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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해병의 원점이라 불리는 미나마타(水俣)에 다녀왔다. 나가사키에서 오전 6시에 출발해 자동차로 두 시간을 달려 운젠시 쿠니미에서 페리를 탔다. 배는 나가사키현에서 출발해 구마모토현에 다다랐다. 후쿠오카에서는 자동차로 3시간이면 다다를 수 있는 미나마타이지만, 규슈에서도 서쪽 반도에 혼자서 툭 튀어나와 있는 나가사키에서 미나마타시까지는 반나절을 가야 했다. 아침부터 따가운 햇살이 내리 꽂혔다.

기자가 미나마타병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사회교과서 속에서였다. 아마 1990년 즈음의 교과서였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바다 건너 한국의 초등학생이 교과서에서 배울 만큼, 미나마타 병은 환경오염의 폐해와 공해병의 상징이었다. 미나마타의 사례는 일본의 사건이 아니라, 세계 속의 미나마타였다.

1956년 5월 최초로 공식 확인된 미나마타병

칫소 정문 바로 맞은편에 만들어진 가고시마 혼센 미나마타역. 현재도 국도 3호선을 사이에 두고 공장과 오렌지철도 미나마타역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칫소를 위해 놓인 철도라고 지역 주민들은 말한다.
▲ 미나마타역 칫소 정문 바로 맞은편에 만들어진 가고시마 혼센 미나마타역. 현재도 국도 3호선을 사이에 두고 공장과 오렌지철도 미나마타역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칫소를 위해 놓인 철도라고 지역 주민들은 말한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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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마타병은 창업 100년을 훌쩍 넘은 화학공업 회사 '칫소'의 미나마타 공장에서 메틸수은을 포함한 폐수를 무처리 상태로 미나마타만과 강 하구 등에 장기간 배출함에 따라 생겨났다. 바다의 생명이 오염되고, 병든 바다에서 물고기가 죽어 떠오르고, 날던 바다새가 떨어지고, 고양이가 발작을 일으키다 집단사하고, 드디어는 지역에서 물고기를 날마다 먹고 살아가던 주민과 어린 아이들 그리고 엄마 뱃속에 있던 아기들까지 병들게 한 엄청난 공해병이었다.

공해병(公害病)이란, 일본식 단어로 공해가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질병을 이르는데, 의학적 용어라기보다는 사회적 용어다. 일본의 4대 공해병이라 하면 반드시 제일 먼저 메틸 수은 중독에 의한 미나마타병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울산 온산지역의 공업단지에서 일어난 '온산병'이나, 서울 상봉동 진폐증 소송 사건 등이 유명한 공해병 사례로 꼽힌다. 핵발전소 인근의 피해나 공단 부근의 건강 피해, 석면 피해, 농약이나 배기 가스로 인한 건강 피해도 공해병에 들어간다.

초등학교 수업에서 미나마타병에 대해서 배울 때는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일본에서 옛날엔 이런 일도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이 그쳤던 것 같다. 그때는 환경이 오염되면 안 된다거나 공장 폐수가 강과 바다를 오염시키면 사람들도 이렇게 아프게 된다고 생각은 했다. 그러나 주변에서 특별히 공해병 피해 사례를 접할 수 없는 서울 아이가 미나마타병이나 진폐증이나 핵발전소 주변의 건강피해에 대해서 현실감을 가지고 상상하기란 어려웠다. 그저 학교에서 환경보호 글짓기나 포스터, 표어를 숙제로 내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강과 바다를 깨끗이 하는 것 정도였다고 할까.

이렇게 머리 속에서 과거의 일로 잊혀졌던 미나마타가 현실 속으로 들어온 것은 일본에 와서 생활하면서부터다. 합성세제를 사용하지 않고 유해한 상품은 만들지도, 구입하지도, 사용하지도 않도록 노력하는 것, 직접 작은 농사를 짓거나 무농약 지역 농산물을 구매하여 먹는 것, 공정무역 제품과 농협, 생협의 물건을 구매하는 것, 일회용품과 쓰레기를 줄이는 것, 덜 소비하고 더 많이 자연에 가깝게 생활하는 것을 지향하는 지역의 소박한 환경운동을 종종 만날 기회가 생기면서, 왜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가를 묻기도 전에 자신의 몸이 먼저 좋은 것을 알고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댐과 방조제 건설 등으로 파괴되는 자연과 지역 공동체를 살리고자 하는 주민운동, 핵발전소나 진폐증, 석면 피해 그리고 다양한 산업공해, 식품공해 사건 등과 싸우는 운동 등을 자주 접하면서 미나마타병과도 재회했다.

