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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의 성과는 실로 막대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과 통일을 향한 공동의 노력을 세계에 천명한 이상 이 방향은 앞으로 혹 우여곡절이 있을지라도 변경할 수 없는 원칙적 근본을 마련했다고 하겠다.

그런데 감동의 물결이 가라앉고 시간이 지날 수록 이 귀중한 정상회담의 성과가 이상한 방향으로 왜곡되고 기존의 냉전논리가 다시 주도권을 잡는 듯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우선 미국은 아니나 다를까 통일이후에도 주한미군주둔의 중요성을 또다시 강조하고 나와, 이번 공동선언의 핵심인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에 중대한 장애를 조성하고 있다.

남북협력시대의 개막은 우리에게 있어서 북한을 주적(主敵)으로 하는 상황은 이제 종지부를 찍겠다는 역사적 의지의 표명이며, 이에 기초한 새로운 민족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탈냉전적 결단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미국은 아직 그렇게 사고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며 부적절하다"고 간섭하고 북에 대한 주적인식을 지속시킬 것을 종용하고 있다. 올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의 방한과정에서 행한 그같은 발언은 미국이 내리는 한반도 정세판단에 우리가 그대로 따르라는 것이다.

우리의 민족적 열망은 안중에도 없는 실로 오만하기 짝이 없는 패권주의이며, 정상회담의 근본정신을 부인하는 논리이자, 명백한 민족분열적 개입정책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국방부의 주적개념 유지 선언도 역사적인 6.15 민족적 합의를 위협하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김대중 정부가 미국이 요구하는 이러한 인식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고 현실론을 내세워 동조하는 한, 그것은 어렵게 일구어낸 정상회담의 성과를 스스로 훼손하는 자해행위가 될 뿐이다.

남북간 주적관계의 소멸은 한반도의 대결적 상황을 끝내고 통일을 향하는 길을 만들기 위한 가장 중대한 기초이다. 주적관계를 유지한 채 이루어지는 민족내부의 협력과 교류라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며,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결국 주적관계의 해체야말로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과, 남북 양체제간의 평화적 공존에 반드시 요구되는 바이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형성을 가로막는 것은 모두 정상회담의 성과를 왜곡하고 그 민족사적 의미를 소멸시키려는 음모이다.

주한미군철수는 미국과 대립하자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자는 매우 의미있고 중요한 출발이다. 미국의 군대를 주둔하지 않도록 한다고 해서 미국과의 관계가 깨어진다면 이는 미국의 요구를 언제나 일방적으로 받아주어야만 유지되는 주종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주한미군은 한미관계의 주권 침해적이고 굴종적인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미국은 주한미군은 동북아시아 평화유지를 위해 필요한 균형자적 존재라고 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주한미군과 함께 중국, 러시아, 일본의 군사력이 한반도에 공평하게 주둔해야 옳다. 이게 말이 안되듯이 통일이후에도 주한미군이 주둔해야 한다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는 강대국의 윽박지름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에 도착하여 인민군의 사열을 받았다. 이것은 북의 군대가 남쪽 군대 최고 통수권자에게 공식적인 경의를 표했다는 의미를 가지며, 향후 장기적으로는 남과 북의 군사적 연대를 기초로 한 전방위적인 <민족연합군> 창설의 기초를 마련하는 아주 작은 실마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은 주한미군의 존재가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 시대적 조건을 의미있게 보여준다. 흔히들 미군철수이후의 아시아 상황을 염려하지만, 그것 또한 아시아 자체의 노력에 의해 해결되도록 할 문제이지 미국이 마치 심판자나 공권력처럼 개입해서 아시아의 현실을 해결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논의의 방향은 그렇게 정해져야지 미군의 한반도 주둔이 곧 아시아 전체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라는 논리는 미국위주의 주장일 수밖에 없다. 정상회담이 끝나자 주한미군은 그간 잠시 중단했던 매향리 폭격훈련도 재개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패권전략이 얼마나 집요하게 우리민족의 현실을 괴롭히고 있는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실례이다.

김대중 정부는 실로 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와 지려는 노력과 의지를 좀더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보일 필요가 있다. 그런 노력과 의지를 반기지 않는 강대국과의 협력이란 언제나 우리자신의 굴복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면 민족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김대중 정부가 얼마나 자주적일 수 있는가와 관련하여 의문이 일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남북 공동 선언의 제1항 자주의 문제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자주는 외세를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논리를 펴고 있으나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견강부회일 수밖에 없다.

자주는 우리와 같은 약소국가에게는 어디까지나 일차적으로 외세, 즉 강대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우리민족의 독자적인 입지를 세우는 작업이다. 당연하게도, 외세를 배격한다고 해서 우리민족의 자주적 입지에 대한 국제적인 지지와 협력까지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바보같은 나라는 지상에 없다.

우리가 바라는 지지와 협력이 있다면 마땅히 환영할 일이고, 우리민족의 자주를 강화하기 위해 더더욱 적극적으로 그같은 국제적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들 열강들이 남북간의 협력체제와 통일을 지지할 의사가 없다는 것에 있다.

이들 열강이 우리민족의 통일에 지지를 표하고 협력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민족내부의 단결과 자주는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야 이들 열강이,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통일로 가는 한반도의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편에 끌어들이고 싶어서라도 지지하고 협력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특정 강대국이 주도하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라 이 강대국의 지배체제일 뿐이다. 김대중 정부를 비롯하여 여야를 망라한 정치권, 언론 등에서 더 이상 정상회담의 역사적 성과와 그 가치를 모순에 찬 논리로 왜곡하는 사태는 저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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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기자는 경희대 교수를 역임, 현재 조선학, 생태문명, 정치윤리, 세계문명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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