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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기자말]
음식의 도시로 주저 없이 첫손에 전주를 꼽는다. 전통으로 널리 알려진 콩나물국밥은 모두가 즐기는 음식이 되었다. 잘게 부순 김과 수란, 모주를 곁들인 '남문식'이 지친 속을 달래는 맛으로 자리 잡은 게 대표적이다.
 
통상 '풍남문'으로 부르는 전주 남문. 호남제1성이라는 전주성 관문으로 여겼으며, 이 문 주변 시장이 남문시장이다. 이곳 콩나물국밥이 남문식이다.
▲ 전주 남문 통상 '풍남문'으로 부르는 전주 남문. 호남제1성이라는 전주성 관문으로 여겼으며, 이 문 주변 시장이 남문시장이다. 이곳 콩나물국밥이 남문식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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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밥은 또 어떤가? 갖은 나물에 육회, 달걀 노른자 위에 잣과 대추 등 고명을 곁들인다. 참기름 듬뿍 끼얹어 고추장에 쓱쓱 비비면 일품의 맛이다. 여러 가지 음식 재료를 섞는다는 측면에서 영양소는 물론 편의성까지 나무랄 데 없다.

비빔밥 탄생의 여러 설 중, 전주를 점령한 동학혁명군에게서 유래했다는 내용도 빠지지 않는다. 관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점차 군량이 부족해진다. 너무 많은 군사가 몰려들어 밥그릇마저 태부족이다. 이에 큰 그릇에 푸성귀와 꽁보리밥이나마 털어 넣고 비벼 여럿이 주린 배를 채웠다는 것이다. 전주비빔밥 탄생 배경에 곤궁한 처지에 놓인 당시 혁명군의 비애가 녹아들어 있다.
 
전라도 수부(首府)였던 전주 감영이 부분 복원되었다. 동학혁명군 점령 당시 이곳 선화당이 지휘소였다.
▲ 부분 복원된 전라 감영 전라도 수부(首府)였던 전주 감영이 부분 복원되었다. 동학혁명군 점령 당시 이곳 선화당이 지휘소였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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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조정

4월 29일(음)에서야 조정은 전주 함락 사실을 확실히 인지한다. 그 며칠 사이 왕후 민씨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 위안스카이와 청군 차병(借兵=군사를 빌어옴)에 대해 아퀴를 맞춰 놓는다. 조정에서 논의는 눈 가리고 아웅이다. 청군 차병이 몰고 올 후환에 대해 그들도 알았으나, 손아귀 권력이 우선이다. 그러니 왕후 치마폭에서 놀아나는 벼슬아치 누구 하나 반대하지 않는다.
 
경기전 정전에 보관 중인 이성계 어진.
▲ 이성계 어진 경기전 정전에 보관 중인 이성계 어진.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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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4월 고종실록엔 이에 대해 어떤 언급도 없다. 5월 1일에서야 아산만에 상륙 예정인 청병을 맞이할 영접관을 보내자는 내용이 보인다. 이로 미루어 여우 같은 왕후가 청병 차병 조회문을 그 이전에 보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자기 백성을 죽여달라고 외국 군대를 빌어오는 왕후의 속내는 무엇일까? 흥선대원군과 갈등이,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판단하는 기능을 마비시켰을까? 아니면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흔드는 맛에 취했을까? 그도 아니라면 악랄하고 모진 성정을 지닌 여염집 여인에 불과했을까?
 
임금은 사태를 매우 걱정하여 원세개를 불러 중국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중략)… 임금은 망연자실하여 중국에 도움을 요청한 일을 중지시키도록 하였다.
민영준은 원세개를 만나 임금의 이런 뜻을 전하자 세개가 "제가 이미 요청했습니다. 당신 나라 임금과 신하는 어찌 일 처리 하는 것이 이토록 답답합니까?"라고 하였다.
홍계훈이 초토문을 급히 올려보냈는데, 왕후 민씨가 이를 읽다가 "위로 국태공을 받든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영준을 돌아보며 꾸짖기를 …(중략)… 영준이 머리를 조아리며 왕후 민씨의 말에 따랐다. 이리하여 마침내 비밀리에 중국의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는데, 임금의 국정을 듣는 곳에서 논의 한 마디 없었다. (번역오하기문, 황현,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4, 수필 p92~93 의역 인용)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주시가지 모습.
▲ 당시 전주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주시가지 모습.
ⓒ 이영천(동학농민혁명기념관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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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군대가 움직이자, 조선과 청나라 정보에 온통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던 일본도 출병을 준비한다.