일본에서 신문이나 뉴스를 보는 과정에서 1956년 5월 최초로 발병이 '공식' 확인된 미나마타병의 피해자들이 2010년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병을 안고, 차별을 안고, 삶의 절박한 과제들을 안고, 때로는 재판으로, 때로는 사회적인 활동으로, 미나마타의 현장에서 끝나지 않은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래서 기자는 일본에 있는 동안 반드시 가야 할 곳의 목록에 미나마타를 항상 마음 속에 두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미나마타행이 성사되었다.    

태아성 미나마따병 환자들의 홋또 하우스

중학생들과 교류 중인 태아성 미나마타병 환자들과 홋또 하우스 직원들.
▲ '홋또 하우스 모두의 집' 중학생들과 교류 중인 태아성 미나마타병 환자들과 홋또 하우스 직원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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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마타에 도착한 첫날 제일 먼저 향한 곳은 '태아성 미나마타병' 환자들이 함께 생활하고, 일하고, 어울리며, 미나마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학습과 공감의 장인 복지시설 '홋또 하우스 모두의 집'였다. '홋또'란 일본어로 마음을 풀고 편히 쉴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반을 통하여 메틸 수은에 중독되어 뇌신경세포에 문제가 생기는 등 다양한 아픔을 안고 태어난 태아성 미나마타병 환자들이 마음을 풀고 편히 쉬고 활동할 수 있는 활기찬 공동체를 지향하며 이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건물을 지을 때 3개의 나무 기둥을 넣었는데 여기에는 '생명, 희망, 기도, 느릿느릿, 두레(공동체 노동)'의 정신을 담았다고 한다. 이곳은 태아성 소아성 미나마타병 환자들과 장애를 가진 분들이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소망을 실현하는 장소로서 출발했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각자의 장소에서 자기답게 생활해갈 수 있도록 생활 전반을 지원하려고 노력 중이란다.

이날은 지역 중학교에서 방문한 몇 명의 남학생들이 태아성 미나마타병 피해자들과 홋또하우스 활동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현장 학습을 하고 있었다. 학생들을 대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눈빛과 태도는 매우 진지하고 당당했다. 스스로 걸을 수 있는 사람, 휠체어를 타야 하는 사람, 젓가락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 좀처럼 입술을 움직이기 어려워 원하는 대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의사를 불편함 없이 표현할 수 있는 사람까지 각자가 가진 장애의 정도는 저마다 달랐다. 그러나 천천히 짤막하게라도 진지하게 학생들을 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역 중학생들과의 교류 시간이 끝난 뒤에는 서예교실이 열렸다. 홋또 하우스에는 태아성 미나마타병 환자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삶의 희망과 사회의 희망을 만들어가는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이 지역의 일반 장애인들에게도 개방하고 있다.

그래서 이날도 좀더 어리고 젊은 장애인 친구들이 와 있었다.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각자가 가진 재능을 발견하고 재주를 더욱 빛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 열린 서예교실에는 미나마타병 피해자인 어머니의 아들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하여 재판을 벌이고 있는 미조구치씨가 자녀, 손자뻘인 태아성 미나마타병 환자와 지역의 젊은 장애인 친구들을 위하여 붓글씨를 가르쳤다.

