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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장님'도 아니고 '사장'에게 직접 전화할 수 있다니... 기자라는 직업이 그렇게 기세등등했나. 그날 일은 나에게 충격이었다(자료사진).
'사장님'도 아니고 '사장'에게 직접 전화할 수 있다니... 기자라는 직업이 그렇게 기세등등했나. 그날 일은 나에게 충격이었다(자료사진). ⓒ 연합뉴스

1999년 5월 8일.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더러운 기분은 잊히지 않는다.

나는 당시 모 보험회사의 자동차 보상업무를 담당하는 2년차 신입사원이었다. 흔히들 보험회사 보상 직원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막상 그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보험업계의 3D업종이라고 불린다. 위험하고, 더럽고, 힘들다.

나는 대인업무를 담당했다. 사고조사를 위한 현장과 경찰서 방문, 사고 내용을 청취하기 위한 피보험자와 운전자 방문, 피해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합의를 하기 위한 병원 방문 등 뭐 하나 만만한 업무가 없었다. 게다가 모두가 안 좋은 상황에 처해 있는 당사자들이고 보면 더운 여름, 추운 겨울에 힘들게 돌아다녀도 수고한다는 말 한마디 들을 수 없다. 밖에서는 그렇게 시달리고, 안에서는 실적에 대한 압박까지 받으니 지금 생각해도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어려운 일이다.

당시는 아직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되기 전이었다. 토요일은 오전 근무가 원칙이었지만, 말이 오전이지 실제로는 점심 먹고 선배들 퇴근하는 시간까지 눈치 보다가 오후 4~5시 정도 퇴근하면 감사한 시절이었다. 더구나 그날은 어버이날을 맞아 어머니를 집으로 초대해서 아직 신혼인 아내가 저녁을 대접하기로 했다.

토요일 어버이날에 벌어진 황당 사건

음식에 서툰 아내도 도와야 하고 집안 정리도 해야 해서 선배들 퇴근하기만 조마조마하게 기다렸다. 다섯 시가 다 되어 가던 그 때 실장님이 나를 부르셨고, 그날의 힘들고도 더러운 업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일하던 조직은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를 담당하는 보상센터였고, 센터 밑으로 지역별 팀이 있으며, 그 팀들은 또 서너 개의 시군을 담당했다. 나는 수원 보상팀에 소속되어 있었다. 신입사원이 사무실에서 먼 구역을 담당하는 것이 관례로, 수원에서도 비교적 원거리 지역인 이천, 장호원 등이 내 구역이었다.

센터의 장이 '실장'으로, 실장이 신입사원을 직접 부른다는 것은 군대로 치면 대대장이 신병을 호출한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다. 실장이 나를 부른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중요한 고객의 부모님이 사고를 당하셨는데, 지역이 이천 쪽이다. 얼른 가서 원하는 병원으로 모셔다 드리고 일찍 퇴근해라."

이해가 안 갔다. 사고 피해자를 병원으로 태워다 주는 것은 보험회사의 일이 아니며, 그 때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또한 그 당시(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아마 대동소이하리라 생각된다)만 해도 사고가 나면 어떻게들 알고 달려오는지 견인차와 구급차가 몰려와서 아무렇지도 않은 피해자들을 무조건 자기 병원으로 앞다투어 싣고 가곤 했다. 당연히 병원으로 가는 교통편이 없을 리 만무했다.

여러 상황을 볼 때,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 다친 게 틀림 없었으나, 내 입장에서 실장님께 상세한 상황을 물어볼 '짬밥'은 안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벌써 몇신데 일 마치고 일찍 들어가라니...

출발하려는데 그 지역을 담당하는 대물 담당 직원도 나와 동행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 직원도 나와 비슷한 신입사원이었다. 서로의 신세를 한탄하며 슬쩍 물어보았다.

"피해자가 누구래?"
"몰라. 기자라나 뭐라나."

그랬구나. 기자였구나. 당시는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였고, 우리는 우선 수원에서 이천으로 무작정 달렸다. 가는 도중 팀장과 실장이 수시로 전화를 하며 우리의 위치를 파악했다. 우리는 우리대로 정확한 사고 장소와 피해자의 현위치를 물으며 운행하였다. 언제 귀가하느냐는 아내의 전화도 수시로 걸려왔다. 그렇게 계속 확인하며 달리다 다다른 곳은.... 이런,행정구역상 충청북도 충주였다.

내 관할구역이 아니었다. 우리 팀, 우리 센터 관할구역이 아니었던 거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관할이 아니니 그냥 돌아가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이왕 왔으니 얼른 근처 병원으로 태워다 주고 어머니가 기다리시는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노부부의 너무도 멀쩡하고 당당한 모습을 본 순간 울컥했다. 부모를 위하는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그렇게 걱정이 되면 본인이 모시러 오든가.

