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정리해고는 막지 못했고, 싸움은 끝났다. 70여 일의 쌍용차 노조의 투쟁은 결국 자본과 권력 앞에 무기력했다. 아니, 무기력했다기 보다는 자본과 권력의 철저한 힘의 논리 앞에 그 투쟁은 무참히 짓밟혔다. 한 쪽의 희생만 강요당한 채 '상생'은 그렇게 허망하게 날아갔다.
자본과 권력은 책임을 두고 곧 또다시 노조에 대한 2차 탄압에 들어갈 것이다. 그들이 '불법'이라 말하는 파업을 주도한 노조 지도부 검거와 구속... 쌍용차 노동자들을 도왔던 '외부세력'(?)도 같은 수순을 밟을 것이다. 쌍용차 투쟁을 통해 바라본 한국사회의 약자에 대한 배려의 부재. 참 허탈하다. "해고는 살인이다", "함께 살자", "공적자금 투입하라"를 외치며 70일이 넘는 시간동안 자신들의 몸을 가두면서까지 쌍차 노동자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희망퇴직 52 : 무급휴직 48'. 노·사 양측이 합의했던 사안이라 지금 와 가타부타할 그것은 아니지만 2009년 여름, 쌍용차 투쟁은 한국사회 자본과 주류권력이 노동자들을 여전히 '기계 부품'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사측은, 생산성도 떨어지고 회사 경영이 어려우니 정리해고는 불가피하다고 했다.
그러나 노조는 달랐다. 정리해고만은 막고 인건비 절감과 순환휴직으로 일자리를 나눠 '다 함께 사는 길'을 걷기를 원했다. 양측의 견해는 평행성을 달렸다. 노동자가 일부분 희생해야 한다는 사측 주장과, 정리해고만은 절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노조. 이 사이에서 약자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배려가 없으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 소통은 더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양측 견해의 골은 더 깊어져만 갔다.
생존권과 관련된 사안일 경우, 배려도 없고 소통조차 안되면 약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다. 쌍용차 노조 노동자들이 '옥쇄투쟁'을 한 이유다. 용산 철거민들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망루'에 올랐던 것 처럼 쌍용차 노동자들도 다 함께 살기 위해 그 위험한 '도장공장'을 택했다.
"우리가 인화성 물질로 가득찬 도장공장을 택한 이유는 그만큼 절박하다는 거다. 그러니 제발 죽이려 하지 말고 우리 이야기 좀 들어 달라". 도장공장은 쌍용차 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마지막 보루였다.
그러나 정부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이러한 바람을 외면한 채 공권력을 투입했다. 회사 정문과 파업 농성장 도장공장을 에워싼 경찰병력은 수천 명에 달했다. 공권력 투입은 양측 주장의 간극을 더욱 넓게 만들었고 몇 차례 시도된 교섭이 결렬되게 한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와중에 쌍용차 한 노조 간부의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함께 살기를 원했던 한 가장의 부인은 그렇게 슬픈 죽음을 택했다. 약자에 대한 일방적 희생 강요, 그녀의 죽음 앞에, 우리 사회 약자를 바라보는 저열한 인식 수준과 비겁함이 무참히 드러났다. 하지만 용산참사 때와 마찬가지로 정부는 사과조차 없었다.
이후 농성장에 진입하려는 경찰, 사측·용역업체 직원과 이를 막으려는 파업 노동자들의 물리적 충돌은 더욱 격화됐다. 노사 모두 볼트 새총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채 서로를 공격했다. 경찰은 발암물질이 들어간 최루액을 농성장과 시위대에 살포했고 폭동진압용 테이저건과 스펀지탄을 사용하기도 했다. 농성장 안 부상자는 속출했다. 그러나 사측과 권력은 전기와 식수를 끊고 의료진 출입조차 금지했다. 시민사회단체와 야당이 식수 반입과 의료진 출입을 요구하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긴급구제를 권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일 노사가 합의한 '52:48안'으로 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70여 일 동안 옥쇄투쟁을 하면서까지 쌍용차 노동자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가를... 한쪽에선, 노조의 집단 이기주의, 그리고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해 그에 편승한 불순한 외부세력의 정치투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처자식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안간힘을 쓴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몸부림을 이기주의라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본질적인 문제는 생존권이다. 쌍용차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그들의 생존권을 보장해 달라고 평택에 달려온 시민사회단체를 불순한 외부세력이라 한다면 우리 사회에 더이상 공생과 상생은 없다.
쌍용차 투쟁을 통해 다시 드러난 약자에 대한 일방적 희생 강요는 비단 평택 쌍용자동차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돌아보면 주변에 있는 우리 이웃과 내 부모, 내 형제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결국 쌍용차 노동자들이 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는 사용하고 싶으면 사용하고 쓸모 없으면 헌신짝 버리듯 내치는 고장난 자동차 부품이 아니다"가 아니였을까. 문제는 다시 생존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