서예교실에 참여하지 않는 다른 회원들은 신문지를 활용해 친환경 종이가방이나 엽서팩 등을 제작하는 작업을 했다. 평소에는 건조시킨 꽃잎을 명함에 부착하거나 책갈피나 컵받침을 만드는 작업도 하고 있는데, 이곳을 찾아오는 일반 방문자들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소아·태아성 미나마탑병 환자들이 직접 홋또 하우스에서 만들어 판매하는 빵. 주2회 시청과 학교, 지역 내 곳곳에서 이 빵을 판매하고 있다.
▲ 홋또 하우스에서 만들어 판매하는 빵 소아·태아성 미나마탑병 환자들이 직접 홋또 하우스에서 만들어 판매하는 빵. 주2회 시청과 학교, 지역 내 곳곳에서 이 빵을 판매하고 있다.
ⓒ 홋또 하우스 모두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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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과 직원들이 함께 손길을 보태어 빵을 구워 판매하기도 한다. 일주일 두 차례 국산 밀가루로 만든 빵을 회원들이 교대로 판매하는 활동을 한다. 목요일은 시청에서, 금요일은 마을 곳곳에서 판매를 한다. 빵과 커피를 판매하는 홋또 하우스 카페도 운영 중이다. 지난 8월 20일에는 미나마타 시립 제일 초등학교의 교원들에게 빵을 판매했다고 한다.
이날은 후쿠오카, 오이타, 나가사키 등 곳곳에서 미나마타병을 공부하고 환자 분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찾아온 방문객이 제법 많았던 탓에 서예교실은 미나마타병 환자와 장애인, 그리고 바깥 사람들이 뒤섞여 어정쩡한 분위기로 시작되었다.

열아홉 살의 어린 여자친구부터 쉰 살이 훌쩍 넘은 아저씨까지 다양한 연령과 사연을 가진 분들이 섞여, 각자 스타일대로 붓을 들고 서예용지에 글자를 써넣는 홋또하우스의 회원들. 초등학교 교사인 젊은 여성과 퇴직 간호사인 베테랑 할머니는 종이를 바꿔주기도 하고, 잘 한다고 칭찬이나 격려를 하기도 하고, 서예와는 상관없는 자잘한 말도 걸면서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었다.

한 번 웃음이 터지면 그칠 줄 모르는 카가타 키요코씨는 홋또 하우스의 태아성 미나마타 환자 중 가장 밝았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먼저 자연스럽게 말을 하고 낯을 가리지 않는 이는 나가모토씨였다. 그는 시립 미나마타병 자료관에서 방문자들에게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증언 활동도 하고 있다.

나이가 벌써 쉰을 넘었는데 가장 소년처럼 해맑은 미소를 가진 오니즈카씨와 나가이씨, 스무살 청년 시절 멋진 양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방문자들에게 보여주는 가네코씨, 가장 부지런히 움직이고 무언가를 끝없이 만들며 일을 하는 야마조에씨,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미나마타병과 정부의 조치 등에 대해 의견을 말하던 마츠나가씨, 조용히 피아노를 치던 오가사와라씨.

이들은 24시간 홋또 하우스에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왔다 갔다 하는 이도 있고, 메이스이엔(明水園) 등 미나마타병 환자 전용 시설에서 개호를 받으면서 생활하는 이들도 있다. 일주일에 며칠은 홋또 하우스에서 밥도 먹고, 숙박도 하고, 일을 하고, 전국과 해외 각지에서 찾아온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다양한 연구자와 활동가, 시민들을 만나서 이야기도 나눈다.

미나마타병에 걸려 돌아가신 모친과 미나마타 병에 걸린 아들을 두고 있는 미조구치 씨가 직접 강사로 나서 홋또 하우스에서 회원들에게 서예를 가르치고 있다.
▲ 서예 수업 풍경 미나마타병에 걸려 돌아가신 모친과 미나마타 병에 걸린 아들을 두고 있는 미조구치 씨가 직접 강사로 나서 홋또 하우스에서 회원들에게 서예를 가르치고 있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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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미소를 가진 오니즈카씨와 함께 같은 테이블에 앉아 저녁식사를 하던 중에 "홋또하우스에서 보내는 시간 중 언제가 제일 좋아요?"라고 물었더니,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 나누고, 먹고 마시며, 어울리는 시간이 제일 좋다"고 한 단어 한 단어 뚝뚝 끊어 천천히 대답을 해주었다. 오니즈카씨는 메이스이엔도 나쁘지는 않지만, 홋또 하우스에 오는 것이 더 즐겁다고 말했다.

