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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5.18광주민중항쟁을 기록한 <광주백서>의 집필자 소준섭 국회도서관 조사관(국제관계학 박사)이 보내온 글이다. 소준섭 조사관은 "<광주백서>를 보충해 집필된 책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였다"라고 주장했다. [편집자말]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진상을 처음으로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기록한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증보판이 내년 5월 간행된다. 지난 1985년 5월 초판 간행 당시 책의 표지와 수첩의 모습 (팜플릿 캡쳐 사진)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진상을 처음으로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기록한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증보판이 내년 5월 간행된다. 지난 1985년 5월 초판 간행 당시 책의 표지와 수첩의 모습 (팜플릿 캡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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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7월 12일 자 "5·18 폄하 예상은 했지만 박근혜 정부 들어 극심" 인터뷰기사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넘어넘어>는 여러 사람이 비밀리에 확보하고 있던 자료와 기록을 모아 만든 책이다. (80년 5월 항쟁으로) 구속됐다가 석방된 정용화(61·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상임대표)씨, 조봉훈(62·전 광주시의원)씨 등이 자료를 모아 몰래 소장하고 있었고, 자료 정리는 소준섭(55·국회도서관 조사관) 박사가 맡았다. 80년 11월부터 81년 7월 초까지 5·18 관련자들과 가족 등의 목격담·일기·성명서·병원 진료기록·판결문·공소장·사진 등을 모은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 내용은 사실관계에서 애매하고 정확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 이를 약간 보충하고자 한다. 특히 최근 지만원을 비롯하여 '일베' 등에서 "22살밖에 되지 않았던 '풋내기' 소준섭이 북한의 사주를 받아 광주백서를 작성했다"거나 심지어 필자를 '대남간첩'이라는 용어까지 써서 모함하고 있는데, 차제에 이 부분을 정확하게 진술하려 한다.

위의 기사만 보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아래 <넘어넘어>)가 갑자기 출현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사실 <넘어넘어>는 1985년에야 출판되었다. 그 전에 <광주백서>라는 지하 팸플릿이 이미 널리 유포되어 있었고, <넘어넘어>는 그 <광주백서>를 이어받아 보충하여 출판된 것이다.

<광주백서> 초고는 200자 원고지 500매 분량

필자는 서울 학원사태 배후조종자로 전국에 지명수배되어 1980년 겨울 광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이전 구치소에서 알고 지냈던 조봉훈 선배를 만나 같이 살게 되었는데, 당시 선배는 광주항쟁 기록을 추진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필자가 집필을 담당하게 되어 선배가 수집한 관련 자료들을 정독하고 또 많은 증언을 들었다.

고 신영일, 고 노준현, 김상집, 박몽구, 이현철, 전용호 등 10여 명은 자신이 목격하거나 경험한 사실을 필자에게 증언하였다. 특히 항쟁의 발단이 된 전남대 정문 앞 계엄군과의 충돌은 당시 정문 현장에 있었던 박몽구의 자세한 증언을 청취하였다. 시민들의 무장 및 이후 중요 과정에 대한 집필에는 김상집, 이현철 등과의 증언과 토론이 큰 도움을 주었다.

필자는 수집된 자료와 증언 가운데 너무 과장됐다고 생각되거나 사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여겨지는 내용들은 최대한 배제하였다. 최대한 확인된 사실만을 기록한다는 방침이었다. 이를 위하여 당시의 상황을 취재 보도한 <동아일보> 등 각 신문 기사도 자세히 정독하여 참조하였다. 당시 필자는 복막염을 앓는 등 매우 쇠약한 상태였지만 스스로 막중한 임무를 깨닫고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만 해도 광주 시내 곳곳에서는 아직 하루에도 몇 차례씩 착검한 총을 손에 든 공수부대를 가득 태운 군 차량이 질주하고 있었다. 살벌하였다. 여러 사람의 목숨과 관계된 일이라 모든 일이 비밀스럽게 진행되어야 했다. 필자는 자다가 꿈에 그 날의 참상이 떠올라 소스라치게 자리에서 일어나곤 하였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 하루에 몇 장씩 조금씩 손으로 써나갔다.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5월에 들어 '광주백서' 집필을 완성하였다. <광주백서> 초고는 200자 원고지 약 500매 분량이었다.

주요 내용은 1. 발단(학생시위: 5월 18일), 2. 민중봉기로 발전(시민합세: 5월 19일), 3. 무장봉기로 전환(5월 21일), 4. 전남 민중봉기로(시외로 확산: 5월 21일), 5. 시내장악 및 자체 조직과정(5월 22일-26일), 6. 계엄군 무력진입(5월 27일)으로 구성되었고, 맨 마지막에 부록으로 '찢어진 깃폭'을 발췌하여 실었다. 필자는 당시 입수된 자료 가운데 '찢어진 깃폭'은 일부가 다소 과장됐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현장 분위기를 비교적 실감나게 묘사했다고 판단해 백서의 본문 내용과 구분되도록 별도의 부록형태로 발췌 처리하여 덧붙였다.

1980년대 운동을 지펴낸 <광주백서>가 나올 당시 아직 '광주'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우리의 운동은 반드시 '광주'에서 출발해야 했다. 그리고 그 출발은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일에서 시작해야 했다.

<광주백서>, 광주의 진실을 복원시켰다

<광주백서>를 몸에 지니고 서울로 온 필자는 1982년 1월 항쟁기록을 전국에 널리 알리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인천 구월동 아파트단지에서 고 김근태 선배 아파트 옆에 방 한 칸을 얻고 함께 기거하던 박우섭(인천 남구청장), 민종덕(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 고 이범영(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등 수배자들과 공동 작업을 통해 <광주백서>를 타이핑했다. 그리고 서울 중구에 있는 한 지물포에서 재단해온 종이에 등사기로 일일이 한 장씩 42쪽 팸플릿을 약 120부 인쇄했다.

이 <광주백서> 팸플릿이 완성된 뒤 필자는 광주에서 제작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일부러 광주로 내려갔다. 광주 현지 우체국에서 원주의 이창복(재야인사) 등 20여 명 앞으로 익명을 써서 등기로 발송하였다. 뒤이어 기독교인권위원회(NCC) 등 서울의 여러 민주화운동단체, 서울대 인문대 학회실 등 들키지 않으면서도 용이하게 배포될 수 있는 장소에다 한두 부씩 놓아두었다. 당시 이 <광주백서> 유인물은 배포되자마자 복사본으로 만들어져 비밀리에 널리 읽혔다.

광주의 비극과 참상을 생생히 담은 이 <광주백서>는 그간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광주의 진실을 복원시켜 1980년대 학생운동 및 민주화운동의 불길을 노도와 같이 타오르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광주백서>는 구체적인 사실 기록을 토대로 광주 당시 미국의 역할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후 '광주 학살'을 방조한 미국에 대한 반감이 확대됐다.

이 <광주백서>는 뒷날 <넘어넘어>의 집필에서도 "여러 자료 가운데서도 가장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정리된 기록으로서 큰 도움이 되었다". (<넘어넘어> 집필을 담당했던 이재의씨의 증언 중에서)


태그:#광주백서, #소준섭, #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 #5.18 광주민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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