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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선덕여왕>에 묘사된 죽기 직전의 진흥왕(이순재 분).
 드라마 <선덕여왕>에 묘사된 죽기 직전의 진흥왕(이순재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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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비봉에 세워진 순수비 아래에서 흡족한 미소를 띠며 새로이 개척한 영토를 바라보던 신라 제24대 진흥왕(이순재 분). 드라마 <선덕여왕>의 초반부는 바로 이 진흥왕이 죽기 직전에 미실(고현정 분)에게 남긴 유훈에 담겨 있었다는 후계자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유훈에 담긴 원래의 후계자는 진흥왕의 손자이자 죽은 장남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이었지만, 진흥왕의 차남이자 훗날의 진지왕인 금륜왕자(임호 분)와 미실의 뒷거래에 의해 유훈이 조작되어 신라 제25대 국왕의 자리는 백정이 아닌 금륜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둘 사이의 거래란, 미실이 금륜을 왕으로 만들어주면 금륜은 미실을 왕후로 맞아들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미실은 "유훈에 담긴 진짜 후계자는 백정이었다"면서 불과 3년 만에 진지왕을 몰아내고 백정을 왕위에 앉혔다. 이렇게 해서 등극한 백정이 바로 선덕여왕의 아버지이자 신라 제26대 국왕인 진평왕(조민기 분)이었다. 이것은 드라마 속의 내용이다.

<선덕여왕> 속 진지왕은 정말 왕위를 빼앗은 걸까?

그럼, 진흥왕이 구상한 후계문제에 관한 드라마 <선덕여왕>의 이야기는 실제 역사에 얼마나 부합할까? 진흥왕이 점찍은 진짜 후계자는 누구였을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반드시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삼국사기> 속의 두 가지 사실관계가 있다.

첫째, 진흥왕이 죽기 직전까지 신라에는 공식 후계자 즉 태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 권4 '진흥왕 본기'에는 진흥왕 27년(566)에 진흥왕의 장남인 동륜이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33년(572)에 동륜이 사망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그 후에 새로운 태자가 임명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이 점을 볼 때, <삼국사기> 기록상으로는 동륜이 사망한 33년으로부터 진흥왕이 사망한 37년(576)까지의 4년 동안 신라에는 공식 후계자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말년의 진흥왕이 사망 이전에 이미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는 점이다. "(왕이) 말년에 이르러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스스로 법운이라 자칭하며 마쳤다(죽었다)"라고 '진흥왕 본기'는 말하고 있다. 드라마 속의 진흥왕은 죽기 직전에 미실에게 불가에 귀의할 것을 요구했지만, 실제로 말년의 진흥왕은 남에게 그런 권유를 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직접 불가에 귀의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말년'이 언제를 가리키는가와 관련하여, 대구사학회가 2006년에 발행한 <대구사학> 85집에 실린 '신라 진지왕의 폐위와 진평왕 초기의 정치적 성격'이란 논문에서 한국고대사 연구자 박용국은 "진흥왕 말년은 설령 죽는 그 해로 보지 않더라도 태자 사후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 같다"고 추론했다. 태자 사후의 정신적 충격이 진흥왕의 조기 퇴진을 초래한 동기였을 것이라는 게 그의 추론이다. 

자연스럽게 이뤄진 진흥왕→진지왕으로의 권력승계

어떤 동기에서였든지 간에, <삼국사기>를 토대로 할 때에 말년의 진흥왕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에 '다른 누군가'가 진흥왕의 권한을 대행했을 것임을 추론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태도를 놓고 볼 때에, 우리는 진흥왕의 권한을 대행했을 그 주인공이 진흥왕의 차남인 금륜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태도가 어떻길래?