함께 홋또 하우스를 방문한 기자의 만화가 친구 니시오카 유카씨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홋또 하우스의 주인공들의 얼굴을 한 장 한 장 전부 만화로 그려 선물했다. 쏙 빼닮은 서로의 캐리커쳐를 보면서 모두들 박장대소하는 흥겨운 소란 속에 밤이 깊어갔다.


비록 몸은 불편해도, 일을 찾아하는 사람들


홋또 하우스 벽에 높이 걸려져 있는 회원 키요코 씨의 붓글씨. 꽃을 좋아하는 키요코 씨의 예쁜 마음과 손길이 담겨 있다.
▲ 키요코 씨가 쓴 붓글씨 홋또 하우스 벽에 높이 걸려져 있는 회원 키요코 씨의 붓글씨. 꽃을 좋아하는 키요코 씨의 예쁜 마음과 손길이 담겨 있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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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풍요로운 바다였던 시라누이 바다와 미나마타만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아성·태아성 미나마타병 환자들은 일을 찾아 많은 노력을 해왔다. 불편한 몸으로 태어났더라도 인간으로서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소망, 미나마타병을 젊은 세대에게 더 많이 전하고 싶다고 마음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자신의 몸이 공해와 환경오염으로 인하여 아프게 되었으므로 몸에 좋은 과일을 만들겠다며 무농약 밀감을 재배하거나, 영화나 다큐멘터리 촬영에 직접 참여하거나,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대규모 공연을 기획하기도 하고, 다양한 형태로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했다.

우리나라에도 어린이용 동화로 번역된 <미나마타의 붉은 바다>에는 이러한 슬프고 안타까우면서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동화를 쓴 이는 실제 미나마타병 연구에 헌신하며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이끌어낸 구마모토 대학의 하라다 마사즈미 의사다.

현재 '공식'적으로 인정된 미나마타병 환자의 수는 2200명을 넘는다. 이중 절반 이상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으로 법에 의해 미나마타병이라고 '인정'받지 않았더라도 당시 미나마타병이 발생한 지역에서 살았고 그 지역 물고기를 먹었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에게는 의료 지원 등이 적용되고 있다. 그 숫자는 1만 명을 넘는다. 그러나 아직도 비현실적인 '인정' 기준이라는 것 때문에, 아직도 제대로 환자로서 사회적 보호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남아 있다.

어린 나이에 병에 걸리거나, 엄마 뱃속에서 메틸수은에 중독되어 태어난 아이들은 이제는 아저씨, 아주머니가 되었다. 물론 엄마 뱃속에서 유산되거나, 대다수가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미나마타 시립 자료관이나 역사고증자료관, 그리고 미나마타병과 관련한 전시회나 자료 등에서 볼 수 있는 유명한 사진 속 주인공들은 이미 유명을 달리한 이도 많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은 오늘 하루를 의미있고, 보람있게, 즐겁게 일하고 협동하며 살아가려고 하고 있다. 역사 속에서 미나마타가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 어린 학생들과 젊은 세대에게 미나마타의 목소리를 전하는 데도 열심이다.

아직 미나마타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미나마타 병은 화학공장 칫소가 기업의 이익을 위해, 인간의 생명과 자연을 무시한 채 바다와 강으로 마구 흘려보낸 폐수가 바다와 그곳의 생명을 오염시킨 결과 생긴 병이다. 물도, 바다 속 플랑크톤도 식물도, 물고기와 어패류, 새와 고양이 그리고 사람의 생명까지도 파괴했다. 인체를 교란시키고 잠식하기 전에 이미 바다와 그 주변의 생명들에 이변이 일어나고,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다. 오염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었으나, 장기간에 걸친 오염과 어업피해가 있었고, 결국 미나마타병이 공식적으로 보고된 것은 1956년이었다.

