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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겨울이 완전히 꼬리를 사리기 전인 삼월 초순, 그러나 민감한 사람이라면 찬 바람결 속에서도 숨어 있는 봄의 기운을 느낄 만한 어느 하루, 북한산을 올라 보라. 거기 안개에 휩싸여 몽환적인 색채를 띤 산수유가 잊었던 애인이라도 되는 듯 아련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방울방울 밀려 산을 떠다니는 안개와 파스텔화처럼 번져 피어 있는 산수유와, 그리고 울퉁불퉁한 바위 등짝으로 난 길은 인간의 마을로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는데, 길을 따라 한 때는 제법 큰물이 흘렀을 것 같은 마른 개울이 빈 몸뚱아리를 눕히고 있다. 그리고 군데군데 땅 속에서 끌어 올린 약수물이 시린 바깥 공기에 온 몸을 떠느라 부스스 온기를 피워 올린다.

대동문에서 보국문을 거쳐 청수장으로 굽이를 튼 등산로는 온통 바위투성이에 가파른 돌길이지만, 진달래 능선이나 도선사 옆구리쯤으로 해서 올라온 사람이 빠른 시간에 인간의 마을에 닿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해서, 주말이면 숱한 사람들의 발길에 쉴 틈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약수터 근처 나무들은 하나같이 사람의 때로 반질반질하고, 더러 들리는 풍문으로는 약수가 오염돼 식수로 적합치 않다는 이야기마저 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또 끊이지 않고 이 길을 오르내려 이 산에 깃들여 사는 다람쥐나 까치 따위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여름 한철, 큰 비라도 오는 날이면 등산로를 따라 나 있는 물길에 우당탕탕 큰 물살이 흐르기도 하지만, 평상시야 그저 제 몸뚱이는 땅 안쪽으로 감추고 겉으로는 흙먼지나 풀풀 일으키는 개울이, 평지 가까이에 이르면 드디어 어린애 실핏줄 만한 물줄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다 산 발치, 군데군데 휴게소와 간이 화장실 같은 인공의 구조물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그 부조화를 견뎌내기라도 하려는 듯 제법 실한 물줄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때로 아이들은 그 물살에 들어앉아 송사리나 가재를 잡기도 하고, 일없이 돌멩이를 내던져 물탕을 튀기기도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물줄기는 이제 몇 개의 둠벙과 시멘트 턱을 넘어 정릉 청수장 빼꼭한 인간의 마을을 거쳐 흐른다.

이름하여 정릉천. 정릉 골짜기를 거쳐 흐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을 성싶은 이 개천은 북한산의 맑은 샘으로 시작하였지만 숱한 인간의 내음이 묻기 시작하는 청수장을 지나면서 드디어 개울이라고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청수장 초입, 온갖 음식점들이 모여 주말과 휴일의 등산객들 주머니를 바라며 빈대떡에 파전, 막걸리와 감자탕까지 술과 안주들을 차려놓고 있는데, 그 집들에서 나오는 음식 찌꺼기와 때로는 취객이 뱉어놓은 오물들까지 섞이면서 언제 맑은 물이었던가 기억조차 가물가물해 지게 된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좋다. 이제 개울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머리 꼭대기를 시멘트로 덮어쓰게 된다. 복개된 개울은 사람들에게 얼굴 조차 보여주지 못하며 흐른다. 사람들이 먹다 버린 숱한 것들과,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는 갑남을녀들이 씻고, 누고, 싸버린 모든 것들이 이 개울에 악취와 때를 더한다.

간밤의 숙취 뒤끝도 섞이고, 부부 싸움 끝에 내던진 요강단지의 지린내도 섞이고, 집 떠나와 자취하는 어느 고학생 혹은 직장 여성이 며칠째 설거지통 속에 버려 두었던 라면 국물도 섞이고, 몇 년 동안 막히고 쌓여 썪어 문드러졌던 온갖 쓰레기들이 흘려대는 침출수도 섞여, 그것들 속에 묻혀 살아가는 인간군상들의 일상사들도 함께 이 개울에 모여들어 흐른다. 그리하여 드디어 이 개울은 개울이 아니라 개천, 혹은 그 개천에 자신이 먹고살던 찌꺼기들을 뱉어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뒤섞여 흐른다.

