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장 연극 <단테의 신곡>이 지난 2일 막을 올렸다. 오는 9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한다.

국립극장 연극 <단테의 신곡>이 지난 2일 막을 올렸다. 오는 9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한다. ⓒ 박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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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이 드디어 큰 일을 저질렀다. 연극 <단테의 신곡>에 한태숙 연출가와 고연옥 작가도 모자라, 연극계에서 내로라하는 박정자, 정동환이 출연진으로 가세한다는 건 연극계의 드림팀이 구성된다는 걸 의미했다. 때문에 개막 전부터 연극 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는 2001년 <햄릿> 이후 12년 만에 1천 석이 넘는 국립극장의 객석 매진으로 이어졌다.

<단테의 신곡>은 음식으로 치면 '퓨전요리'에 속한다. 연극이라는 형식 안에 성악이라는 서양의 음악과 창(唱)이라는 우리 음악을 유려하게 믹스한다. 1막 지옥 편에서 뮤지컬마냥 성악이 울려 퍼지나 싶더니, 어느새 창이 지옥 안에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단테의 신곡>을 기획한 국립극장이 국립창극단의 장기인 창을 극 안에 적극 수용한 결과다.

사람은 긍정보다는 부정에 보다 깊은 인상을 받는다. 가령 어느 작품에 대해 긍정적인 글을 작성하는 평론가보다는, 작품의 약점을 낱낱이 파헤치는 비평가가 세인들에게 호평을 받는 이유도 긍정보다는 부정에 보다 익숙한 사람의 인지 구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단테의 신곡>은 긍정적인 요소인 천국의 여정보다는 부정적인 요소인 지옥에 많은 할애를 한다.

지옥에서 비참한 인간군상 목도한 단테의 성장기

 지옥을 여정하는 단테에게 길잡이가 없었다면 아마 본래의 여정, 지옥과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르는 도정을 잊고 지옥에서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옥을 여정하는 단테에게 길잡이가 없었다면 아마 본래의 여정, 지옥과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르는 도정을 잊고 지옥에서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 박정환


지옥에 떨어진 인간 군상의 면모도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자살이 만연한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것 마냥 자살한 사람은 나무가 되어버리고, 형수와 시동생이 눈이 맞은 대가로 시뻘건 불길 속에서 영원히 통구이가 되어야만 한다. 살아 생전 교만이 하늘을 찌르던 이는 연옥에서 자신의 몸집보다 더 큰 바위덩어리를 머리에 이고 살아가야만 한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할아버지가 손자를 뜯어먹어야 하는 참상, 입양된 아들이 아버지에게 칼을 꽂아도 죽지 않고 영원히 칼부림을 감내해야 한다는 건 그만큼 이들 다양한 죄인들이 지상에서 지은 죄의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옥을 여정하는 단테에게 길잡이가 없었다면 아마 본래의 여정, 지옥과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르는 도정을 잊고 지옥에서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단테에게 시의적절하게 깨달음을 제공하고 때로는 위기에 빠진 단테를 구해주는 이는 정동환이 연기하는 베르길리우스다.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 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지옥이나 천국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베르길리우스가 아니었다면 단테가 깨달음을 얻기는커녕 지옥에서 신음하는 죄인들과 뒤엉키다가 본래의 여정을 망각하고 지옥에서 숨을 거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단테가 지옥과 연옥을 오가며 언은 건 무엇일까. <단테의 신곡>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단테의 '정신적인 성장기'다. 처음 지옥에 떨어질 때만 하더라도 단테는 지옥에 처박힐 정도로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당당하기만 하다.

 단테의 깨달음을 관객에게 적용한다면, 우리 역시 살기에 급급한 나머지 시대의 불의를 나 몰라라 하고 눈감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단테의 깨달음을 관객에게 적용한다면, 우리 역시 살기에 급급한 나머지 시대의 불의를 나 몰라라 하고 눈감고 있는 것이 아닐까. ⓒ 박정환


하지만 이런 단테도 지옥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의 비참함을 목도하고는 마침내 자기 자신 역시 죄인이었다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단테가 지은 죄가 무얼까. 자기 자신만을 위해 이기적인 삶을 영위하고, 불의에 눈을 감은 죄를 자백하기에 이른다.

단테의 깨달음을 관객에게 적용한다면, 우리 역시 살기에 급급한 나머지 시대의 불의를 나 몰라라 하고 눈감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시대의 불의에 항거할 줄 아는 저항과 정의 추구의 본질을 밥벌이에 함몰하고 만 우리들의 자화상이 단테의 참회와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이다.

오늘날의 상아탑 역시 마찬가지다. 최루탄과 진압봉을 무릅쓰고 불의와 시대적인 폭압 앞에서 항거할 줄 알았던 지난날의 상아탑은, 취업이라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 매몰되어 시대의 부정에 항거하기 보다는 기업이나 회사가 바라는 취업준비생으로서의 스펙을 차곡차곡 쌓아나가야 하는 취업 코스로 변모하는 중이다.

시대의 불의에 항거하는 저항정신이 경제 불황이나 혹은 취업 준비 앞에서 무력해진 오늘의 사회상을, 불의에 눈을 감은 죄를 고백해야 했던 무대 위 단테가 간접적으로 참회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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