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1755년 목판에 세긴 소쇄원도를 1990년대 중반에 아마추어 화가인 박민숙씨가 상상을 가미하여 그렸다. 제 2회 광주비엔날레의 속도전에 커미셔너인 하랄드 제먼이 다빈치의 그림과 함께 첫 머리에 걸고자 했지만 검증안된 화가에 그림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화단의 반대로 걸리지 못하고 목판도가 대신 걸렸었다. ⓒ 전고필

형에게

연락이 없어서 궁금하셨지요. 이제야 형에게 펜을 들 이유가 생겼습니다. 어렵게 여행지를 소개하는 것보다는 내가 그 속에 함께 하듯이 느낌을 전달하라는 그 곡진한 부탁과 어울리는 것이 바로 편지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형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맑고 깨끗이 살다간 조선의 선비 양산보의 소쇄원을 갔습니다.

요즘 제가 하는 작업은 저희 지역의 관광지를 정리하여 인터넷에 올리고자 인터넷 컨텐츠를 정리하는 일입니다. 벌써 한 달이 넘게 연구실에서 버둥거리고 있답니다.

한데 며칠 전 저의 작업을 도와주는 학생이 이번 21일 "내 고장 문화유산 홍보대회"라는 일종의 관광안내 경진대회에 참가를 신청했답니다. 관광을 배우는 입장에서 한번 해 볼 일이라고 독려를 했지만 마땅히 함께 연구하고 준비를 해 자신뿐만 아니라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도 제 책임 중의 하나라 시나리오와 발표문을 작성하고 그 문화재 자체의 느낌을 최대한 수용하여 알리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바로 담양 소쇄원이 그 친구가 발표할 주제랍니다.

발표를 위해 보름달이 뜨는 밤 우리는 보온물통에 커피를 담고 추위에 대비하여 두터운 옷을 입고 연구실을 나왔습니다.

대부분의 광주사람이 첫사랑의 연인과 한번쯤은 걸었을 사랑과 추억의 향수를 간직한 산장길을 따라 도착한 담양 소쇄원은 광주에서 20분도 걸리지 않는 광주댐의 상류에 있습니다.

저희의 오늘 행동은 사실 군대에 있을 때 배웠던 야간 정숙 보행을 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소쇄원은 그것을 지은 사람인 양산보라는 분의 15대손이 할아버지의 유언인 "이 땅의 곳곳에 내 손길과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니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상함이 없도록 하고 누구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는 물려주지 말라"라는 말씀을 매우 잘 지켜내고 있답니다.

그런 탓에 관리사에서 그분의 가족들이 기거를 하면서 행여 상할세라 조심스럽게 관리를 하는데 야간에 찾아 들면 된통 혼이 나기 때문에 저희는 도둑 고양이처럼 갈 수밖에 없답니다.

사실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조바심을 피면서 굳이 가려는 이유는 소쇄원의 가장 주된 건물 중의 하나인 제월당(霽月堂)이란 이름에 걸맞는 경관을 감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비가 그친 하늘에 뜬 달의 의미를 가진 집 이름은 중국의 학자인 황정견이라는 사람이 주무숙(돈이)이라는 사람의 인품을 평하면서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비 개인 하늘에 뜨는 맑은 달과 같다"라고 표현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저희는 그런 저희의 작전대로 슬그머니 관리사 곁을 지나 대봉대와 애양단을 거쳐 외나무 다리를 건너 제월당으로 갔습니다. 대부분 한번쯤을 들렸을 터이니 아시겠지만 소쇄원에 남아 있는 건물은 세 채인데 그중 첫 번째 마주치는 곳은 대봉대라고 합니다.

대봉대를 지나서

▲봉황을 기다리는 집 대봉대의 모습. 봉황이 날아드는 날은 이 땅에 백성들이 대접받고 선비들이 존중받는 날이며, 왕의 지혜스러움은 만천하를 넉넉하게 하는 날이다.ⓒ 전고필
봉황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지닌 곳인 대봉대는 손님을 기다리는 영접의 공간이지만 그 속에 담겨진 뜻을 풀어 보자면 용과 학이 연애를 해서 낳았다고 하는 봉황은 나라가 태평성대하게 다스려지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았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았으며, 대나무의 열매인 죽실을 먹었고, 단물이 나는 샘물을 먹는다고 하는 상상 속의 새입니다.

