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솔솔 불어오는 봄바람이 산뜻해서인지 퇴근길마저 즐거웠다. 모처럼 일찍 퇴근하여 한가한 저녁을 보내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전철에서 비몽사몽 하는데 문자 메시지가 왔다며 넓적다리에 찌릿하게 전율을 준다.
‘퇴근 때 할인점 갔다 오면 안될까.’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해서 전철에서 내려 바로 전화를 했다. 퇴근길에 귀찮지 않으냐며 반은 접대성 발언과 함께 투명 스카치테이프와 반투명테이프를 리필용으로 사달라는 주문이다.
점심 먹은 게 부실하여 배가 고프긴 했지만 하는 수 없이 매장으로 가 주문한 것을 샀다.
그런데 무슨 일이든 내 맘 같이 되는 것이 어디 있을까. 물건을 사러 가면 매장에 없거나- 실은 어디 있는지 못 찾음- 종류가 하도 많아 어떤 것을 사야 할지 난감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번에도 12.7mm 짜리 테이프라는 데 매장에 그런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12mm 아니면 18mm만 있을 뿐. 그래서 전화로 옥신각신 하기를 십여 분.
결국 12mm로 낙찰을 보고 매장을 나오는데 또 하나의 메시지가 찌릿하며 날아온다. '000크린랩 하나' 계산을 하려고 줄을 서 내 차례가 오려는데 날아온 메시지. 또 돌아서야 했다. 다시 들어가 찾고, 확인하고 나오기를 또 수 분. 배에서는 점점 아우성 소리가 커져만 간다.
이미 사방이 어둠에 잠긴 단지를 지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작은 아이가 줄넘기에 한창이다. 요즘 운동도 시킬 겸 줄넘기를 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역시 아이들이라 옆에서 지켜보면 횟수를 지키며 잘하다가도 지켜보지 않으면 또 대충 넘어가는 것이니 지켜볼 수밖에.
큰아이 역시 줄넘기하고 저녁을 먹어야 했기에 주린 배를 또 부여잡는다. 옷을 갈아입고 복도로 나와 작은 아이 줄넘기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다행이 큰아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온다. 그런 아이들을 지켜보며 이미 형광 불빛들로 촘촘해진 단지 내를 둘러본다. 또 하루가 그렇게 간 것이다.
줄넘기를 먼저 마친 작은 아이를 들여보내고, 큰 아이 하는 것을 마저 보는 것으로 오늘 있었던 일을 정리한다. 그리고 들어가니 작은 아이가 욕실에서 나오지 않아 큰 아이가 샤워 마치기까지 그렇게 또 삼 십여 분.
저녁시간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모든 면에 있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또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다.
결국, 아홉 시가 넘어서야 식탁머리에 앉았다. 그 때 이미 배는 등뼈 쪽으로 한참을 물러나 있다 못해 뱃가죽이 등에 붙어 있을 지경이었다. 막 밥을 뜨려는데 큰 아이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다가 그만 온전한 물 한 통을 방안에 떨어트려 온통 물 천지를 만들어 버리고 만다. 다행히 플라스틱이라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본 순간 그동안 참았던 화가 머리로 치솟았다.
“네가 서 너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아니고 이제 내년이면 중학교를 갈 애가 그런 조심성이 없으면 어떡하니”하는 그런 질책성 말이 거침없이 나온 것이다. 예전에도 무엇이든지 물건을 들 때면 밑을 바치고 들어야 한다고 누누이 얘기를 했건만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그것을 치우는데 또 십 여분. 아내가 치운다고 하지만 어찌 자리에만 앉아 있을 수 있을까. 의자를 치운다, 걸레를 가져온다, 하며 시간은 또 그렇게 갔다.
다시 식탁에 앉아 밥을 뜨려는데 아내가 한 소리 한다.
“당신 된장국 먹어요, 안 먹어요?”
이미 배가 고플 대로 고파 있는데 된장국은 당연히 줘야지. 꼭 그것을 물어봐야 하나 하는 생각에 또 뒷머리로 뭐가 욱하고 오른다.
"아니, 그걸 물어봐야 하나. 먹지 그럼 안 먹을까"하는 말이 결국 나오고 만다. 순간 찬물을 끼얹듯이 정적이 감도는 집안 분위기.
다른 주전부리 안하고 밥만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밥 못 먹는 것 만큼 대단한 스트레스도 없다. 나중에 아내가 슬며시 아이들에게 하는 말.
“네 아빠는 밥 안 주면 꼭 저렇게 화 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