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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있다. 특히 동시대 혹은 해당 문화권이 아닌 사람이 번역할 때 번역이 갖는 한계는 분명하다. 그래서 번역자가 아무리 원문이 갖고 있는 뜻을 전하고자 많은 애를 썼음에도, 완전할 수 없다는 점을 쉬이 이해할 수 있다.

시대와 문화를 달리할 경우 번역자는 자신의 의도와 성향에 따라 의역을 취하기도 하고, 직역을 취하기도 하지만, 원문에 충실하면서 독자들에게 읽히기 쉬운 표현을 찾아내어 번역을 하는 것이 좋은 번역이다. 그러한 번역들은 기본적으로는 맞춤법(철자), 문법, 어법을 지키기 마련이다.

그런데 요즘 공공기관들이 내놓는 외국어 번역물들을 보면, 가장 기본적인 철자는 물론이고, 문법과 어법 등에 있어서 원어민도 이해하기 힘든, 국적 불명의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것도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작품도 아닌, 단순한 생활 안내문에 있어서까지 오역이라기보다는 창작에 가까운 내용으로 변경된 것들이 있어 그 현실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인도네시아인 따르소씨가 자신이 인도네시아인임에도, 인도네시아어로 된 <국민연금 지급 내역서>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아래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는 <국민연금 지급 내역서>를 갖고 지난 13일(일) 필자를 찾아왔다. 국민연금 지급 내역서는 국민연금 관리공단에서 연금 가입자들에게 서비스 차원에서 발송하는 문서다.

인도네시아어 국민연금 납입 내역서
Panduan rincian pembayaran pensiun nasional
Status pendaftaran saat ini 타르소
Anda yang bernama 2009/01/02 mendaftar pensiun nasional sejak 2010/11/22 dan atas dasar pendapatanan ****** anda sedang membayar 130,500 KRW.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인도네시아어를 배웠던 필자 입장에서는 따르소씨가, 왜 자국어로 된 해당 문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지, 첫 문장만 보고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굳이 설명을 하자면 아래 박스 기사와 같다.

인도네시아어 국민연금 납입 내역서 첫 문장 오류
1. Anda yang bernama--("--라 이름하는")에, 이어서 이름이 나와야 하는데, 날짜가 나오고 있어서 문장이 성립되지 않는다.

2. sejak: '--부터'라는 뜻으로, 최초 가입일이 먼저 기록되고, 이어 '언제까지'라는 뜻의 단어인 ---sampai가 나와야 하는데, '--부터'라는 뜻의 '--sejak'만 나와 있는데다가, 최초 가입일을 최종 납일일로 기록하고 있는 오류가 발생했다. 위 문장대로라면, 최초 가입일자가 2010년 11월 22일이 되기 때문에, 보험 가입자로서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다. 안내문대로라면 매달 꼬박꼬박 국민연금 공제를 당했는데, 입사 후 일년 가까이 국민연금 납입이 안 됐다는 말이 되고 만다.

3. 또한 기본적으로 인도네시아어 날짜 기록 순서는 일, 월, 년도인데, 그 순서가 다 틀리게 기록돼 있어 오해의 소지가 있다. 날짜 기록 순서는 기본 중의 기본일 텐데, 기본도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번역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쉽게 알 수 있다.

4. anda sedang membayar 130,500 KRW.: "당신은 130,500원을 (지금) 지급하고 있습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sedang은 "---하고 있는" 현재형의 의미인데, 위 고지서를 받아든 사람은 이미 퇴사한 사람이기 때문에, sedang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맞다. 국민연금을 매월 납입하기 때문에 '매월 지급액이 130,500원'이라는 말을 하고자 한다면, '매월'의 의미인 setiap bulan을 넣어야 하는데, 위 문장에서는 그런 내용이 없다. 안내문대로라면, 국민연금 가입자는 현재까지 납입액이 130,500원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5. 그리고 오타인지, 몰라서 쓴 것인지 몰라도, 철자가 틀린 부분이 있다. pendapatanan는 pendapatan이 맞다. 그 외에도 status는 그냥 써도 무방하나, 일반적으로 기혼이냐 미혼이냐를 물을 때 쓰는 용어이기 때문에, 어법상 상당히 어색하다. 오히려 informasi로 하는 것이 적절하다.

6. 국민연금이 납입자의 수입에 따라 매월 일정액을 납입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쓴, atas dasar pendapatanan(철자틀림) 역시 어법상 상당히 어색하다. 이는 sesuai pendapatan bulan anda(당신의 매월 수입에 따라)로 함이 적당할 것이다.

위와 같은 점들을 감안하여, 기존 문장을 최대한 살리고자 어법상 어색한 부분까지 그대로 쓴다 해도, 의미 전달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번역한다면 아래와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다.

Anda yang bernama Tarso mendaftar pensiun nasional sejak 02/01/2009 sampai 22/11/2010 atas dasar pendapatan anda setiap bulan anda membayar 130,500 KRW.

국민연금은 국내 체류하는 만 18세 이상 60세 이하 내외국인이 가입대상이다. 2010년말 법무부 출입국 관리사무소 통계에 의하면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등록 인도네시아인은 총 2만7447명으로, 그중 취업자격을 갖고 있는 사람은 2만2372명이다. 이는 국민연금관리공단으로부터 인도네시아어로 된 <국민연금 지급 내역서>를 받아보는 사람이 최소한 2만2372명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말인즉, 국민연금 관리공단은 최소한 2만2372명에게 매해 엉터리 인도네시아어 안내문을 발송하고 있다는 것이다. 창피도 이런 창피가 없다.