이 집을 지은 양산보라는 사람은 조선 중종 때 사람으로 개혁정치를 펼치다 끝내 반대파의 모략에 걸려 죽어간 정암 조광조의 제자였답니다. 스승의 올바른 정치가 구현되지 못하고 오히려 죽어가는 모습을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겪은 그의 입장에서는 반대파도 반대파지만 왕이 왕답지 못하고 아둔하고 간신들의 술수에 넘어가는 것을 슬퍼하면서 평생을 세상에 나가지 않고 이곳 소쇄원을 만들면서 손수 나무와 풀을 심고 가꾸고 학문에 맹진하면서 살았던 인물이랍니다.

덕택에 그 분은 처사(處士: 나라에서 벼슬을 주어도 나가지 않는 선비를 일컷는 칭호)라고 불리웠지요.
여하튼 양산보의 그런 한맺힌 아픔은 집 이름에도 정말 선비를 잘 기용하고 백성을 위할줄 아는 현명한 군주가 나오길 염원하는 그런 뜻을 담아 대봉대라고 이름하였다고 합니다.

사방이 트이고 초가지붕으로 이어서 만든 조촐한 공간이지만 바로 곁에는 오동나무와 대숲이 있고 담장 곁으로는 샘이 있답니다. 성군을 기다리는 은자의 염원이 담긴 공간으로 대봉대를 바라보게 만드는 셈이지요.

애양단

대봉대의 곁은 담장인데 이름을 가지고 있답니다. "애양단"이라는 이름이지요. 하필 담도 아니고 단이라고 했을까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애양이라는 글의 의미를 잠깐 살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옛 글에 애일(愛日)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해가 세상을 고루 비추고 포근하게 하는 것과 같이 하라는 의미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해를 뜻하는 日과 볕을 뜻하는 陽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담이 아니고 단(壇)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궁금하시겠지요.

담은 외부와의 경계의 수단이자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의 속성을 지니고 있지요. 하지만 이 소쇄원은 외부로부터 차단이 되어 있지 않은 공간이죠. 그런 곳에 왜 담을 둘렀을까는 바로 교단, 제단 등이 갖는 권위와 우러름의 대상으로서 역할입니다.

말하자면 담장이 아니라 부모에 대한 효도의 마음을 항상 염두해 두고자 올린 단이라는 뜻이지요. 바로 담장의 곁에는 효를 상징하는 동백이라는 나무가 심어져 있고 양산보가 생전에 효를 강조하는 두 편의 효부가와 애일가라는 시를 지었다는 점에서도 애양단의 의미가 효와 밀접함을 알려주는 근거지요.

소쇄원의 나무와 식물

갑작스럽게 동백이 효를 상징하는 나무라고 하면 곤혹스러우실 것 같아 더 말씀 드리자면 옛 선비들은 나무와 풀에도 그 자라는 성질이나 형태, 빛깔, 향기, 번식력 등 여러 곳에 관심을 두며 당시의 벼슬이 9품이었듯이 아홉가지 품계로 나누었답니다.

조선 세종 때의 학자이자 화가인 인재 강희안이라는 분의 "양화 소록"이라는 책의 번역본이 80년대에 나왔는데 저는 그 책을 보면서 옛 선비들의 단아한 성품과 꽃과 나무를 기르면서조차 자신의 관념을 현실화하려는 의지에 놀라움뿐이었습니다.

하여튼 동백은 여름에 번식을 하고 겨울에 꽃을 피운다는 점에서 사람이 제 몸을 간수하기 가장 힘겨운 계절로 효의 도리를 못하는 것과 비교하여 동백의 살신성인의 정신을 배우라는 의미로 효도의 나무라고 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답니다.
화엄사의 각황전 위쪽으로 있는 기존의 정형화된 탑과 다른 형태를 띤 사사자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는 곳을 기억하시겠지요.

그곳에는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와 그분의 어머니가 있지요. 즉 석탑 안에 있는 연꽃을 가진 연기조사의 어머니와 석등에 무릎을 꿇고 찻잔을 들고 공양을 하는 모습의 연기조사 두 분이 새겨져 있는데 사후의 세계에서까지 효도를 다하려는 연기조사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그곳을 효대(孝臺)라고 부르고 있답니다.

한데 그 효대의 주변에도 족히 수백년은 먹은 동백이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묘한 일치일까요.

소쇄원의 식물은 철쭉이나 살구, 산수유, 석류, 창포, 대나무, 매화, 파초, 회화나무, 소나무 등 스무 가지 정도의 식물이 있는데 이런 식물들이 모두 의도된 조경을 했다는 점과 각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 또한 우리가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되겠다 싶어 말씀 드립니다.

