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되지 못한' 노후를 맞이한 우리나라 노인은 절반 가까이가 빈곤층이다. 가난은 질병과 외로움 등 노년의 고통을 증폭시킨다. 불편한 몸으로 남의 밭일을 하는 농촌 노인이나 지하철택배로 생계를 유지하는 도시 노인 등 가난한 노년은 죽을 때까지 '밥벌이의 구차함'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사설 요양병원에서 학대 받는 치매노인, 골방에서 혼자 숨을 거두는 고독사 등 비극적 현장도 소리 없이 늘고 있다. <단비뉴스>는 청년의 '가족'이자 '내일'인 노인의 삶에 주목했다. 그들의 현실을 생생히 드러내면서 '노인복지 후진국'을 벗어나기 위한 과제를 점검하고, 독자와 함께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 기자말
전형적인 농촌 마을인 경북 영주시 이산면 운문1리. 마을 중간쯤에 있는 작고 낡은 기와집에는 제대로 된 담이 없어 마당에 쌓인 연탄재 따위가 길에서 훤히 보인다. 좁은 마루 위엔 갖가지 농기구와 포대자루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그 틈에서 이영숙(가명·84·여)씨는 성치 않은 다리를 주물러가며 쪽파를 다듬고 있었다.
"내가 행복할 때가 어딨노. 만날 일만 하고 사는데. 나한테는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자다가 죽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평생 남의 땅을 소작하며 사남매를 키워 출가시킨 이씨는 혼자 사는 요즘도 품앗이로 얻은 콩과 고추를 팔아 생계를 해결한다.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잘사는 집'이라는 중매쟁이 말에 넘어가 경북 안동에서 영주로 시집왔는데 사정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 하나, 딸 셋을 낳고 그의 나이 36살일 때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홀로 네 아이를 데리고 남의 집과 밭을 떠돌았다. 운문1리에서 다섯 번 이사했지만 한 번도 내 집을 갖지 못했다.
아프고 곤궁한 삶, 가까이 있는 제초제에 눈길이 소작농 인생은 대물림됐다. 어릴 때부터 농사짓고 소여물을 먹여야 했던 장남(65)은 초등학교 졸업으로 공부를 접었다. 장남은 사과 농사로 먹고 살았는데 자녀들 결혼 비용 때문에 밭을 팔고 지금은 근처 마을에서 땅을 빌려 밭농사를 짓는다. 다른 지역에 사는 세 딸도 공장에 다니며 근근이 밥을 먹고 사는 정도다.
넉넉지 않은 자식들, 갈수록 쇠약해지는 몸은 이씨의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 몇 해 전, 다리가 아파 꼼짝 못할 때가 있었다. 화장실에도 혼자 못가는 이씨를 위해 직장에 다니는 큰 며느리가 도우미를 불러 집안일을 돌보게 해주었다. 자식들에게 짐만 된다는 생각에 이씨는 조용히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몸 불편하게 사느니 죽는 게 편치. 그래서 죽으려 준비까지 다 했지. 농약도 찾아놓고."단 5cc만 마셔도 2주 이내에 90%가 사망한다는 강력 제초제. 하지만 막상 그걸 손에 든 순간 자식들 얼굴이 아른거렸다고 한다. 부모가 자살하면 자식의 앞길도 순탄치 않다는 얘기도 떠올랐다. 덜컥 겁이 났다. 혹여 자식, 손자들에게까지 불행이 이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농약을 치웠다. 그 후 딸이 지어다 준 한약 등의 덕으로 절룩거리면서라도 걸어 다닐 수 있게 됐지만 그에게 여생의 의미는 크지 않다. 잠들 때마다 '내일 아침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평생 농사를 지었지만 쌓이는 건 빚 "무슨 월급쟁이도 아니고 고정 수입이 어딨노."운문1리 노인회장 안길조(71)씨는 종자값 치르고 트랙터 등 농기구를 빌리는 비용을 대느라 매년 빚을 진다고 한탄했다. 농협에서 돈을 빌려 농사를 짓는데 가을 수확 후에 빚 갚고 나면 남는 게 없단다. 충북 제천시 청풍면 도화리에 사는 이미자(73·여)씨도 남편과 함께 9917㎡(3000평)의 밭에서 콩과 팥, 고추 농사를 짓지만 비료와 농약값 등을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손해나 안보면 다행이란다.