욕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나름 친절하게 많이 편찮으신지, 근처 병원으로 곧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어처구니 없었다. 서울에 있는 'OOOO병원'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잘 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물었지만, 아까 그 병원을 얘기하며 "우리 아들이 걱정하지 말라고, 보험회사에서 다 알아서 해줄 테니 가는 도중에 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보험사 직원한테 다 요구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전화로 상황 보고를 했다. 친절히 모셔다 드리고, 도착하면 상황 보고 하라는 안 들으니만 못한 지시가 내려왔다.

화나고 짜증나고, 우울한 기분으로 다시 서울로 향했다. 가는 도중 우리 둘 다 아무 얘기도 안 하고, 라디오도 틀지 않았다. 사고 차량은 이미 견인된 후라, 대물 담당 직원은 파손 상태를 구경도 못 했으니 괜히 헛고생이었다.

뒤에 앉은 부부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눈치 챘는지 대화가 없었다. 기름도 넣고 톨게이트도 여러 번 지났지만 당연히 비용은 모두 내가 부담했다. 날은 이미 저물었고 틈틈이 집으로 했던 전화도 이제는 민망해서, 어머니 먼저 저녁 드시라고 한 지 오래였다.

기자의 대단한 위세

서울에 있는 대형 종합병원에 도착했다. 도대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환자를 종합병원에서 받아주기나 할까. '아예 접수도 못 하고 쫓겨나 버려라!' '아니 그러거나 말거나 입구에 내려주고 나는 바로 차 돌려버려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병원으로 진입하는데, 그 지역을 담당하는 보상팀의 선임과장이 현관 로비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렇게 의전에 철저한 걸 보니 기자가 대단하긴 한가 보다 했는데, 양복 차림의 젊은 남자가 뒤이어 나타났다. 그가 바로 문제의 그 기자였다. 기자의 부모님은 선임과장이 상급 병실을 예약해 두었다는 말과 함께 병원 직원의 안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그 기자의 제안으로 병원 내 찻집에서 커피를 한 잔씩 하기로 했다. 물론 찻값은 우리가 지불했다. 거기서 기자의 명함을 받았다.

'OO방송 OOO기자.'

"부모님이 사고를 당했다는데, 서울도 아니고 답답하더라구요. 그래서 OO화재 사장한테 전화를 했지. 그랬더니 자동차담당 본부장을 연결 시켜 주대요. 하여간 무사히 오셔서 다행이네요."

알고 보니 그 기자는 한 정부 산하기관에서 손해보험을 담당하는 기자였다. 그 후로 기자가 가진 권력을 느껴볼 기회(?)가 몇 번 더 있었지만, 그 당시로서는 그날의 일이 이만저만한 충격이 아니었다. 얼핏 봐도 많은 나이도 아니었는데, '사장님'도 아니고 '사장'에게 직접 전화를 하고 본인이 원하는 종합병원 특실을 주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예약이 가능한 직업.

'상급병실 사용에 대한 차액은 걱정하지 마시라'는 선임과장의 얘기까지 듣고서야 기자는 일어섰고, 우리도 집으로 향했다. 시간은 이미 늦은 밤. 어머니는 아내와 둘이 식사를 하시고 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우리는 다시 쓸쓸히 수원으로 차를 몰았다.

나는 그 기자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한다. 가끔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그 내부조직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부서를 옮겨가며 승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언론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방송사 기자들이 파업하는 걸 몇 차례 본 적 있으나, 그 기자는 나름대로 승승장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것이다. 본인의 지위를 이용한 월권을 당연한 권리라 여겼는지, 부모님에 대한 걱정으로 그 정도 위세는 부려도 된다고 여겼는지는 모르겠으나, 본인 한 명의 요구로 도대체 몇 명이 어버이날인 주말을 망쳤는지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이라면 그의 승승장구가 이해가 된다. 서민의 입을 대변하고 불의를 바로잡아야 하는 기자들에게 '언론탄압'이 가해졌을 때, 그가 어떤 자세를 취했을지 대충 짐작이 간다.

나는 사실 두렵다. 그 기자가 이 글을 보고 내게 불이익을 줄까 봐.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당시의 더러운 기분이 커지는 나처럼 그의 권력이 커졌을까 봐. 커진 권력만큼 더욱 더 부당한 요구와 지시로 남들을 괴롭힐까 봐. 이런 걱정을 하게 만드는 이 나라가, 사회가 두렵다.

세월이 흘러도 바로잡아지지 않는 많은 것, 책임지는 이가 없는 우리 사회지도층이 더럽게 느껴지는 냄새 나는 여름이다.


#자동차보상#기자#더러운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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