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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겠어, 그냥 사는 거지.'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좋아하는 가수 악뮤(ACMU)의 노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그냥 널 사랑하는 거지'가 차분하게 차 안을 꽉 채웠다.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지고 싶지는 않지만 이별까지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과 화려하고 탐스러운 꽃송이에서 분분히 흩날리는 꽃잎의 모습이 퍽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지 않은데 하고 있는 일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운전이다. 사실 내가 운전을 하고 다닌다는 사실이 매일 아침마다 새삼스럽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차 문을 열고 안전벨트를 매고, 브레이크를 밟고, 기아를 P에서 D로 바꾼 후 다시 액셀을 밟는 일련의 행동들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내가 낯설다.

친구들이 수능을 끝내고 면허를 취득할 때에도 운전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돈을 벌기 시작할 때에도, 공무원이 되고 난 이후에도 살면서 운전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지하철은 서울 어디로든 시간에 늦지 않게 약속 장소까지 데려다 주었고 기차를 타면 엄마 집까지 1시간 40분이면 도착했다.

자동차를 살 돈이 없었다는 현실은 차치하더라도 차로 이동하는 것이 아무리 편리하다고 한들, 양날의 검인 사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운전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만 잘한다고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니라 사고는 온전히 운, 운명 즉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운전을 하고 다니고 있다니 삶은 깜빡이도 없이 끼어드는 무례한 자동차처럼 예측이 불가하다.

동료와 대화를 하던 중에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녀의 둘째 아이가 "엄마, 오늘 학교 안 가면 안 돼?" 하고 묻더란다. 또 학교는 맨날 가야 하냐고, 안 가도 되냐고도 물었단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학교 가서 선생님한테 물어보라고 했어."


동료의 아이는 선생님께 답을 얻기 위해서라도 우선은 학교에 가야 했다. 아이의 솔직한 질문은 천진하면서도 철학적이었고, 동료의 대답은 현명하면서도 짠했다. 학교는 정말 매일 가야 할까? 요즘은 체험학습 신청서를 제출하면 학교에 가지 않아도 출석 처리를 해 준다고 한다. 내가 학교 다닐 때, 개근상이 학업우수상보다 받기 어렵고 가치가 있는 거라고 훈계를 하시던 선생님들 말씀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엄마는 아프다는 나를 기어코 학교로 보내곤 했다. 아파도 학교 가서 아프라며, 조퇴를 하더라도 일단 학교는 가라고 하셨다. 학교는 무조건 가야 했다. 아마도 성실감과 책임감을 배우게 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다정하게 머리를 짚으며 '그래, 많이 아프구나. 하루 쉬렴' 하고 내 편에서 이해해 주셨다면, 나는 하루 푹 쉬고 다음 날이면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학교로 향했을 텐데...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중 한 장면.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중 한 장면.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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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종영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전교 1등 승완이가 폭력을 일삼는 교사를 비판한 일을 두고, 교사가 반성문을 쓰고 사과할 것을 요구하자 승완이는 자퇴를 하겠다고 한다. 승완의 엄마는 그런 아이의 의견을 존중해주고 학교로 찾아가 폭력교사 앞에서 당당히 말한다.

"우리 승완이야 이딴 학교 자퇴한다고 흠집이나 나겠어? 자퇴 서류 갖고 와요! 당장 사인하게."

명징하고 통쾌한 승완 어머니의 활약은 분명 멋있었지만 어쩐지 나는 이 두 모녀가 자퇴를 결정하며 나눈 대화가 더욱 마음에 담겼다.

승완 : "나는 반성문도 못쓰겠고, 사과도 못하겠어.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어."
승완엄마 : "자퇴밖에 방법이 없니? 전학 가는 방법은?"

승완 : "그건 내 잘못을 인정하는 거라서 안돼."
승완엄마 : "수능은?"

승완 : "못 봐. 검정고시 쳐야 돼서..."
승완엄마: "그럼 지금까지 달려온 1년을 버리겠다는 거네."

승완 : (말없이 고개를 끄덕끄덕)
승완엄마 : "니 인생에서 1년을 버릴 만큼 이 문제가 너한테는 중요한 문제니?"

승완 : "응. 엄마, 미안해."
승완엄마 : "휘어지는 법도 알아야 돼, 승완아. 부러지는 법 만으로는 세상 못 살아."

승완 : "알아, 근데 아직 그게 잘 안돼... 미안해... 미안해 엄마."
승완엄마 : "아니야. 승완아, 엄마가 미안해."


승완은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해주는 엄마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하기 싫은 일, 반성문을 쓰고 사과를 하는 대신 자퇴를 하며 소신을 지킬 수 있었다. 휘어지지 않고 부러지기를 택한 것이다. 

이제 다 자라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는 나지만 비슷한 질문을 하곤 한다. 다만 물어볼 선생님이 없으니 나 자신에게 반문한다. 회사는 매일 가야 할까? 보고서는 꼭 써야 할까?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상사의 지시를 반드시 따라야 할까?

최근 회사의 장이 바뀌면서 업무 파악 겸 직원 상견례를 위한 업무 보고 일정이 예정되어 있다. 연간 업무 흐름도(계획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하는 공문이 시행되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촉박한 기한을 명시하여 월별, 주차별, 날짜별 흐름도를 추가로 요청하는 공문이 왔다.

기관장에게 하는 보고는 연간 일정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 외 구체적인 세부 일정들은 부서의 상황에 맞게 부서장의 지휘 아래에서 각 업무 담당자들이 시행하면 될 일이며 그때마다 필요한 사항들은 당연히 기관장에게 보고를 하기 마련이다.

서식에 맞게 칸을 채우면서도 불필요하게 직원들의 업무 부담만 가중시킨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달된 공문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일도 불가능하다. 업무를 하다 보면 이보다 더 가슴 답답한 일들이 많은 데다 나 혼자만 안 할 수도 없고 팀, 과장님과 이 문서를 시행한 부서의 상황도 있으니 말이다.

사소한 일마다 부러지기를 택했다면 몸뚱이가 남아나질 못했을 거다. 이번에도 휘어지기를 택했다. 무엇보다 나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토끼 같은 자식과 여우같은 남편이 있지 않은가. 시일보다 일찍 팀장님께 제출했고 팀장님의 보완을 거쳐 문서는 늦지 않고 제때 제출이 되었다.

사는 일은 그런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으며 살면 좋겠지만 대부분은 하기 싫은 일까지도 하면서 산다. 그러나 정말 휘어질 수 없다는 판단이 서는 그런 날에는 부러지기도 할 것이다. 흠집이 나기는커녕, 아니 흠집이 조금 난다 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는 걸 안다.

나이는 아무 노력없이 얻어지는 공짜가 아니다. 나이테가 늘어날수록 둘레도 커지고, 뿌리도 깊어지는 나무처럼 마흔 하나를 사는 오늘도 내일도, 매일 마음이 자란다.

덧붙이는 글 | - 브런치에도 발행된 글입니다. by달콤달달


태그:#스물다섯스물하나, #직장인이야기, #그냥사는거지, #어떻게이별까지사랑하겠어너를사랑하는거지, #마음이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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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처음에는 우연히 보았다가도 또 생각나서 찾아 읽게 되는, 일상의 소중함이 느껴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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