대문구 형무소 자리 (현.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 보존된 유 열사가 순국한 장소, 일명 '지하감옥'. 이 건물 속에 일제가 항일투쟁한 여성만을 격리수감하고 고문하기 위해 지은 '지하감옥'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어이없게도 이 '지하감옥'의 지상건물(2층 지붕양식)이 전형적인 왜식건물이어서 준공 당시부터 논란이 되기도 했다.ⓒ 김민수, 2002.

해방 후 우리는 친일파 단죄 한번 못하고 일제잔재가 뿌리 박힌 문화 속에 살고 있다. 프랑스는 전후에 친나치 부역자들을 철저히 단죄해 역사의 교훈을 남겼다. 반면 우리는 친일파들이 이승만 정권의 비호 아래 '반민특위'를 해체시키고, 사회의 모든 권력을 장악해 버렸다.

이 결과 문화예술계에서도 마치 공상과학영화 '에일리언'(Alien) 시리즈처럼 끈질긴 '식민의 알까기'가 계속되었다. 시고니 위버가 주연했던 이 영화에서 에일리언은 1편의 어미가 사라져도 4편에 이르기까지 인간 몸을 숙주 삼아 계속 복제한다. 마찬가지로 해방 후 미술ㆍ디자인계에서 친일파들은 교육계에 포진해 후진들의 눈과 마음에 식민미학을 확대 재생산해왔다.

예컨대 유 열사의 영정을 그린 장우성과 함께 장발(張勃), 노수현(盧壽鉉)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초기 교수진이었다. 이들이 해방 후 한국 화단과 후진양성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특히 해방 후부터 4.19 혁명 직후까지 미술대학 학장을 지낸 장발은 1941년 2월 22일 일제에 그림을 그려 바치는 회화봉공(繪畵奉公)을 맹세한 경성미술가 협회에 참여해 김은호, 김인승, 심형구 등과 함께 활동했다. 당시 매일신보는 장발이 포함된 참여인사의 명단과 함께 이렇게 전하고 있다(그림6).

"화단의 신발족! 국가의 비상시국에 직면해 신체제 아래에서 일억 일심으로 미술가 일동도 궐기해 서로 단결을 굳게하고, 조선총력연맹에 협력해 직역봉공을 다하자는 목적으로 발기된 경성미술가협회 결성식이 22일 오후 2시부터 부민관 중강단에서 거행". (「매일신보」, 1941년 2월 23일자).

그림6.「매일신보」, 1941년 2월 23일자

장발은 "1960년 4.19 운동 이후, 서울대 미술대학 학생총회에서 퇴진이 결의될 만큼 학생활동의 자주성을 침해하고 독선적 행정을 했다. 또한 현재까지도 미술계의 고질병처럼 남아있는 홍익대학교와의 파벌주의와 화단의 분열을 주도한 장본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서울대학교교수민주화운동50년사』1997년 서울대출간, 31쪽 정리요약). 1996년 서울대는 개교기념 50주년을 맞아 이러한 사실을 은폐한 채, 그를 '자랑스런 서울대인'으로 추대했다. 미대는 같은 해 12월 당시 생존해 있던 장발의 흉상을 미대 교정에 세웠다. 그가 2001년 4월 마침내 10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서울대 미대는 흉상에 분향소까지 차려놓고 참배했던 것이다(그림 7). 이 흉상의 뒷면엔 그의 ".....학은을 기리기 위해 뜻을 모아 선생을 상을 세운다"라는 명판이 또렷히 새겨져 있다(그림 8).

그림 7(위). 2001년 4월 장발 사후 분향소가 차려진 흉상. 1996년 제작. ⓒ 김민수, 2001.
그림 8(아래). 장발 흉상의 뒷면 명판. ⓒ 김민수, 2001.
한편 노수현은 월간지 <신시대>에 군국주의를 선동하는 노골적인 만화 '멍텅구리'를 연재했다. 신시대는 친일파 노익형(盧益亨)이 1941년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을 이루기 위한 세기적 대전환기에 필요한 신시대의 대중교양"을 표방해 창간했다(이태호, "1940년대 초반 친일 미술의 군국주의적 경향성". 『근대한국미술논총』 학고재, 1992년, 342쪽 인용.)

글과 그림이 함께 하는 만화 매체의 특성 상, 멍텅구리는 김은호의 '금채봉납도'(金釵奉納圖, 1937년)나 김기창의 '총후병사' 등의 회화 보다 훨씬 더 노골적인 선동적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멍텅구리 연재 '운전수편'의 내용은 가관이 아니다(그림 9). 만화의 주인공이 말한다. "때는 비상시 국력총동원하는 때에 자동차 운전을 배워서 전선에 나가자." 노수현은 "1940년 조선남화연맹에 참가해 판매수익금 전액을 일본의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의미로 헌납"하기도 했다(민족문제연구소 주관, '부끄러운 자화상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중에서).

그림 9 노수현작, 멍텅구리, 『新時代』(1941년) (출처: 이태호, "1940년대 초반 친일 미술의 군국주의적 경향성", 『근대한국미술논총』학고재, 1992년, 355쪽.)
친일 미술인들의 눈과 마음을 통해 전수된 식민미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중적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디자인과 일상 삶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제대로 된 눈을 갖고 있다면 1988년 오륜기에서 햇살이 뻗어 나오는 서울올림픽 공식포스터를 다시 보자(그림10). 올림픽 당시 디자인관련 총괄 아트디렉터였던 서울대 미대 조영제 교수(현 명예교수)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동아 성전'(聖戰)위해 사용했던 욱일승천기(태양기)를 화두 삼아 전후 일본 현대 그래픽디자인계를 이끈 '일본 대부'를 흠모한 결과였다.