북악터널과 청수장의 갈림길에서 미아리고개에 이르는 복개된 거대한 도로 아래로 흐르는 정릉천은 옛날 서라벌 고등학교 터 앞을 거쳐 안암동을 지나며 더 많은 생활하수와 섞이고, 드디어 제기동 쯤에서 다시 제 얼굴을 보여준다. 보여주고 싶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아직 그쯤에서는 복개가 채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다.

오랫동안 어둠 속을 흘러온 물줄기들은 이제 시커멓게 물든 얼굴에 곳곳에 상처와 종기로 만신창이다. 그래도 햇살에 얼굴을 내밀자마자 둘레둘레 사방을 훑어보는데, 머리 위로 난데없는 거대한 시멘트 말뚝이 솟구치고, 말뚝과 말뚝은 또 가슴이 탁 무너질 만큼 어마어마한 시멘트 길을 허공에 매달고 있다. 이름하여 도심 순환 고속도로라는 것인데, 그놈의 거대한 위용에 그만 졸아들대로 졸아든 개천은 제대로 흐르지도 못하고 찔끔찔끔 구덩이만 파놓고 만다. 그리고 물살이 흐르지 않아 빈 개천에는 온통 미국산 자리공이 제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때때로 참새 따위가 그 막막하고 끔찍한 개천에 들어가 그래도 모이랍시고 무엇을 쪼아먹기도 하지만, 대개는 텅 빈 채로 하루하루 햇살에 말라가고 있는데, 오후 서너 시쯤이면 근처 학교에서 지루한 공부를 끝낸 아이들 몇이 툭툭 차고 가던 공을 개천으로 넘기고는 기웃기웃 찾아들기도 한다.

장마철이면 갑자기 쏟아지는 물줄기에 난데없이 넘실넘실 혀를 빼무는 이 개울을 아이들은 제느강이라 불렀다. 아마도 근처의 대학생들 틈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그 강의 이름은,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를 슬쩍 본떠 만든 싯구절로 더욱 입에서 오르내렸으니.

안암교 다리 아래 제느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끝이 없이 흐르네....

사랑이 흐르는지, 개천 곁에 모여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혹은 아픔이 흐르는지, 어느 해 여름 어린애 한 명이 거센 물길에 휩쓸려 이승을 하직하기도 했다는 정릉천 너머로 날마다 해는 떠오르고, 바람이 불고, 때로는 빗줄기가 거세게 퍼붓기도 하고, 노을이 지며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자신이 흘러온 길목마다 사람들의 숱한 삶의 곡절들을 마음에 감추어둔 채 정릉천은 흘러 청계천이 되고, 한강이 되고, 드디어는 서해 바다가 된다.

그 정릉천 발치, 청계천과 막 손잡기 전의 어름에 한 학교가 있다. 대한민국 공립 중학교의 하나인 그 학교 앞으로는 큰길을 향해 아름드리 포플러들이 하늘을 찌르고 서 있는데, 여름철이면 바라보기만 해도 시원한 느낌이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마치 지저분한 개천을 제 온 몸으로 막아내기라도 하는 듯, 포플러는 오랜 세월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을 것이다.

정릉천은 제 이름으로 마지막이 되는 그곳에서 열 네 살부터 열 여섯 살까지의 활기 넘치는 사내아이들의 온갖 이야기를 가을부터 초여름까지 제 몸 안 웅덩이에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견뎌내다, 여름 한 철 거센 빗줄기가 쏟아지면 비로소 그 이야기들을 모두 안고 청계천으로 흘러가 버린다. 그리곤 세상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묵묵히 한 세월을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해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고, 또 그만큼의 아이들을 제 품에 거두는 대한민국 중학교처럼.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대한민국 사람이면 대부분 삼년을 살아야 하는 집인 중학교에 대한 이야기(소설)입니다. 이야기는 한 회분이 독립적으로 완결되지만, 전체는 같은 공간인 어느 중학교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나는 그 집에 조금 더 살아본 사람의 자격으로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다시는 그 집에 살지 않게 된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그 집에 대한 추억을 되살려주고 싶고, 아직 그 집에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자신이 사는 집의 속내를, 그리고 그 집에서 아이들과 호흡하며 살아가는 선생님들과는 교직이라는 자리, 교육이라는 것의 의미를 돌이켜보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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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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