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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살면서 감탄하는 점 중 하나가 값싼 항공요금이다. 서울- 런던간 왕복 비행기 값으로 1백40만원(8백50파운드)을 치른 입장에서는 영국의 비행기삯이 경이롭기만 하다. 예를 들자면 런던-뉴욕은 1백92파운드(1파운드는 1천6백원). 대서양을 횡단하는 데 불과 32만원 안팎이다. 런던-호주는 398파운드(64만원), 런던-홍콩은 4백50파운드 수준이다. 런던-파리는 70파운드(11만원) 남짓 한다. 모두 왕복요금이다.

런던-뉴욕 왕복 32만원 요금의 주인공

물론 이 요금은 일종의 최저 입찰가 같은 요금이다. 탑승시간, 장소에 약간 제약이 있다. 앞서의 구간을 꼭 자신이 희망하는 시간에 가고 싶으면 20%-30%쯤 더 주어야 한다. 그래도 한국보다는 엄청 싸다.

경쟁은 확실히 좋다. 영국의 항공요금은 철저한 경쟁체제에 의해 결정된다. 세계 각국의 비행기들을 놓고 여행사, 고객이 흥정을 한다. 항공사끼리의 담합을 막는 장치가 또 있다. 전세기 사업이다. 정기선 항공사들이 휴가철, 인기 노선 등에서 재미를 볼라치면 전세기 업자가 신문광고를 통해 등장한다. 거의 매일 전세기가 뜨다 보니 준 정기노선처럼 운영되는 곳도 상당하다.

소비자에게 유리한 여행풍토에 한몫 한 사람이 리처드 브랜슨 버진그룹 회장(48)이다. 국내 언론에도 수십 차례 소개됐고 자서전도 번역 출판됐다. 노랑머리에 텁석부리 큰 머리의 영국사람, 재벌 회장이 열기구 타고 비행한다고 해서 화제가 된 사람, 코카콜라에 맞서 버진 콜라를 만들었다는 그 사람이다.

신분사회가 엄격하고 일확천금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영국에서 - 미국과 달리 정말 불가능하다 - 고등학교 학력으로 당대에 6조원 매출의 그룹을 일군 사람이다.
그의 첫 사업이 바로 런던-뉴욕간 전세기였다. 파격적 가격이었다. 지금도 이지제트(EASY JET)와 고우(GO)의 두 개 전세 항공사를 운영하고 있다.

영국 사람 3천만 명이 매주 사는 로터리 복권도 그의 사업이었다. 그는 복권 환급율을 84%로 책정해 국민적 인기를 모았다. 예컨대 국민들이 복권 1억원 어치를 사면 그중 8천4백만원이 상금으로 지급되도록 한 것이다. 참고로 한국의 주택복권은 환급율 48%, 경마장의 마권은 환급율 70%이다. 복권 사업에서는 돈을 남기지 않겠다고 공약해 사업권을 따냈고 그 약속을 지켜왔다.

그밖에 버진 콜라, 버진 열차 등 수많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에 대한 영국민의 인기는 상당하다. 일단 수수하다. 사는 곳도 옥스퍼드 근교의 전원주택이다. 필자의 학교 기숙사가 한 때 브랜슨 옆집이었는데 한국으로 치면 조그만 기업체 사장이 사는 집 정도다.

영국판 '부적절한 관계'

이런 브랜슨이 최근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있어 화제다. 그를 담당하던 ITV의 경제부 여기자는 그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특종기자로 유명했는데 사실은 그와 내연의 관계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당사자인 조안 터크틀 기자는 "그의 침대에서 함께 누워 있었으며 침대를 더럽히기까지 했다"는 지적에 대해 "나는 단지 (그의 방에서) 사우나를 했을 뿐"이라고 답변했다. 특종을 침대에서 했다는 주장에 당사자는 물론 해당 방송사도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취재원과 기자와의 '부적절한 관계'에 이어 브랜슨과 정치인들과의 지나친 친교에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토니 블레어 총리의 부인인 슈리 블레어가 남편에게 "브랜슨에게 뭘 좀 해줘야 해요"라고 말한 걸 들은 사람도 있다. 총리 부인이 "뭘 좀 해주자"고 했다니 그게 뭔지 일반의 궁금증은 증폭되고 있기만 하다.

이밖에 수억원대의 탈세 혐의, 종업원을 가차없이 자른 행위 등도 속속 불리한 증언자가 나타나고 있다. 최근 이런 모든 사실 관계를 담은 책이 출판돼 영국 호사가들의 필독서로 등장했다. 저자는 추적 보도 전문가인 톰 바우어. 2백여명의 사람을, 수년간에 걸쳐 쫓아다니며 만나 출간했다. 그래서 브랜슨과 바우어는 상호 맞고소형 명예훼손으로 법정 소송에 들어갔다. 호사가들은 내년 5월 재판이 본격화되면 흥미진진한 얘기들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기대에 부풀어 있다.

두 사람 싸움에 최근 공개적으로 불을 당기는 사람이 나타났다. 역시 같은 추적보도 전문가인 마이클 크릭. 바우어의 책이 재미있다고 추천하며 "그런데 브랜슨의 가족 생활은 왜 안 썼는지 모르겠다"고 거들고 있다. 여차하면 응원군으로 법정에 달려갈 태세다.

바우어와 크릭, 두 사람이 보는 브랜슨은 준 사기꾼이다. 사업적 타당성으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언론을 교묘히 이용해 홍보 효과를 올린 다음 이를 사업과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돈 내고 광고를 하는 게 아니라 돈 받고 인터뷰를 해주고 사업상 이익을 챙긴다는 것이다.

그것까지는 봐줄 만한데 그러면서 경영은 엉터리여서 사업체는 재정적으로 부실한 상태라는 주장이다. 두 사람의 결론은 브랜슨이 진정한 기업가라기보다는 대중오락의 흥행가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대부분의 버진 그룹 계열사가 최근 적자를 내고 있어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는 의견도 상당하다.

퍼포먼스에 능한 신종 기업인인가, 밀레니엄 경영의 선두주자인가

그러나 두 사람의 공격에도 한계는 있다. 실정법 위반의 비리를 공개한 게 아니고 "브랜슨의 성공담은 과장된 것"이라며 사생활 측면에서 공격하는 것이다. 즉 형사상 유죄로 이끌 자료보다는 이미 예정된 명예훼손 등의 민사재판에서 이길 정도다.

브랜슨 파문은 이처럼 불법 정치자금 헌납, 부당한 사업권 인가 등 한국형 경제 범죄와는 사뭇 다르다. 아직까지는 서민 출신 억만장자의 성공 뒷얘기가 주제여서 최악의 경우에도 주인공은 죽지 않고 다만 창피 당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앞서의 사실들이 사실로 입증되면 국민적 이미지 실추, 당연한 민사소송 패소 및 배상금 납부, 사업상의 어려움으로 이어질 것은 뻔하다.

브랜슨 파문을 보면서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다. 한국에서도 추적보도 전문의 단행본 저술가와 그 책이 보고 싶다. 공인에 대한 철저하고도 끈질긴 추적. 그리고 단행본을 통한 객관적 문제제기. 뉴스 게릴라들의 다음 타깃으로 적합하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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