처음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 괴질이라고 오해되어 환자의 집 주변을 소독하거나 환자를 격리시키는가 하면 환자들과 친하게 지내던 이웃까지 등을 돌려 버리는 등 차별이 극심하여 환자들은 병과 생활고, 차별이라는 삼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 해 가을 "어떤 종류의 중금속이 어패를 통해 인체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는 보고가 나오고, 칫소가 배출한 유기수은을 포함한 공장폐수가 의심되었으나, 원인이 밝혀진 뒤에도 기업은 계속해서 폐수 배출을 정지하지 않았다. 행정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일왕 가문의 친척이라는 든든한 '빽'도 작용했다고 한다. 국가나 지방정부는 원인이 밝혀진 뒤 즉시 어획금지 조치, 섭취 금지 조치, 폐수 배출 정지 조치 등을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았다. 기업의 책임에 더해, 국가와 지방정부의 행태가 미나마타 병의 피해를 막대하게 확산시킨 것이다. 

1968년이 되어서야 정부는 미나마타병이 칫소의 폐수로 인한 공해병이라고 공식발표를 했고, 환자들의 잇따른 소송과 긴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재판이나 교섭 등으로 기업과 정부에 대한 책임을 묻는 피해자들의 싸움은 너무나 지난하고 힘겨운 세월이었다. 의료적으로 뒤늦게 지원을 받고 있는 이들이라고 해서 그 삶이 편해진 것은 아니다. 정부가 뒤늦게 사실을 인정하고 재판 등으로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했어도 환자들의 증상과 질병은 달라진 것이 없다. 미나마타 병은 증상이 나빠지지 않도록 완화시키는 약을 먹거나 재활치료를 하는 것 외에 치료법이 아직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피해자들과 하라다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앞으로도 긴긴 인생이 남아 있으며,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든 하지 않든, 환자들이 배상금을 받았든 안 받았든, 이들은 부모님들보다 몇 배나 더 오래 살아가야 한다고.

"일을 주세요." "공부하고 싶어요." "친구가 있었으면!" 이것은 미나마타병에 걸려 고통스러워 하던 어린이와 젊은 세대의 가장 큰 호소였다. 그 사이 많은 이들이 돌아올 수 없는 세상으로 떠났다. 그러나 아직도 미나마타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미나마타에서 생명과 평화, 희망을 열어가는 이들의 삶도 계속될 것이다.

미나마타에는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찾아오곤 하는데, 언젠가 캐나다의 인디언들이 방문했다고 한다. 인디언이 살고 있는 고장의 호수가 수은에 오염되어 미나마타와 똑같은 환경문제가 일어났던 것이다. 사슴, 들소, 여우 같은 짐승을 쫓아다니거나 물고기를 잡아서 생활하는 인디언에게 환경문제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다.

당시 캐나다 인디언 대표단은 일본에서는 수은중독 공해병에 대해서 어떤 대책을 세웠는지, 실제로 미나마타병이 환자들의 몸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공부하러 왔던 것이다. 지금도 미나마타에는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 미국, 캐나다, 아프리카, 유럽과 아시아 각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미나마타병의 실태와 대응, 현상황 등을 견학하고 환자들을 만나고 간다. 

미나마타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이며, 이 교훈을 우리의 삶과 우리 인류 사회가 어떻게 살려 나갈 것인지는 아직도 큰 과제로 남아 있다.

