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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뉴스 국립극장에서 열린 발티카 99의 개막식에서는 엄청난 해프닝이 일어났다. 평택농악단의 공연 중에는 악사가 자신의 어깨 위로 어린이 두 명을 무등 태우고 행진하는 장면이 있는데, 아이 두 명을 태우고 등장해야 될 악사가 공연 시작 전 마신 맥주 때문에 그랬는지 도중에 아이 한 명을 떨어뜨리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다행히 어깨 위에 올라간 어린이는 아니고 허리에 매달린 어린이였기 때문에,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놀라 국립국장 무대 위에서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리투아니아 전국으로 생방송되는 행사였는데. 나도 정말 그 떨어진 아이 못지않게 가슴이 얼마나 철렁했는지 모른다. 다행히 아이를 떨어뜨리는 장면은 방송에서 나오지 않았다. 공연 전에 약주를 한 잔씩 하시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군, 그래도 그렇지...

개막식에서 그런 어이 없는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평택농악단이 가는 곳마다 구경꾼들이 성황을 이루었다. 하루에 두어 차례씩 한 공원의 지정된 자리에서 매일 공연을 올렸는데, 다른 참가국으로부터 거센 항의가 들어올 정도였다. 한국 공연단에만 관람객들이 다 몰려가서 자국의 공연에는 사람이 정말 없다는 것이었다.

시끄러운 꽹과리 소리와 장구소리를 줄이더라도 난생 처음 보는 울긋불긋한 신기한 옷을 입은 농악단은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행사 둘째 날부터 야외공연은 한국인이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본인이 직접 마이크를 잡고 곡과 춤에 대한 해설을 리투아니아어로 진행하기로 했다.

물론 리투아니아어가 완벽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에게 이해를 시키기에는 충분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리투아니아어로 한국 음악과 농악에 대해서 설명하는 한국인은 그 '농악,만,큼'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나 보다. 그 모습은 리투아니아 9시 뉴스 촬영팀의 카메라에 잡혀 리투아니아 전역에 방송이 되었다.

다음 날 급한 사정으로 택시를 이용하게 된 본인은 택시기사로부터 나를 어제 뉴스시간에 보았다고, 친한 척 인사를 받게 되었고 낯선 사람으로 받은 인사는 그 이후로도 계속 되었다. 방송의 힘이라는 것이 그렇게 큰 건지, 아니면 그런 조그만 뉴스거리를 전부 기억할 만큼 이 나라가 조그마한 건지 감이 좀 안 잡히긴 했다.

그 후로도 진행된 발티카 행사에 방문한 관객은 전부 평택농악을 구경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평소에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걷는 것이 불편하신 할아버지들도 악기를 짊어지면 어디서 힘이 솟는지 덩실덩실 춤을 추시던 게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 어깨 위에서 알록달록한 춤을 추던 미정이와 민주 등 꼬마녀석들은 아마 지금쯤 어깨 위에 올라가기에는 무리다 싶을 정도로 커있을 것 같다.

그래서 평택농악단은 공연연혁을 소개할 때 멋진 유럽공연 사진을 넣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경기문화재단은 한국문화의 불모지인 동유럽에서 한국음악을 소개한 업적을 낳게 되었다.

그래도 평택농악단 단원 손에 쥐어서 어머니께 보낸 선물에 담긴 편지에는 '나는 지금 너무너무 행복하다'고 적어놓았던 기억이 난다. 나와 관련된 여러 상황이 안 좋았지만, 발티카 조직위원장의 진심 어린 감사의 말이 정말 모든 것을 잊게 만들어주었고, 빌뉴스 시내에 쟁쟁 울려퍼진 풍악소리만으로도 정말 그때 나는 행복감을 느꼈다.

그 행사를 위해 리투아니아에 머문 시간은 약 일주일 정도였다. 리투아니아의 문화부에서 초청한 VIP라는 직함이 정말 기분 좋은 체류기간이었지만, 모든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나는 바르샤바로 가는 버스에 다시 올라타야만 했다.

1999년 여름은 그렇게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름방학은 기억에 남는 여러 가지 일을 많이 만들어주었다. 발티카 행사가 끝난 후 나는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 카우나스에 있는 비타우타스 대학교에서 잠시 한 달동안 머물면서 어학연수를 받을 계획을 하고 있었다.

이곳 유럽은 여름방학이 엄청나게 길기 때문에 그 긴 시간 동안 집 안에서 빈둥거린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와 체력이 없다면 정말 힘든 일이 아닐 수 없기에 나는 발티카가 끝난 뒤 다시 짐을 싸들고 리투아니아에 돌아왔다.

카우나스라는 곳은 비교적 낯선 곳이었다. 빌뉴스를 택하지 않고 카우나스를 택한 것은 리투아니아를 좀 그래도 넓게 보고 싶었고, 수도를 전 국토의 모습으로 착각하는 실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는 그럴 듯한 이유거리가 있다.

빌뉴스에서 공부하는 외국인들은 상당수 있는 반면 카우나스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모여드는 외국인들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이다. 게다가 카우나스 비타우타스 대학교의 리투아니아어 어학연수는 내가 1기생이었다. 그 해가 처음이었다는 이야기이다.

나와 같은 1기생 중에는 유럽행 비자를 받기 위해 어학연수를 신청하고 비자를 받은 후 종적을 감추어 버린 파키스탄 사람들 몇 명과, 알렉산드로, 마르코 두 이탈리아 친구들과, 베아타라는 폴란드 여학생이 1기 학생이라는 한 배를 타게 되었다. 학생이 전부 네 명이라니... 정말 이상적인 학생 비율이 아닌가?

그 세 명과 정말 금방 친해졌다. 나는 폴란드 사람은 아니었지만, 사는 곳과 공부하는 곳이 폴란드였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학생들은 이태리파 두 명과 폴란드파 두 명으로 나뉘었다. 그 이태리 친구들은, 리투아니아어가 라틴어와 비교적 비슷하다는 장점을 이용해서 야금야금 리투아니아어를 정복해 나가기 시작했고, 또 카우나스에 '깔려 있는' 이태리 식당을 하나 하나 공략해 가면서 발판을 넓혀나갔다.

반면 비교적 성격이 '온화한' 폴란드파는 수업시간과 기숙사를 오가는 수도생활로 한 달을 지내게 되었다. 기숙사가 비타우타스 대학에서 걸어서 불과 10분이었으므로 버스표를 살 일도 없었다.

어느 국가나 마찬가지겠지만 리투아니아에서 어떤 목적으로든 장기체류를 하게 되면 먼저 비자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한국과 비자협정이 맺어져 있는 유럽국가의 경우 무비자 체류기간은 보통 3개월인 경우가 많은데, 리투아니아는 애매하게도 15일이다. 그러므로 체류를 시작한지 15일 안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보통 나는 리투아니아에 간 후 약 13일 쯤 지나 비자를 신청하러 가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 벌어질 엄청난 일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이 나는 여권과 사진을 들고 쫄래쫄래 카우나스 외국인비자사무소에 찾아갔다.

덧붙이는 글 | 필자의 발트3국에 대한 홈페이지 http://my.netian.com/~perku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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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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