진흥왕 사후의 권력승계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태도는 매우 평온하다. "진지왕이 즉위하니 …… 태자가 일찍 죽었기에 진지가 즉위한 것이다"라고 했다. 왕이 죽은 비상시국 하에서 이미 죽은 태자를 대신해서 차남이 즉위했다는 이 기록은 진지왕의 왕위계승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만약 다른 인물(특히 백정)이나 반(反)금륜파가 진흥왕의 권한을 대행하고 있던 상황 하에서 진흥왕 사후에 금륜이 왕위를 이었다면, 이 시기에 신라에서는 메가톤급 정변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그러한 정황이 나타나지 않는다. 특이상황을 알려주는 사료가 없는 한, 일반적 경험법칙에 의해 역사는 해석될 수밖에 없다.

진흥왕이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상황에서 그처럼 평온하게 권력승계가 이루어졌다면, 진흥왕 생전의 대행자가 진흥왕 사후에도 대권을 승계했으리라고 보는 게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를 근거로 할 때에, 금륜은 이미 진흥왕 말년부터 아버지의 권한을 대행하다가 아버지의 사망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왕위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선덕여왕>에서 진흥왕역을 맡은 이순재.
 <선덕여왕>에서 진흥왕역을 맡은 이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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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위작 논란이 있는 현존 <화랑세기>에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제6세 풍월주 세종 기사와 제7세 풍월주 설화랑 기사에서처럼 현존 <화랑세기>에는 왕위계승 이전의 금륜을 '금 태자'(金太子)라고 부른 부분들이 나온다. 만약 현존 <화랑세기>가 허위가 아니라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진흥왕 말년의 진흥왕 퇴진기간 동안에 금륜이 태자로서 아버지의 권한을 대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굳이 현존 <화랑세기>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위에서 살펴본 <삼국사기> 기록만으로도 진흥왕 말년에 금륜이 태자였든지 아니었든지 간에 왕권을 대행하다가 진흥왕 사후에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제 이 대목에서 이런 의문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진흥왕 말년부터 금륜이 왕권을 대행했다 하더라도, 평소에 진흥왕이 손자인 백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수 있지 않은가? '백정이 좀 더 크면 태자로 책봉해야지'라는 생각이 있었을 수 있지 않을까? 진흥왕에게 맏손자가 있었고 그 손자가 나중에 결국 왕위를 이었기 때문에, 생전의 진흥왕이 차남이 아닌 맏손자를 후계자로 점찍고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드라마 <선덕여왕>의 이야기처럼 진흥왕이 정말로 미실에게 "다음 보위는 백정에게"라는 유훈을 남겼을 가능성이 있을까? 그런 유훈이 있었기에 미실이 3년 뒤에 진짜 유훈을 공개하면서 진지왕을 몰아내고 백정을 왕위에 앉힐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러나 진흥왕이 후계자 문제에 관한 유훈을 남겼다는 증거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유훈을 남겼다는 명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유훈의 존재 여부를 추론케 할 수 있는 사실관계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밖에 없다.

그것의 존재 여부를 추론케 할 수 있는 사실관계란 어떤 것일까? 그 사실관계란 진지왕 폐위 당시의 사정이다. 진지왕이 즉위 당시의 하자(유훈 조작에 의한 즉위) 때문에 폐위되었다면,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온 그런 유훈이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귀족세력이 국왕을 몰아내는 본질적 이유

그럼, 진지왕의 폐위를 초래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물론 현존 <화랑세기>까지 함께 고려할 경우, 진지왕의 폐위를 초래한 요인은 다음의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귀족세력과의 갈등. <삼국유사>에서는 진지왕의 정치가 "어지러워서" 국인(國人)들이 그를 폐했다고 했다. 즉위 이후에 정치를 잘 못해서 국인들에 의해 왕위에서 내쫓겼다는 것이다.