번역물이 좋으려면, 좋은 번역자가 있어야 한다. 좋은 번역자는 해당 외국어에 대한 이해와 해당 분야의 전문지식과 뛰어난 우리말 구사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와 함께 번역자는 오역이나 왜곡, 오탈자가 없는지 살펴야 한다.

"오역 부분이 있거나, 이해가 되지 않으면 연락 바란다"는 안내글을 통해서 원어민들에게 번역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어민들은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 표현, 내용과 문법, 어법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없는지, 문장의 흐름이 자연스러운지 등에 대해 의견을 전달할 수 있고, 오탈자를 짚어줄 수 있다. 번역을 할 때 어려운 부분이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게 하기 위해 어법과 문법을 지켜야한다. 그 가운데 맞춤법은 기본이다. 그런 면에서 오탈자의 문제는 번역 문제이기 전에 성의의 문제이다.

외국어를 좀 한다고 자랑하고자 오타를 지적하고, 문법과 어법이 어색하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번역을 할 때는 현지인의 눈높이에 맞춰서 해야 하고, 번역한 것을 역번역해서 제대로 번역했는지를 재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입장에서 지적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번역을 할 경우가 많은 필자는, 번역이 끝나면 현지인 교수들에게 먼저 묻고, 그 다음에는 그 내용이 이해가 쉽게 되는지를 이주노동자들에게 물어본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번역이 갖는 한계를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이 발송한 인도네시아어 <국민연금 납입 내역서>는 그런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다른 공공기관인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에서 운영하고 있는 홈페이지인 EPS 외국인고용지원(http://eps.hrdkorea.or.kr/e9/index.do?method=index)에 수록돼 있는 <자주쓰는 외국어 DB>는 사업주를 위한 인도네시아어의 경우는 더 심하다. 가장 기본적인 발음부터 경음과 격음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등 그야말로 오류투성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그에 대한 문제점을 몇 년간 지적했지만, 여전히 수정이 되지 않는 걸 보면, 성의가 없어도 여간 없는 게 아니다.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 EPS 외국인고용지원 <자주쓰는 외국어 DB>엉터리 번역
첫 화면 도표에는 맨 윗줄에 이렇게 나와 있다.

한국어 인도네시아어 INDONESIAN
인도네시아어는 인도네시아어로 Bahasa Indonesia이지, INDONESIAN이 아니다. 아주 단순하고 기초적인 문장을 다루고 있는 첫 화면부터 오류투성인데, 굳이 다 봐서 뭐하랴 하면서도 인내를 갖고 조금 더 살펴보겠다.

1) 일단 발음 설명이다.
고맙습니다. terimakasih
트리마가싷

위와 같이 발음을 인도네시아어 아래에 한글로 병기하고 있는데, 이는 가장 기본적인 인도네시아어 발음 구조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쓴 것이다.

왜냐하면, 인도네시아어는 K.T. P 발음만 놓고 보면 격음(거센소리), 우리말의 ㅋ,ㅌ,ㅍ 발음이 없는 반면, 경음(된소리) ㄲ,ㄸ,ㅃ이 발달돼 있다. 다시 말하면, 인도네시아어에서 K.T.P는 ㅋ, ㅌ, ㅍ, 발음이 아니라, ㄲ, ㄸ, ㅃ 발음을 해야 맞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terimakasih는 '트리마가싷'가 아니라, 뜨리마 까시(인도네시어 역시 띄어쓰기가 잘못돼 있다. terima kasih)'가 되어야 한다. 맨 뒤의 h는 발음이 glotal sound라 해서 잘 들리지 않기 때문에 한글 병기를 할 때는 생략하게 된다. 위 발음 병기는 마치 미국 사람을 위해 쓴 것 같다. 왜냐하면 서양 사람들에겐 격음이나 경음이나 같은 소리로 들리고, 발음 구별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산을 푸산이라 하고, 경남을 켱남이라 한다.

2) 내용 설명 부분이다. 기본적으로 말이라는 것이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어법이 다르거나 어색한 부분은 무시하더라도, 아래 내용은 완전 다른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당신의 상사는 ㅇㅇㅇ 입니다. Bagaimana menurut pendapat anda
바가이마나 므누뤁 쁜다팥 안다

일단, 우리말을 인도네시아어로 정확히 하려면, 당신(Anda)의 상사(Atasan), Atasan anda(당신의 상사)라는 말이 있어야 하는데, 설명에는 상사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홈페이지에 나온 설명 부분을 정리하면
Bagaimana(바가이마나, how about? what do you think? 어떻습니까?),
menurut(머누룻, --에 의하면.according to),
pendapat(뻔다빳, opinion, 의견),
anda(안다, you, 당신).

어법이야 어찌됐든 굳이 번역을 하자면 "당신 생각/의견은 어떻습니까?"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니 지문에 나와 있는 "당신의 상사는 ㅇㅇㅇ 입니다."와는 전혀 다른 설명이 되는 셈이다.

다른 부분은 살펴보지도 않았다. 첫 화면부터 엉터리인데다, 기본적인 발음부터 틀리는데, 더 무엇을 보겠는가?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 정도면 해당 외국어를 잘하는 직원들이 있을 텐데, 어떻게 이런 실수들을 했는지 모르지만, 이런 실수가 시정되지 않는 것은 그만큼 관심이 없다는, 성의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서비스로 하는 좋은 일도 세심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욕먹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며, 해당 공공기관들은 오류투성인 번역물들을 재검토해 봐야 할 것이다.


태그:#엉터리 번역,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 #국민연금관리공단, #인도네시아어, #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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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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