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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디즈를 떠나 도착한 곳은 지브랄타르였다. 빌바오에서 시작된 南(남)으로의 긴 여정이 끝나고 이제 서서히 동쪽으로 나아간 뒤 북진하는 코스가 남았다. 지브랄타르. 영국령 요새. 어렸을 적 지리 교과서에서 이 지명을 배우고 그 발음 때문에 얼마나 웃었던가. '지'를 빼고 빨리 발음하면 '男性(남성)의 제조창'이 연상된다는 이유로. 그래도 지브랄타르는 북송의 선비인 王自之(왕자지)보다 행복하다. 그는 한국식 발음 때문에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지도 못했다.

지브랄타르는 이베리아 반도의 남단에 영국의 요새가 한 점 섬처럼 박혀 있는 형국이다. 그 위치를 보자면 초등학교 때 배운, 사람 몸 속의 내장 그림이 생각난다. 기억하는가?, 꾸불꾸불한 小腸(소장), 大腸(대장)을 모아놓은 직사각형 모양의 내장 그림. 그리고 가장 아래쪽의 실로 묶어놓은 듯한 대장의 뾰족한 돌기.

지브랄타르는 직사격형의 이베리아 반도 남단에서 그 돌기처럼 불룩 튀어나온 지점이다. 그 돌기가 막히거나 시원하지 못할 때 사람이 힘을 못쓰듯이 스페인도 18세기 초 이를 영국에 뺏긴 이후 영 힘을 쓰지 못한다. 스페인과 지브랄타르의 관계는 미국과 쿠바의 관계와 유사하다. 미국 사람들이 플로리다 남단에서 200여 kn 떨어진 공산주의 쿠바에 대해 느끼는 불만보다 자기 땅을 뺏긴 스페인 사람들의 불만이 컸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스페인의 등에 꽂힌 비수 지브랄타르

기록을 살펴보면 1704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에 영국의 조지 루크란 귀족이 이곳을 점령한 후 지금까지 영국이 관할하고 있다. 유럽의 다른 나라 땅에 군대를 항구적으로 주둔시키지 않는 영국이 왜 이런 이례적 행동을 했을까.

당시의 유럽 정세는 이러했다. 1701년 스페인 국왕의 대가 끊어지며 유럽 주요 국가들은 누가 그 후계를 잇느냐를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유럽 왕조의 특징은 자기 나라 왕의 대가 끊어지면 국내에서 새로운 왕을 옹립하기보다는 국외의 명문 가문 또는 王朝(왕조) 에서 후계자를 구하는 게 관행. 예컨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독일 하노버 가문의 후예이듯이.

그 중에서도 스페인의 다음 왕위를 놓고 가장 치열한 경합을 벌인 곳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과 막 전성기에 들어선 프랑스 부르봉 왕조. 결국 태양왕 루이 14세의 부르봉 왕조가 판정승을 거둬 지금의 카를로스 국왕에 이르기까지 범 부르봉 왕조가 스페인에 계속된다.

이런 상황, 프랑스- 스페인의 왕실간 연합을 예상한 영국이 사전 예방 차원에서 미리 스페인의 뒷등에 날카로운 비수를 박은 것이다. 이후 영국은 스페인의 계속된 도전에도 불구하고, 지브랄타르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해, 어떤 일이 있어도 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19세기말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이후 지브랄타르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커진다. 인도와 아라비아 반도에서 오는 무역선, 유조선의 유통 경로가 단축된 대신 운하와 해협을 반드시 확보할 필요가 더 커진 것이다. 수에즈 운하와 지브랄타르는 그래서 영국군이 국외에 배치한 검문소와 같았다고 생각된다.

나바론의 요새는 영국령 지브랄타르 때문에 무너졌다

지브랄타르의 효용은 2차 대전 때 더욱 확실히 입증됐다. 히틀러의 독일을 지중해에 가두는 한편 이 해협을 통해 독일을 지중해 깊숙이 공격해 들어갈 수 있었다. 영화 '나바론의 요새'에서 연합군 특공대의 성공은 지브랄타르의 안전이 담보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독일은 사막의 여우 롬멜이 아프리카에서 善防(선방)했음에도 지브랄타르 해협으로부터 터키 보스포러스 해협까지 펼쳐지는 지중해의 패권을 놓쳤고, 그 결과는 동맹국이자 지중해 국가인 이탈리아가 2차 대전 끝나기 2년 전인 1943년 연합국에 조기 항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당시 영국 수상인 처칠은 회고록에서 1942년 몽고메리가 롬멜에 이긴 아프리카 알라메인 전투를 빗대 '알라메인 이전에는 승리가 없었고 알라메인 이후에는 패배가 없었다'고 자랑스럽게 적고 있지만 알라메인의 승리는 바로 지중해와 지브랄타르를 영국이 장악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병목에 자리잡고 있는, '독수리의 눈' 지브랄타르, 북아프리카의 모로코 땅이 불과 15km 앞에 있는 지브랄타르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등장한다. 서양의 항우장사 헤라클레스가 세상 끝에서 두 기둥을 힘써 지탱함으로서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묘사하고 있다. 신화 속의 두 기둥을, 역사가들은 지브랄타르와 맞은편 북아프리카의 하초 산, 두 곳으로 짐작한다.

그리스 로마인들의 지리적 인식은 에게해, 이오니아해 같은 지중해의 작은 바다에서 시작해 지중해가 끝나는 지브랄타르에서 함께 끝난다. 지중해는 그들에게 바다 그 자체였고 그리스, 로마와 세상의 각지를 잇는 內海(내해)였다. 그 세상 끝의 산봉우리 두 개를 세상을 떠받치는 기둥으로 그려낸 신화는 그들의 세계관의 끝에 해당한다.

유럽을 찢는 게 목적인 영국의 대외정책

오늘날 영국은 이 곳에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어 놓았다. 공군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지브랄타르의 군사 비행장이 더 큰 몫을 한다고 한다. 리비아의 가다피 국가 원수가 만약 미국이나 영국의 콧털을 뽑으면 전폭기는 미 6함대 항공모함이나 지브랄타르 비행장에서 출격할 가능성이 크다. 나토의 주력 기지 중 하나로서도 효용이 커 보인다.

(스페인을 여행하는 과정에서 섬나라 영국의 대외 정책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반도 만한 크기의 조그만 섬나라가 어떻게 근 2백여년간 세계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가. 그 이전 별 볼 일 없던 시절에도 1066년 프랑스 귀족에게 점령당한 것 말고는 어떻게 장구한 세월 동안 타국 군대의 상륙이 한번도 없었던가.

나는 영국의 근현대 대외 정책 핵심이 바로 유럽대륙에 대한 분리정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영국의 대 유럽 정책은 간단하다. 대륙에서 '센 놈'이 나오지 못하도록 분리, 이간하는 것이다. 그리고도 잠재적 강국이 등장하면 그에 대항하는 동맹을 만든다. 왜냐하면 영국에게 있어 최악의 시나리오는 유럽대륙의 패자가 자신의 패권을 확인할 마지막 절차로 영국 본토로 쳐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이 나폴레옹과 사사건건 대립한 이유, 영국이 프러시아 황제와의 1차 세계 대전, 히틀러와의 2차 세계 대전에서 주역을 맡아야 했던 이유가, 다른 여러 이유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바로 이 이유 때문 같다. 이런 영국은 나폴레옹이 패망한 이후 유럽 정세가 소망대로 도토리 키재기로 바뀌자 그 사이 신대륙과 인도, 대양주에서 자신들의 땅과 臣民(신민)을 늘려 어느새 세계 제1의 강국으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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