치열한 완산 전투

4월 29일부터 쏟아진 대포는 5월 1일이 되어도 그칠 줄 모른다. 여기저기 불길이 치솟고, 백성은 아우성친다. 백성을 구하자는 전쟁 아니던가. 수천 군사로 남문 밖 곤지산을 공격해보나 패하여 후퇴하고 만다. 산 위 참호에서 월등한 화력으로 방어하는 관군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무작정 진격은 한계가 농후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에 혁명군은 새로운 전술을 구상한다. 외곽 부대로 완산을 포위하여 장기 농성하자는 옥쇄작전이다. 관군의 군량미와 포탄, 탄약에 한계가 이를 때까지 시일을 두고 포위하는 작전이다. 즉시 통문이 날아간다.
 
여러 날을 두고 싸우던 중 돌연 바라보니 동학군 한 부대가 금구현 원평으로부터 청도원 고개를 넘어 완산칠봉 서남 방면으로 들어오고 또 다른 부대는 순창에서 임실 등지를 거쳐 만마관으로 들어 완산의 동남방으로 에워싸는 바람에, 관병은 이제 사면으로 적에게 둘러싸였으며 겸하여 보급로가 끊어져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홍계훈은 한쪽으론 동학군을 향해 휴전을 청하고, 다른 쪽으론 정부에 보고하였다. (동학사. 오지영. 문석각. 1973. p2202 의역 인용)
 
5월 2일도 여전하다. 수많은 백성이 죽고, 집이 불탄다. 또한 기관총 사격으로 길거리마저 돌아다닐 수 없다. 포격은 이성계 영정을 보관하던 경기전 한쪽을 부수고서야 멈춘다.
 
경기전의 중심전각인 정전. 이곳에 이성계 어진을 보관하고 있다.
▲ 경기전 정전 경기전의 중심전각인 정전. 이곳에 이성계 어진을 보관하고 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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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훈은 할 일 없이 완산칠봉에 진을 치고 동학군과 싸워 양군의 사상자가 많았었고 경기전과 전주영 등이며, 서문 밖 장터의 수천 민가가 모두 화재에 피해당했다.(앞의 책. p220 의역 인용)
 
5월 3일, 혁명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아침나절 서쪽 다가산과 동남쪽 완산칠봉, 북동쪽 황화대를 일시에 공격해 해질녘까지 싸웠으나 결과는 마찬가지다. 이날 전투에서 전봉준마저 대포 파편에 머리와 허벅지를 다치고 만다.

양측은 나름의 고민이 있었다. 관군은 포위망에 두려움을 느꼈고, 혁명군은 늘어가는 백성의 피해와 코앞에 이른 농사철에 이탈하는 군사, 그리고 군량미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전라 감영에서 풍남문으로 향하는 길. 그 너머에 대포가 쏟아진 완산칠봉 일부가 보인다.
▲ 남문 길 전라 감영에서 풍남문으로 향하는 길. 그 너머에 대포가 쏟아진 완산칠봉 일부가 보인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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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전투를 벌인 그날, 청일 양군의 출병 소식이 들려온다. 천진항에서 섭사성과 섭지초가 이끄는 청나라 북양함대 2,500명이 아산만으로 향한다는 정보다. 청나라 움직임을 주시하던 일본도 6,000명 병력이 인천항으로 항해한다. 무능한 권력은 늑대와 이리를 한꺼번에 불러들여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 꼴이 되고 말았다. 참으로 한심한 족속들이다.

전주화약(和約)

신임감사 김학진은 전권을 위임받은 편의종사(便宜從事)로 전주에 온다. 그는 청일 양군의 상륙 자체를 막으려면 하루빨리 화약을 맺는 길밖에 없다고 여긴다. 혁명군 지도부에 화약의 뜻을 은밀히 전하고, 경기전을 부순 홍계훈을 압박하여 화약을 재촉한다.

