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의 왕> 동식과 그의 사부인 혀고수

▲ <아부의 왕> 동식과 그의 사부인 혀고수 ⓒ 롯데엔터테인먼트


<아부의 왕>은 코미디 영화이면서도 무협 영화와 닮은 점이 있다. 우선 이 이야기가 영업사원 동식(송새벽 분)의 '성장담'이라는 점이다. 무술과는 인연이 없는 주인공이 무술의 고수를 스승으로 만나 무술의 달인이 되는 무협 영화처럼, '융통성'과는 만리장성을 쌓고 지내고 '눈치'라고는 찜 쪄 먹은 지 오래된 영업사원 동식이 '영업의 달인'이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무술만 사부가 필요한 게 아니다. 발군의 영업사원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도 '사부'가 필요하다. 아부계의 전설인 혀고수(성동일)과 동식의 관계는, 사부의 가르침을 제자가 배우는 '도제 관계'다. 동식이 제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혀고수의 밑에서 배우지 않고서는, 만리장성 뒤로 날려버린 '융통성'을 찾을 수도 없고 '눈치'를 키울 수도 없다.

먹이사슬에 따라 그 방향이 바뀌는 게 아부

영화 <아부의 왕>에서 아부가 필요한 쪽은 '갑'과 '을' 가운데 어느 쪽일까. '을'이다. '을'은 필요한 계약을 따기 위해 '갑'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거나 손바닥의 지문이 닳도록 아부해야 한다. 마이홈쇼핑의 이 회장이 실수로 방귀를 꾸자 갑자기 동식이 앞으로 튀어나와 자신이 방귀를 뀌었다고 사과하는 것도 '갑'인 이 회장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아부다.

반면 '갑'은 절대로 '을'에게 아부하지 않는다. '을'에게 아쉬운 게 없기 때문이다. 혀고수는 동식에게는 아부하지 않는다. 혀고수 자신이 동식을 가르치는 사부이기 때문이다. 반면 혀고수라 하더라도 아부를 해야 할 때가 있다. 혀고수가 로비를 따기 위한 '을'이 될 때엔 아부를 한다.

자신이 '갑'이더라도 '을'의 위치로 처지가 바뀌면 아부를 해야만 한다. 만일 자신을 마냥 '갑'으로만 착각하고 '을'의 위치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다. 그것이 혀고수와 같은 '아부의 고수'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갑'은 '을'의 아부를 마냥 즐기기만 하는가. 아니다. 갖고 놀기 위해 '을'의 아부를 즐기기도 한다. 동식이 이 회장의 집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하다가 곤란을 당할 때 이 회장이 "다 먹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거잖아"라며 동식을 하찮게 여기는 장면은, '갑'이 아부하는 상대를 갖고 놀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시니컬한 시퀀스다.

<아부의 왕> 이 회장은 '갑'이지만 혀고수와 동식은 '을'이 되는 이 사회의 먹이사슬

▲ <아부의 왕> 이 회장은 '갑'이지만 혀고수와 동식은 '을'이 되는 이 사회의 먹이사슬 ⓒ 롯데엔터테인먼트


<아부의 왕>은 지문이 닳도록 아부를 해야 하는 건 '을'이라는 사실을 코미디라는 외피를 쓰고 신랄하게 보여준다. 사회의 먹이사슬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그 먹이사슬의 관계를 아부의 세계를 통해 보여준다. 동물의 세계에서 최강의 포식자에겐 '천적'이 없는 것처럼 사회의 최강자에겐 '아부'가 필요 없다.

동시에 <아부의 왕>은 동식과 그의 사부인 혀고수 두 남자의 버디 무비다. 그런데 두 남자의 주위에 양념이 들어가면서부터 이들의 코미디는 탈색하기 시작한다. 동식을 괴롭히는 사채업자가 휘두르는 폭력은 십여년 전에나 어울릴 듯한 '조폭 영화'의 시대착오적 변주다.

이야기의 풍성함을 곁들이기 위해 삽입한 여성 캐릭터는 코미디라는 이야기의 축에 '다양함'을 제공하긴 하지만 이 다양함이 도리어 이야기의 축인 '코미디'를 흔들리게 만든다.

아부의 왕 송새벽 성동일 김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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