철쭉은 그 꽃의 크기가 여느 꽃보다 크고 화려해 모란이나 작약 등과 같이 풍요를 상징하는 꽃이랍니다.

살구나무는 예부터 의원나무라고 하였지요. 의원이 있는 곳에 마치 오늘날 신들린 사람의 집에 기다란 대나무 위에 풍선을 달아 "나는 영험한 만신이오"라고 표방하면서 그 깃을 타고 신의 계시가 내리길 바라는 상징성을 가지듯이 살구나무는 병자를 치료하는 의원에 심었으며 그 나무는 "건강하십시오"라는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답니다.

산수유의 만개한 꽃은 자손의 번성함을 상징하고 있고, 석류의 터질 듯 하면서도 야물게 물리워진 속알갱이의 조화는 집안의 결속을 상징한답니다. 앵두 나무는 형제의 우애를 상징하는 나무이고, 창포는 그 뿌리가 매듭을 지니고 있어 곧은 절개와 지조를 대나무와 함께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관념을 현실속에 포함한 조경의 예는 사실 요즘 찾아 나서기 힘든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저 막연하게 한 공간을 지으면 그 속에 자신의 눈요깃거리를 모조리 담으려고만 하는 요즘의 세태와는 전혀 다른 그 옛날 선비의 풍모를 나무와 꽃을 통해 우리는 볼수 있는 셈이지요.

외나무 다리를 지나

커다란 소나무의 푸르른 잎사귀가 달빛과 부딪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지요. 저에게는 그 날 밤, 그 모습은 냉기가 제 몸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었습니다.

얼마전 한희원이라는 화가의 "자서에 원한 서린 절강의 물결"이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김덕령이란 장군을 아실 것입니다. 광주의 심장과 같은 도로인 충장로라는 이름이 바로 그분이 받았던 시호에서 비롯된 것이니 쉽게 이해하시겠지요.

그분은 억울하게도 역적의 누명을 쓰고 29세라는 나이에 매를 맞아 죽고 말았답니다. 17살의 나이에 지은 시가 한 수 전해지고 있는데 그 시의 제목이 바로 "자서의 원한 서린 절강의 물결"이랍니다.

중국 초나라 사람으로 오자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와 형이 초왕 평의 미움을 받아 살해 당하자 그는 오나라로 망명하여 왕인 합려를 도와 초나라를 치고 자신의 아버지와 형을 죽인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시체를 삼백 번 두들김으로써 원수를 갚았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이 오자서 역시 오나라 왕 합려가 죽고 뒤를 이은 부차가 왕이 되었을 때 합당하지 못한 왕의 행동을 말리다가 결국 미움을 받고 합려가 내려준 칼로 자결을 했다는 얘기입니다.

그의 시체가 말가죽에 담겨 강을 흘러 가는데 오나라 사람들이 그를 가엽게 여겨 강가에 사당을 세우고 그곳을 서산이라고 하였다는 얘기입니다.

그 자서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김덕령의 시를 다시 그림으로 옮긴 것이 바로 한희원 화가의 작품이었는데 왜 하필 그날 소쇄원의 소나무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날이 너무도 추웠던 탓이었는지...

소나무를 지나 계곡 사이의 다리를 지났습니다. 외나무 다리입니다.
1755년 새겨진 목판도에는 이곳이 독목교라고 쓰여져 있는 것을 볼 때 그때나 지금이 외나무 다리는 똑같은 것입니다. 왜 하필 주인의 집으로 가는 길에 외나무 다리를 걸쳤을까? 의문이 들지 않으시나요.

또 한번 공간을 살펴 봅니다. 소쇄원의 진입로는 길이 반듯한 편에 속합니다. 주차장에서 내리자 마자 이곳이 소쇄원이라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먼저 대숲이 나오고 그 대숲은 언덕과 계류 사이에 조성되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빼꼼하게 자리잡은 대밭은 어두운 경관을 연출하며 다음 경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혹은 기대감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더구나 그곳은 약간의 언덕이 있어 소쇄원의 진정한 내부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드디어 언덕을 차고 올랐을 때 그 내부의 모습이 한순간에 들어옵니다.

시원하게 흐르는 물줄기, 연못, 그 사이에 알맞게 자리잡은 나무와 집들, 나도 모르게 탄성을 올립니다. 마음은 바빠집니다. 저곳에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다소 성급하게 쭉 뻗은 길을 따라갑니다. 언뜻 언뜻 들리는 대바람 소리도 이 공간의 신비한 분위기를 북돋웁니다.