국인들? 중국 주나라 이래(BC 1046년~)로 고대 동아시아에서 국인이란 '도성(國)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상징되는 지배층 혹은 귀족세력을 의미했다. 그런 귀족세력이 국왕을 몰아내는 본질적 이유는 간단하다. 국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의 특권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층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정치는 '어지러운 정치'가 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지방 곳곳에 남아 있는 공덕비들은 전임 사또가 일반 백성들이 아닌 지역 양반들의 이익을 얼마나 보호했는지를 기준으로 건립되었듯이, 역사에 어떤 왕으로 기록되는지 하는 것 역시 지배층이나 귀족의 이익을 얼마나 보호하는가에 의해 좌우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한나라(전한)를 멸망시킨 신나라의 왕망(BC 45~AD 23년)에 대한 중국 역사서의 기록태도에서 잘 드러나듯이, 귀족의 이익을 침해하는 군주는 '교활하고 천박한 놈'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또 조선 광해군의 폐위에서 잘 드러나듯이, 기득권층의 이익을 침해하는 군주는 '처음부터 왕이 아니었던 가짜 왕'으로 소급적으로 격하될 수밖에 없었다.

어지러운 정치로 폐위 초래한 진지왕

<선덕여왕>에서 진지왕 역을 맡은 임호.
 <선덕여왕>에서 진지왕 역을 맡은 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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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왕의 정치가 '어지러워서' 백성들이 아닌 귀족 지배층이 들고 일어섰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서, 우리는 왕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과거 역사서의 편향적 태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를 볼 때, 진지왕과 귀족세력 간의 갈등이 그의 폐위를 초래한 일차적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진지왕 집권기에 왕과 귀족세력의 갈등이 심하였다는 점은 앞의 박용국의 논문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진지왕이 왕권강화를 추구하였다는 점은 이화사학연구소가 2003년에 발행한 <이화사학연구> 30집에 실린 한국고대사 연구자 김덕원의 '신라 진지왕대의 정국운영'에서 좀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진지왕의 섹스 스캔들. 진지왕의 폐위를 초래한 두 번째 요인으로서 <삼국유사>가 제시한 것은 황음(荒淫)이다. 음란한 행동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진지왕과 도화랑이라는 여인의 스캔들을 기록하고 있다.

진지왕이 즉위 이후에 섹스 스캔들을 일으켰다는 점은 현존 <화랑세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존 <화랑세기>의 제6세 풍월주 세종 편에 따르면, 왕자 시절부터 진지왕은 미실과 육체관계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와 미래까지 언약했다. 그런 그가 막상 왕위에 즉위하자 미실을 왕후로 맞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여인과의 사랑에 빠졌다고 현존 <화랑세기>는 말한다. 이에 분노한 미실이 화랑세력을 앞세워 진지왕을 폐했다는 것이 현존 <화랑세기>의 기록이다.

왕조국가에서 왕이 여러 여자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사회의 동량인 화랑세력까지 나서서 진지왕의 섹스 스캔들을 문제 삼았다면, 단순히 진지왕이 여자들을 가까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당시의 성윤리에 위반되는 행동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그토록 커졌을 것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선덕여왕> 속 즉위와 폐위, 상상의 결과물

위와 같이 <삼국유사>나 현존 <화랑세기>를 토대로 할 때, 진지왕이 왕위에서 쫓겨난 것은 그가 처음부터 유훈 조작을 바탕으로 자리를 가로챈 '가짜 왕'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재위 중에 귀족지배층의 이익을 침해한 데에다가 결정적으로 섹스 스캔들에까지 휘말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본다면, 죽기 직전의 진흥왕이 백정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유훈을 남겼고 그 유훈이 조작되었다가 다시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진지왕의 즉위와 폐위가 발생했다는 드라마 <선덕여왕>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관계에 부합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극 작가의 상상의 결과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제로 말년의 진흥왕은 정치적 의욕을 잃은 상태에서 동륜태자의 죽음을 계기로 다른 누군가에게 권한을 맡긴 채 승복을 입고 살았고 그 '다른 누군가'는 차남인 금륜일 가능성이 높으며 금륜은 왕자 혹은 태자의 신분으로 아버지 생전에 국왕의 직무를 대행하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태그:#선덕여왕, #진흥왕, #동륜태자, #진지왕, #진평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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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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