그래도 안씨나 이씨는 자기 땅을 경작하니 좀 나은 편이다. 농촌 노인 중 상당수는 자식 키우느라 논밭을 다 팔고 외지인이 소유한 농지를 빌려 소작을 한다. 기껏 한 해 농사를 지어도 소작료 떼고 식량으로 쓰고 조금 남는 것들을 시장에 팔아봐야 쓸 돈이 별로 없다.
그래서 농촌 노인들 중에는 정부가 매달 지급하는 기초노령연금이 거의 생활비의 전부인 경우가 많다. 단독가구기준 9만6800원으로 생계를 꾸리는 것이다. 운문1리는 주민 209명 중 65세 이상 노인이 52명인데 이 중 90% 이상이 노령연금 외 뚜렷한 수입이 없다. 가끔 품앗이를 다닌다는 운문1리의 이원교(75·여)씨는 "노인연금이 없으면 한달 5만원 정도 들어가는 약값을 낼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운문1리 노인 중에는 자녀들로부터 정기적으로 용돈을 받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농촌에서 어렵게 자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자녀들도 사정이 좋지 않아 도움을 기대하지 못하는 집들이 더 많다. 이원교씨의 아들과 딸은 40대인데, 트럭을 타고 영주 시내를 돌며 과일을 판다. 특히 딸 내외는 사정이 좋지 않아 이씨 집에서 더부살이 중이다. 운문1리 노인의 자녀들 중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만 나온 사람도 꽤 많다. 그래선지 일용직으로 일하며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삶을 사는 자식들이 흔하다. 노인들은 "저 살기 바빠 우리는 들여다보지 못한다"고 입을 모은다.
농촌노인 자살률은 도시의 2배 농촌 노인들의 가난은 지난 20년간 도시근로자 소득이 6.1배 증가한 데 반해 농가소득이 3.8배 증가에 그쳤다는 통계로 일부 설명이 된다. 나라 경제는 전체적으로 성장했지만 농산물시장개방 등 농업을 희생시키는 경제정책 등으로 도농격차가 갈수록 커지면서 농촌의 빈곤은 오히려 심해진 것이다. 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11년 시장소득 기준 농촌의 절대빈곤율(한달소득이 최저생계비 이하인 가구비율)은 39%로, 도시근로자가구(2인 이상) 절대빈곤율 4.4%의 약 9배에 달했다. 농촌 가구 중에도 이렇다 할 소득원이 없는 노인 가구는 거의 대다수가 빈곤층이라고 볼 수 있다.
가난하고 외롭고 아픈 농촌 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은 실제로 많이 일어난다. 2010년 기준,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은 10만명당 81.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았다. 여기에 농촌 노인 자살률은 도시보다 두 배 더 높다. 농촌 비율이 높은 충남의 노인자살률이 10만명당 123.2명으로 전국 16개 시도 중 1위다. 젊은 인구가 많은 대도시 서울과 울산의 자살률은 각각 65.1명, 64.3명으로 비교적 낮았다.
"자식에게 짐이 되느니 정신 멀쩡할 때 약 먹고 죽자고 생각하는 노인들이 많아요. 한해 많은 농민들이 약 먹고 죽는데, 노인은 그 중에서 더 소외된 사람들이고요."전국농민회총연맹 영주시농민회 장성두 사무국장의 말이다. 운문1리에서 농민주유소를 운영하는 강승국(50)씨는 "농촌에서 노인이 죽으면 겉으로 보이는 사인은 노환이나 돌연사지만 알고 보면 자살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고장난 몸, 커지는 고통... 하지만 너무 먼 병원
"몸이 불편해서 잘 움직이지도 못해."운문1리의 김돌암(79·여)씨는 젊은 시절부터 다리와 허리가 아파 자주 병원 신세를 지는 남편 안부엽(77)씨와 함께 산다. 방 하나, 작은 거실과 부엌이 있는 집에서 남편 안씨는 거의 하루 종일 방에 누워 시간을 보낸다.
김씨도 다리가 불편해져 농사를 짓지 않은 게 4년째다. 2970㎡(900평)의 논과 198㎡(60여 평)의 밭이 있지만 일용직 농사꾼들에게 일을 맡기고 있다. 자기 땅에 농사를 지으니 먹고 사는 걱정은 크지 않지만 성치 못한 몸이 제일 큰 고통이다.
안부엽씨는 이틀에 한번 꼴로 병원을 찾는다. 집에선 내내 누워있지만 병원에 가려면 무리를 해서라도 버스와 택시를 타야 한다. 영주 시내까지 가는 데 40분 가량 걸리는데 직행 버스가 없어 다른 버스와 택시를 갈아탄다. 병원에 자주 가야 하니 택시비가 꽤 부담이 된다. 간단한 물리치료를 받고 약을 지어 오지만 별 차도가 없다는 것이 더욱 속상하다.
