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물머리의 하루는 참 길다. 일지를 쓰려고 사진을 옮기다가 '어? 이건 어제 사진인데 왜 오늘 날짜로 돼 있지?' 싶어 자세히 보니, 오늘 찍은 사진이 맞다. 새삼 놀라워하며 사진을 다시 본다. 두물머리와 두물머리 사람들 덕분에 나는 오늘 아주 길고 좋은 하루를 보냈구나. 고맙습니다.
지난밤 늦도록 깨어있었던 덕분에 여섯시 기상시간에 눈도 못 뜨고 꿈틀대고 있었다. 못 일어나는 사람이 나뿐만 아니었는지 누군가 사람들을 깨우기 위한 장난을 친다. "국토부에서 왔습니다!" 장난인 걸 알면서도 정신이 번쩍 든다. 웃음 섞어 "나가세요!" 외치고, 느릿느릿 텐트 문을 연다. 눈은 아직도 빵빵하게 부어있어 떠지지 않는다.
눈을 반쯤은 감고, 반쯤은 뜨고 태극권을 한다. 호랑이처럼 걸어 보라는데 몸이 비틀거린다. 혹시 작은 풀벌레를 밟게 될까 조심스레 걷는 호랑이가 된 상상을 하며 키득거리니, 그제야 서서히 눈이 떠진다. 부당한 권력에 맞서 온몸으로 말하던 풀밭의 땐쓰홀을 지나 미사터까지 아침 산책을 한다. 같은 길인데 사람을 만나러 갈 때는 그렇게 조바심나고 두렵더니, 강을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레고 편안하다. 숨길이 트인다. 강에서는 두물머리가 아침 햇살을 만나고 새들을 만나고 우리,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여기가 두물머리구나, 내가 두물머리구나를 확인하면서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 이 평화와 고요가 태풍의 눈 같은 것이라도,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는 행운에 감사하며, 하루라도 더 이렇게 행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어젯밤 무더위를 시원한 팥빙수로 날려 준 산돌학교 친구들이 인사를 했다. 오전에 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열 시쯤, 사람들과 취재진을 몰고 온 문재인 후보는 두물머리가 1970년대 유기농의 발원지이며 세계유기농대회까지 유치한 뜻 깊은 장소이기 때문에 꼭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전거 도로나 잔디 광장이 아닌 유기농체험농장을 안고 가는 것이 4대강사업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했다. 근본적인 대책은 물을 흐르게 하는 것이다.
두물머리의 밥, 밥, 밥...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들
희한하게도 두물머리의 먹을거리는 모두 맛있다. 모든 반찬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하나씩 다 얹었다. 심지어 두 가지 맛의 죽을 반드시, 꼭, 먹어야 한다며 짬짜면의 위용을 능가하는 호닭죽도 만들어 낸다. 뒤에 있던 아주머니가 말한다. "아유, 호텔 조식보다 좋다." 하하하. 다른 사람들은 단식투쟁하는데 우리는 밥투쟁 한다. 농사짓자고 투쟁하는 사람들이니, 그저 좋은 음식 맛있게 배부르게 잘 먹고, 그 고마움을 새기고 또 새긴다.
아침의 강을 바라보며 밥을 먹는다. 강물이 흐르는 속도로 밥숟갈이 입에 들어간다. 강물이 흐르는 속도로 음식이 내 몸을 지나, 강물이 흐르는 속도로 다시 내 몸을 나서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겠지. 그러니 '나는 두물머리입니다'라는 밭전위원들의 고백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두물머리를 알게 되어서, 여기에 올 수 있었던 몸과 시간 덕분에, 활짝 열린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을 초대해 웃고 나누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렇게 좋은 걸 배웠다.
낮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우리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다' 정신을 실천한다. 안내표지를 꾸미고 청소를 하고 풀을 벤다. 내일 당장 중장비가 밀고 들어올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을 법도 한데, 다들 너무나 즐겁게 지금 우리가 있는 공간을 가꾸고 있다. 이렇게 날마다 정리하고 가다듬어진 두물머리는 지금 작은 생태 캠프장 같다. 날마다 지나다녀 외울 것도 없는 단조로운 길이지만, 하루를 더 지낼수록 구석구석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두막 주변에 염소들이 있는 풍경이랄지, 눈부신 연둣빛 미로를 지나면 나오는 생태화장실, 일일이 손으로 그리고 쓴 이런저런 팻말과 표지판들.