미나마타병 사건 연표 
1908.8.  미나마타에 일본 질소비료 주식회사(칫소) 발족
1926.4.  칫소 공장 폐수로 인한 어업 피해에 대해 미나마타 마치 어협에 위로금 1500엔 지급.
1927.5.  조선짓소 주식회사 설립, 흥남공장에 전력, 화학 콤비나트 형성.
1932.5.  미나마타 공장, 아세트 알데히드 생산 개시. 공장 폐수를 핫껜 항으로 방출하기 시작함.
1953.12. 미나마타시 이즈키에서 여자 아이 발병(후에 미나마타병 환자 1호로 확인됨)
1954.6.  미나마타시 모도에서 고양이가 미쳐서 죽음, 고양이 거의 전멸.
1956.4.  미나마타시 쓰키노우라 5세 여자 아이가 칫소 미나마타 공장 부속병원에 진찰받으러 옴.
1956.5.  칫소 부속병원 원장, 미나마타 보건소에 "원인 불명의 괴질 환자 4명 발생" 보고.
1957.4.  미나마타 보건소에서 미나마타만의 물고기를 고양이에게 먹여 고양이 발병 실험.
1958.9.  후생성, 오염어류의 포획과 판매를 금지하는 식품위생법 적용을 하지 않기로 결정.
1958.9.  칫소 미나마타 공장은 아세트알데히드 배수 경로를 핫껜 항에서 하치만 집적지로 변경, 계속해서 폐수 방류.
1959.7.  구마모토 대학 연구반, 미나마타만의 어패류에 의해 발생하는 신경계 질환이며, 오염독물로서는 수은이 주목된다고 공식 발표.
1959.11. 시라누이 바다 연안 어민 총궐기 대회. 2000여 명이 참가해 칫소 공장에 조업중지 요구하며 난입.
1959.11. 미나마타병 환자 가정 상조회, 환자에 일률적으로 300만엔 보상을 요구하며 칫소 미나마타 공장 앞에서 농성 시작.
1959.12. 칫소가 환자 가정상조회에 대하여 향후 미나마타병 원인이 칫소에 있음이 밝혀져도 더이상의 보상은 요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망자 30만엔, 생존환자 10만엔, 어린이 1년 3만엔 씩 위로금을 받는다는 계약서를 체결하도록 종용, 악명높은 위로금 계약 체결.
1959.11. 후생성 식품위생조사회는 "미나마타병은 미나마타만 및 그 주변에서 서식하는 어패류를 다량으로 섭취함으로써 발생한, 중추신경계 장애를 일으키는 중독성 질환이며 그 주요인은 유기 수은 화합물이다"라고 답신.
1968.5.  칫소 미나마타 공장, 아세텔렌법 아세트알데히드 제조 중지.
1968.8.  칫소 노조, 미나마타병 환자의 투쟁에 대하여 아무 것도 함께 해오지 않았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선언을 함.
1968.8  정부, 미나마타병을 공해로 인정. 구마모토 미나마타병은 칫소 미나마타 공장의 아세트알데히드 초산 설비 내에서 생산된 유기수은 화합물이나 원인이라고 밝힘.
1969.6.  환자가정 상조회 소송파 29세대 112명, 칫소에 대해 총액 6억 4000여 만 엔의 위자료 청구 민사소송.
(제1차 소송)
1969.12. 공해의 영향으로 인한 질병의 지정에 관한 정부 검토위원회에서 병명을 '미나마타병'으로 지정.
1973.1.  미나마타병 제2차 소송 제기
1973.3.  제1차 소송 판결, 원고 승소. 미나마타병 교섭단, 칫소와 직접 교섭 개시.
1973.7.  미나마타병 환자와 칫소 사이에 보상협정서 체결.
1974.8.  미나마타병 인정 신청환자 협의회 발족.
1979.3.  구마모토 지방재판소, 칫소의 역대 사장들에게 유죄판결.
1980.5.  미나마타병 제3차 소송제기. 첫 국가배상 청구 소송.
1982.10 칫소 미나마타병 간사이 소송 제기, 국가배상 청구 소송.
1994.5.  요시이 마사즈미 미나마타 시장, 미나마타병 희생자 위령식에서 시장으로서는 최초로 공식 사죄.
1994.7.  미나마타병 간사이 소송 오사카 지방재판소 판결, 국가와 현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음. 항소.
1995.10. 미인정 환자 5단체, 정부 최종해결책을 수락.
1996.4.  미나마타병 환자연합과 칫소 협정서 체결.
1996.5.  전국연락회와 칫소 협정서 체결.
1996.6.  칫소에 대한 정부의 금융지원 근본책을 내각 회의가 양해.
2001.4. 오사카 고등재판소, 미나마타병 간사이 소송 판결. 국가와 현의 책임을 인정함. 국가와 현이 상고.
2002.9. 구마모토 대학 '미나마타학'강의 개강
2004.10. 미나마타병 간사이 소송 최고재판소 판결. 국가와 현의 책임을 인정하고 판결 확정.
2005.10. 미나마타병 시라누이 환자회, 국가와 구마모토현, 가해기업 칫소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제기.
2009.     수은증독 특별조치법 통과.

발췌: 구마모토 대학 미나마타학 연구센터, <미나마타를 걸으며, 미나마타에서 배운다>, 구마모토 일일신문사, 2008


태그:#미나마타, #홋또 하우스, #태아성 미나마타병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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