드디어 계곡만 넘으면 사람이 있는 그곳에 갈 수 있습니다. 한데 난데없이 외나무 다리가 나타납니다. 웬일일까 주춤거리며 멈추게 됩니다. 자칫하다가 주인 얼굴 보기도 전에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을까.

다소 염려스럽기도 하고 낭패를 당해서는 안 되지 하며 스스로 단도리를 해 봅니다. 옷 매무새도 다시 보고 갓도 다시 살펴 보고 그리고 조심스런 걸음으로 그 다리를 건넙니다. 한 발 한 발. 드디어 건넜습니다. 그는 이제 안도감에 조용히 숨을 들이쉽니다. 그리고 그 열띤 분위기를 거둬 버린 외나무 다리의 역할을 조용히 마음 속에 담아가지고 주인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제월당

▲제월당을 파고드는 달빛. 맑고 투명한 달이 제월당의 방안으로 한 발 한 발 다가서고 있다.ⓒ 전고필


저는 몇 해 전에 소쇄원에서 몇 개월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내 고향의 문화유산으로서 소쇄원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찾은 길이었습니다. 많아진 답사객들 덕분에 소쇄원의 분위기는 여느 관광지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날카로워진 주인장은 소쇄원을 보호하기 위해 이리 저리 몸부림을 쳤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의 입장에서는 1520년대 중반부터 대대로 후손들이 보수하고 관리해 온 귀중한 재산이었지만 관람객들은 단순한 겉치레와 소문만에 의탁한 분이 많아서 심지어 물놀이 장비를 비롯해서 가스렌지와 수박, 삼겹살 등을 들고 호젓한 계곡에 불판을 올리기도 했지요. 결국 관람객과의 마찰이 일어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그 보이는 만큼 사랑한다는 뜻을 알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장황한 글을 쓰는 것도 어찌 보면 이 나라 문화유산이 당하고 있는 수모를 괜시리 형에게 푸념조로 늘어 놓는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그런 몇 개월 동안 밟혀 죽어가고 있는 소쇄원의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아직 젊지만 책을 낸 이유이기도 합니다. 문화유산의 그 참된 의미를 알면 그 만큼 소중함을 느끼고 행동하겠지 라고.

하여튼 우리는 달빛을 받으며 제월당으로 갔습니다.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15대손의 의도라고 여겨졌습니다.

밤중에 저희처럼 슬그머니 들어온 사람들이 방이 있는 것을 보고 할수 있는 부정적인 모습들에 대한 단속의 의미였겠지요.

그 전에는 성은 나씨이고 이름은 진순이라는 진돗개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주인장이 다른 어떤 일을 하고 있을 때 야간에 방문하는 사람이 있으면 잘 짖어 주었지요. 하지만 심한 몸살을 앓더니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주인은 진돗개 순종이었던 진순이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지요.

달빛이 제월당의 방으로 슬며시 잠입하고 있었습니다. 지붕의 처마선을 타고 동에서 서로 이동하는 보름달의 모습은 조금 전 소나무의 잎에서 느껴진 서늘함이 아니라 한 조용한 선비의 눈빛을 더욱 따스하게 뎁혀주는 포근함으로 가득한 느낌이었습니다.

달빛과 함께 쓸쓸한 나뭇가지들도 출렁이며 제월당의 방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고적하여 계곡의 물소리도 커다란 울렁임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여름날 갑작스런 소나기로 불어난 계류의 쿵당거리는 물소리보다 더 크게 가슴을 후비며 들려 왔습니다.

달빛을 완상하면서 카메라의 렌즈를 5분 정도 열어 두었습니다. 제월당의 모습이 과연 내 눈에 보여주는 풍만함 만큼 다가올지는 모를 일이고 그저 내 두 눈으로 모처럼만에 이 아름다운 보름달의 풍경을 제월당에서 바라보았다는 사실과 그 느낌 자체를 하나 하나 적고 있는 함께 간 학생의 모습을 제 눈에 새기면서 추위보다는 한 은거한 선비와의 만남이 가슴훈훈하게 느껴지는 밤이었습니다.

벌써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는데 인제야 소식 올리느냐는 얘기는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제 이틀 남은 그 경진대회로 잠 안자고 혹독한 자기와의 싸움을 하는 그 친구가 보기에는 이 글 또한 사치스러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데 사실 이 글은 또 그 친구가 제일 먼저 읽을지도 모르겠군요.

항상 건강하시고 남은 소쇄원의 공간과 주인의 얘기는 운이 닿은 순간을 만나면 이어서 해 드리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