혁명군도 주전, 주화파가 대립 중이다. 김개남 등 주전파는 화약을 맺어도 고부 봉기처럼 보복할 것이고 한번 흩어지면 다시 모이기가 매우 힘들며, 그런다고 청일 양군이 철수하지 않는다며 계속 싸우자고 주장한다.
 
완산칠봉 녹두관에서 바라 본 전주성 남문 부근의 모습. 낮은 스카이라인의 도시 모습이 지금은 평화롭기만 하다.
▲ 전주성 남문 주변 완산칠봉 녹두관에서 바라 본 전주성 남문 부근의 모습. 낮은 스카이라인의 도시 모습이 지금은 평화롭기만 하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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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전봉준·손화중 등 주화파는 외세개입은 국가적 위기로 빨리 막아내야 하며 화력 열세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점, 다가온 농사철에 군사 이탈이 빈번하고 군량미 부족과 길어진 전쟁으로 사기가 꺾이고 있다는 점, 전봉준 부상으로 혁명군이 동요하고 있음을 들어 화약을 주장한다.

5월 6일 일본군이 인천항에 당도했다는 소식이 비선을 통해 전해지고, 김개남은 부대를 이끌고 남원으로 가버린다. 다음날 홍계훈이 화약을 청하는 문서를 혁명군에게 보내옴으로써 전주화약이 이뤄진다. 조정은 혁명군이 내건 12개 개혁조항을 법률화 하겠다는 것이고, 혁명군은 그 조항을 각 고을에서 자율적으로 집행하겠다는 선포다.
 
이때 정부는 논의를 거듭한 결과 관민이 서로 싸우는 것보다 강화하는 게 옳다 하고, 전라감사에 김학진을 임명하고 안무사 엄세영을 특파하여 같이 전주에 내려왔다. 정부 측은 동학군에게 여러 가지 폐정개혁안을 제출케 하여 이를 앞으로 실시하기로 서약하고 양병이 서로 물러나게 되었다. (앞의 책. p220 의역 인용)
① 도인과 정부 사이에 오래 묵은 혐의를 없애 깨끗이 하고 서정(庶政=여러 방면에 걸친 정사(政事))을 협력할 것.
②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사실에 입각 일일이 엄징할 것.
③ 횡포한 부호배는 엄징할 것.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배는 못된 버릇 따위를 징계할 것.
⑤ 노비문서는 소각할 것.
⑥ 칠반천인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서 패랭이를 벗길 것.
⑦ 청춘과부는 개가를 허할 것.
⑧ 무명잡세는 시행하지 말 것.
⑨ 관리채용은 지체와 문벌을 타파하여 고르게 인재를 등용할 것.
⑩ 왜와 밀통한 자는 엄징할 것.
⑪ 공사채를 막론하고 모든 부채는 갚지 말 것.
⑫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分作= 서로 나누어서 농사지음)할 것. (앞의 책. p222 의역 인용)
 
현재 시각으로 보아도 폐정개혁 12개 조항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러니 당시 시각에선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민과 관이 협력해 정치를 펼친다고 한다. 민주주의다. 나쁜 사람 징계는 기본이고, 신분 해방을 앞세웠다. 부채와 토지 분작은 초기 공동체 사회에 잇닿아 있다. 과부 개가는 어떠한가?
 
홍계훈이 대포를 설치했음직한 곳에 자리한 녹두관. 이곳에선 성안이 한 눈에 잡힌다.
▲ 완산칠봉 녹두관 홍계훈이 대포를 설치했음직한 곳에 자리한 녹두관. 이곳에선 성안이 한 눈에 잡힌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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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개 조항 중 지금까지 제대로 시행 중인 건 과연 몇이나 될까? 지금에서도 곱씹어 봐야 할 항목은 없는가? 12개 조항은 봉건사회를 근본에서 혁파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어떤 길을 갔는가? 저런 항목을 얻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하는가를 새삼 생각한다.

태그:#완산칠봉전투, #전주화약, #청일전쟁, #전주콩나물국밥, #전주비빔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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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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