화면 밑에 성화를 들고 달리는 주자 위로 오륜 심벌마크에서 발산하는 빛의 형상화는 '컴퓨터 그래픽'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이 이미지는 1980년 일본 디자이너 겐다 에수오(源田悅夫)가 타이어회사 브릿지스톤(Bridgestone)사를 위해 디자인한 홍보물에서 이미 '같은 빛의 무늬'를 발하고 있었다(그림11). 겐다는 88년 서울올림픽 공식포스터를 마치 미리 예견하듯이 같은 빛을 형상화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서울올림픽 포스터를 책임진 총괄 책임자가 조영제였고, '기법상의 원작자'가 바로 겐다였기 때문이다.

그림10(위 왼쪽). 조영제, 서울올림픽 공식포스터, 1988.
그림11(아래). 겐다 에수오, 브릿지스톤사를 위한 홍보물, 1980.
그림12(위 오른쪽). 가메쿠라 유사쿠, 오사카 세계박람회 포스터, 1970.

조영제는 오랜 일본의 영향력 속에서 컴퓨터 그래픽의 기법을 겐다에게 맡겨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문화와 정신을 세계 만방에 알린다면서 일본 디자이너의 손으로 제작된 포스터에서 '일본의 혼'을 본 것은 당연하다. 이 책임은 총괄 책임자로서 조영제의 몫으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그는 기법만 차용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일본디자인계의 대부 가메쿠라 유사쿠(龜倉雄策)의 디자인 세계를 흠모해 왔기 때문이다.

증거로서 서울올림픽 포스터는 1970년 오사카 일본세계박람회를 위해 가메쿠라가 디자인한 'EXPO포스터'와 기본적으로 발상이 같다(그림12). 차이가 있다면 가메쿠라의 EXPO포스터는 욱일승천기를 마음에 품고 검은 바탕색에 일본 국화문장을 정점으로 뻗어나오는 황금 햇살 이미지로 그려졌다. 반면 조영제의 포스터는 오륜마크를 중심으로 '컴퓨터로 제작한' 푸른 빛이 나오는 밑으로 성화주자가 뛰고 있는 것뿐이다. 발상에서 차이가 없다. 어쨌든 조영제는 가메쿠라로부터 유래하는 '빛의 형상화' 기법으로 한국 현대 그래픽디자인계를 이끈 인물로 노후까지 보장되었다. 이처럼 우리 한국은 최근까지도 끈끈하게 맺어진 '식민의 빛'을 발하는 성화를 들고 열나게 뛰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일본식 도안양식화 기법으로 오천년 역사와 문화의 향기를 지워버린 김현의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그림13). 주제는 상모를 돌리는 아기 호랑이로 한국적인지 모르지만, 기법적 내용에 있어서 이미지가 지녀야할 맛으로서 '내적 정체성'이 사라진 도식적 표현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일본식으로 우리의 삼태극 사상을 단순 문양으로 환원시키고, 나아가 미국의 LA올림픽 휘장을 모방한 서울대 미대 교수 양승춘의 서울올림픽 '휘장 디자인'(엠블렘, 그림14). 전후 일본 만화가 요코하마 미쓰데루 원작의 '요술공주 새리'와 '밍키'에서 유래한 만화가 이현세의 서울경찰청 캐릭터 '포돌이'(그림15)와 '포순이'의 이상한 눈알 등등. 이 모두가 두 눈뜨고 보고 싶지 않은 일제잔재의 황사들이다.

그림13(왼쪽 위). 김현,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 1988
그림14(왼쪽 아래). 양승춘의 서울올림픽 휘장 디자인과 로버트 러년이 디자인한 1984년 미국 LA올림픽의 휘장 비교. LA올림픽의 휘장은 '움직이는 별'을 주제로 속도감을 '그라데이션 기법'으로 처리했다. 서울올림픽의 휘장은 '움직이는 삼태극'을 주제로 했다. 삼태극의 사상과 정신을 일본식 도안기법으로 '단순 문양화'시키고, LA올림픽과 같은 발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림15(오른쪽). 독립문 사적지 앞의 풍경. 멀리 빨간 우체통 뒤 경찰청 안내판에 포돌이가 보인다. 앞쪽의 휴지통엔 독립문을 형상화한 서대문 구청의 상징이 새겨져 있다. 과연 우리는 독립을 했는가? ⓒ 김민수, 2002.

이번 3.1절을 기해 '민족정기 세우는 의원모임'에서 친일파 명단을 발표한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명단 속에 포함된 미술계 인사는 고작 두 명(김은호, 심형구)밖에 없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일제잔재 청산은 미래로 가는 길목에 장애가 되는 해묵은 걸림돌이 결코 아니다. '21세기 문화전쟁'의 핵심어, '문화적 정체성'을 찾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민수 기자는 서울대 미대 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 중 미대 원로교수들의 친일문제를 논문에 언급한 것이 '괘씸죄'로 몰려 지난 98년 재임용에서 탈락, 현재 대법원의 최종판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후 김 기자는 4년째 '강의실 밖 강의'를 해오고 있으며, 각종 매체에서 왕성한 미술(디자인)비평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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