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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우리의 이야기는 1884년 8월 23일 저녁의 개성으로 이어집니다.

비장과 중군(中軍 Chung-kun)은 옷차림이 거의 같았습니다. 훌렁한 바지를 입었는데 면으로 된 레깅스(cotton leggings)가 발목을 동여 맸고 그 속에 다시 헐렁한 면의를 입었더군요. 겉에는 흰색의 얇은 천을 걸쳤는데 네 갈래로 갈라진 옷 자락이 거의 발목까지 닿아 있더군요.

그 위로 다시 네 줄기의 꼬리가 달린 얇고 긴 녹색 도포를 걸쳤더군요. 옷 소매는 진홍색 비단으로 매우 넓었고 수가 놓여 있었답니다. 중군의 모자는 챙이 넓었고 둥그런 윗 부분에 엄청 큰 꿩 깃털의 다발이 매달려 있더군요. 모자 맨 꼭대기에는 첨탑 모양의 작은 흰색 단추가 달려 있었구요.

고령의 남성 고관이 이렇게 여성 옷차림으로 치장하고 있는 모습이 내게는 기이하게만 보였습니다. 그들은 바깥세상의 물정에 대해서는 어린아이처럼 깜깜했습니다.

내가 송도(개성)에 머무는 동안 언제나 집과 뜰에는 병사와 아전들, 대 여섯 계급의 하인들이 바글거렸고 소란이 그칠 새가 없었습니다. '대인'(나)을 엿보려고 몰려든 딱한 사람들과 아이들이 서로 밀치고 때리고 난리법석을 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문을 열고 밖에 나타나면 한 무리가 우르르 달아납니다.  

마당을 가로 질러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변소가 있었답니다. 헛간 안에 구멍이 나 있고 구멍 주위로는 몸을 웅크리고 앉는 판석이 둘러져 있었습니다. 변소를 가려고 하면 군졸 한 두 명이 꼭 따라 나섰고  몇몇 사람들이 "대인이 나가신다"라고 음울한 어조로 외칩니다. 내가 그곳에 갈 때에는 늘상 누군가가 발로 채였습니다. 나는 그런 모습이 싫어서 밖에 나가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나버리고 말았지요.

한숨 자려고 하면 외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대인이 주무신다. 조용히 하라." 그러면 사람들속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그 소리는 이내 고함과 싸우는 소리로 변하고 맙니다. 말 소리가 한 번 나왔다 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네가 소리냈지?" 하면서 싸우는 것입니다. 나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지요.

밥(Pap)이 약 한 시간 간격으로 끊임없이 들어옵니다. 물릴 수도 없기 때문에 거의 질식할 때까지 먹었답니다. 그러한 극진하고 성가신 보살핌으로 나는 정말로 병이 날 지경이었지요. 비장과 중군은 자주 내게 들러 피곤하지는 않으시냐, 식사는 잘 하셨냐 어쩌고 저쩌고 묻곤 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마를 탄 채 많은 시종을 거느리고 거창하게 행차를 합니다. 그때마다 선발대들이 길게 외치기 때문에 행차가 있는지를 알게 되지요. 관아의 출입문에서는 당직이 매 20분마다 길고 처량한 목소리로 시간을 알립니다.

다음날 우리는 옛 궁궐터를 살펴보았습니다. 돌과 담벽만이 남아 있더군요. 고려시대에 수도였을 때엔 30만이 살았다는데 이제는 3만이 넘지 않습니다.  

도성 안에는 경작지가 많더군요. 인삼 밭도 시찰하였답니다. 인삼은 조선과 중국에서 신통한 약재로 여겨졌고 가격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산삼의 경우엔 상품은 1파운드에 무려 250불이 나갔고 재배 인삼은 값이 비교적 낮습니다.

넓은 인삼 밭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는데 물을 잘 주고 보살펴야 하며, 씨를 파종한 후 뿌리를 캐기까지는 6년이나 걸린다고 하더군요. 인삼 밭은 매우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습니다. 인삼 밭 인근에는 찜통과 건조실을 갖춘 집들이 있는데 거기에서 삼을 건조시킵니다. 초기집들인데 비록 도색은 되어 있지 않지만 깔끔하고 튼실해 보였습니다.

인삼밭을 둘러 본 뒤 우리는 언덕으로 올라가 아담한 정자에서 휴식을 취하였지요. 휴식을 취할 때 마다 밥(pap)이 나왔구요. 정자는 계곡을 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정자 근처의 큰 화강암 바위에는 수많은 이름이 깊고 아름답게 새겨져 있더군요.

도성의 동쪽 성벽을 한 바퀴 빙 돌아 숙소를 향했을 때에는 이미 어둠이 내렸습니다. 우리의 행차는 청홍색의 등롱을 나르는 등꾼들로 더욱 길어졌지요. 아울러 "물렀거라. 물렀거라"라고 고함치는 사람들이 합류했습니다. 밤인지라 무인지경이었습니다. 아무도 얼씬거리는 사람이 없었고 허둥지둥 길을 비키는 사람도 없었지요. 숙소에 도착하니 또 밥(pap)이 들어 왔는데 벌써 다섯 번째였답니다. 억지로 조금 먹었지요.

그러자 대청 마루에 희미한 등불이 켜지고 네 명의 무희가 나타나더군요. 자그마한 초록 비단 저고리를 입었는데 저고리는 가슴께까지를 덮고 있더군요. 그 위에 동여맨 치마는 청백색의 얇은 비단 옷이었습니다. 무희는 머리칼을 이마와 관자놀이위로 가파르게 밀어 올리고 가운데로 가르마를 탔더군요. 머리 뒤로는 쪽을 지어 은 비녀를 질렀고 희끄무레한 얼굴엔 분을 발랐더군요.

그녀들은 구슬픈 가락을 뽑아냈습니다. 반주는 여섯 명의 악사가 맡아 북을 치거나 퉁소와 가야금을 연주하였습니다. 선율은 마치 새소리 들리는 갈대 숲에서 울려 나오는 바람 소리 같았습니다.

그 여인들은 예전에 외국인을 볼 기회가 결코 없었겠지요. 처음 날 보더니 화들짝 놀라더군요. 그러나 내가 사진 몇 장과 물품들을 보여 주자 종내는 친근감을 느끼는 듯하였답니다. 내가 큰 시가(cigar)를 건네 주자 그들은 격렬하게 그걸 밀쳐내면서 서로 뭐라고 말을 주고받더군요. 물론 시가를 처음 보았겠죠.

밤 열한 시 경에 중군과 악단과 여인들이 떠났습니다. 나는 금방 곯아 떨어졌답니다. 빈대와 소음, 너무 많이 먹어 힘들었던 '밥'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다음 날 중군은 나를 도성 밖으로 데려가 관광을 시켜주었습니다. 어떤 사당에 들어가 보니 거대한 돌 거북(長壽의 상징) 두 개가 있더군요. 그 위로는 4백년 전에 다리위에서 살해당한 정몽주를 기리는 명판이 서 있었습니다. 

한편 선죽교의 돌에는 그가 살해당했을 때 남겼던 혈흔이 아직도 보이더군요. 분명 당시의 실제 모습인양 생생하였습니다. 400년 세월의 풍우가 원래의 유혈을 지웠을 텐데도 말입니다. 선죽교는 아무도 말을 탄 채 접근할 수 없도록 울타리가 쳐져 있었답니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조지 포크#개성#선죽교#개성 인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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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자의 최신기사제2의 코리아 여행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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