우리는 작고 힘 없지만 아마도 지지 않을 것이다. 그저 이렇게 하루하루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있을 뿐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강하다.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바꾸려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 자신의 인생밖에 살 수 없고, 적어도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이렇게 온몸으로 고민한다면, 이렇게 틔운 싹이라면, 언제 어디에서도 분명 아름다운 꽃을 피워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피워낸 꽃은 비에도 바람에도 지지 않고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겠지.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내일 두물머리에 중장비가 들어와 땅을 헤집고 이 땅에 뿌리 내린 사람들을 뽑아 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지지 않는다.
두물머리의 재녹지화를 위해 다시 모이고, 4대강 사업 복원 본부를 만들고, 언제 어디서라도 땅과 생명과 사람을 생각하며 씨앗을 뿌릴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지 않는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정성들여 사과나무를 심는 두물머리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스피노자는 지구가 멸망해도 지지 않을 엄청 쎈 사람이었구나.'
투쟁도 농사도 웃으면서!
초코파이 봉지를 신나게 비비고 흔드는 친구들이 있어 대체 뭘 하나 유심히 봤다. 초코빵을 뭉쳐 똥 모양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는 누가 더 진짜 같은 초코똥빵을 만드는지 심사위원이 돼 달란다. 봉지를 뜯고 보니 정말 입이 떡 벌어지는 모양새다. 다 함께 또 깔깔거리며 친구들의 재능에 감탄하고 똥 모양의 초코빵을 나눠 먹었다. 똥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결코 웃을 수 없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땅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내가 먹고 싼 것, 내가 뿌린 것과 거둔 것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겠지. 농부에게 똥은 소중한 거름이고, 두물머리에서 똥은 냄새나고 더러워 외면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우리에게서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올 나의 일부이다.
오늘 일정의 마지막 순서는 '팔당 사람들'이라는 영화를 다 함께 보는 것이었다. 지난 3년간의 두물머리가 담긴 다큐멘터리 영상이다. 찍어 둔 영상 길이가 테이프 150개 이상, 만 분의 시간이 넘는다고 했다. 그 가운데서 뽑아낸 60분의 시간에는 나쁜 건 정부와 정책 입안자들이니 면사무소 직원한테 화내지 않겠다는 병인 아저씨가 계셨고, 두물머리에서 나가라는 말을 하는 자들에게 짐짓 무섭게 화를 내다가도 강아지가 다가오자 인사를 건네는 태환아저씨가 계셨고, 술병 들고서 신라의 달밤을 기가 막히게 부르는 규섭 아저씨, 이른 아침 소주로 목을 축이다 만난 카메라를 향해 비밀로 해 달라는 요왕 아저씨와 인환 아저씨가 계셨다.
카메라에 미처 다 담기지 않았거나, 차마 60분 영상에 담지 못한 장면들, 눈물과 이야기도 많이 있겠지만, 두물머리는 지금 여기서도, 화면에서도 웃고 있다. 이 웃음의 조건들은 무엇일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웃고 있을까? 생각해봐도 잘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서로를 웃게 하는 우리 모두에게 무척 고맙다. 이 멋진 사람들이 좋아서, 이 사람들을 이렇게 멋지게 만들어 준 두물머리가 좋아서, 오늘도 이렇게 귀뚜라미 우는 강가에서 밤을 맞는다.
일요일에는 두물머리 사람들이 망루에 올라간다. 놀러. 두물머리에 망루가 있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절절한 투쟁과 저항의 상징인 망루에, 놀러 올라간다 하니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바깥의 모든 통념을 경쾌하고 발랄하게 뒤집는 힘. 지속가능성의 조건은 웃음이라는 듯이 또 한바탕 신나는 '땐쓰파티'를 기획하는 이 사람들. 그래요, 웃고 놀고 또 열심히 일해 봅시다. 모두들 어서 두물머리로 오시길. 그래서 돌아오는 일요일에는 다 함께 이 포실포실하고 좋은 흙에 발을 비비며 사는 것처럼 살아 보는 영광을 누리시길!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http://cafe.daum.net/6-2nong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