충북 제천시 청풍면 도화리에 사는 최병인(78)씨는 13년 전 척추수술을 한 뒤 허리를 거의 쓰지 못한다. 병원에 자주 다녀야 하는데 역시 오가는 길이 고통이다. 병원이 있는 제천시 중앙동으로 가는 길은 1시간이면 되지만 버스가 하루 3회만 운행하기 때문에 아침 7시30분 첫 차를 타고 나가도 오후 1시 30분이 되어야 집에 올 수 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몸도 불편해 참고 참았다가 아주 많이 아플 때만 왕복 5만 원짜리 콜택시를 이용해 병원에 간다. 최씨는 "약을 먹어도 잘 낫지를 않는다"며 "아파도 참고 사는 게 생활의 일부"라고 한탄했다.
119 구급차 출동 기다리는 데만 1시간 영주와 제천 등 농촌 마을 노인들의 공통점은 수십 년 농사를 지으며 허리, 무릎 등에 하나 이상의 만성질환이 있다는 것이다. 아파도 치료비 등의 부담 때문에 어지간하면 참는다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고통은 병원이 너무 멀다는 것이다. 운문1리 노인들의 경우 평균적으로 일 주일 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병원치료가 필요한데, 교통비가 많이 들거나 오가기가 불편해서 치료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너무 먼 병원'의 문제는 1분 1초를 다투는 응급상황에서 더 심각해진다. 지난해 제천 도화리의 한 노인이 한밤중에 복통을 일으켜 119구조대를 불렀지만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어렵게 제천 시내 병원으로 갔지만 상태가 심각해 강원도 원주의 종합병원으로 다시 이송됐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한다. 도화리의 이미자씨는 "가까이에 병원이 있어 간단한 치료라도 빨리 받을 수 있었다면 그런 위험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농촌 마을 부근에는 보건소가 있어 1차 진료기관 역할을 하지만 노인들은 치료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영주 운문1리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이산면 보건지소에는 한방·양방 공중보건의 2명이 있으며 내분비계, 당뇨, 관절염, 위장질환, 감기 등 기초적인 검사 및 치료와 침 시술이 가능하다. 또 진료비는 일반 병원에 비해 훨씬 싸다. 하지만 보건소로 가는 길 역시 버스 운행이 뜸해 접근성이 낮은데다 정작 노인들에게 필요한 치료는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전국 보건소, 보건지소는 예방 차원의 일차보건의료를 주로 담당하기 때문에 관절염, 디스크 등 만성질환이나 중병을 앓는 노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영주시 이산면보건지소 박준상 공중보건의는 "노인들에게 중증질환을 앓고 있다면 2, 3차 병원에 가길 권한다"고 말했다. 거동이 어려운 노인, 기초생활수급자를 대상으로 하는 방문건강관리사업도 하고 있지만 혈압, 당뇨, 콜레스테롤 체크 등 기초적인 서비스에 그친다. 이산면보건지소 김미희 행정 담당자는 "'음식 싱겁게 먹어라', '앉아 있지 말고 운동하라'는 지침을 내려주는 정도"라고 말했다. 그래서 보건소에 대한 노인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제천 도화리 정순헌(68․여)씨는 "거기 가서 뭐하냐"고 쏘아붙였다.
"에이, 혈압약이나 감기약만 타먹지. 노인네들이 자다가 아프거나, 밭에서 일하다가 아파서 남의 차 힘들게 얻어 타고 가도 의사는 없어. 간호사 시켜서 약이나 처방해 주라고 말하고. 걸핏하면 강의하러 가서 없고, 숙소에 있다가 뛰어나와서 보기나 하고. 촌 노인네들은 다 불만이야."
농어촌의 의료소외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지만 최근 문을 닫는 병의원이 더 늘고 있어 갈수록 상황이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 지난 한 해만 해도 폐업한 소규모 의원이 전국적으로 1625곳이었고 신설 병의원은 대도시로 몰렸다. 영주시의 경우 각각 2개, 1개의 병의원·약국이 있는 단산면과 부석면, 봉현면을 제외하고 평은면, 문수면, 장수면, 안정면은 모두 병의원·약국이 없다. 적게는 2097명에서 많게는 3512명이 살고 있는 마을들이 말 그대로 '의료사각지대'다. 아프고 외로운 농촌 노인들의 설움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