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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게 먹는 밥은 더 맛나다.
ⓒ 염종호
솔솔 불어오는 봄바람이 산뜻해서인지 퇴근길마저 즐거웠다. 모처럼 일찍 퇴근하여 한가한 저녁을 보내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전철에서 비몽사몽 하는데 문자 메시지가 왔다며 넓적다리에 찌릿하게 전율을 준다.

‘퇴근 때 할인점 갔다 오면 안될까.’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해서 전철에서 내려 바로 전화를 했다. 퇴근길에 귀찮지 않으냐며 반은 접대성 발언과 함께 투명 스카치테이프와 반투명테이프를 리필용으로 사달라는 주문이다.

점심 먹은 게 부실하여 배가 고프긴 했지만 하는 수 없이 매장으로 가 주문한 것을 샀다.

그런데 무슨 일이든 내 맘 같이 되는 것이 어디 있을까. 물건을 사러 가면 매장에 없거나- 실은 어디 있는지 못 찾음- 종류가 하도 많아 어떤 것을 사야 할지 난감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번에도 12.7mm 짜리 테이프라는 데 매장에 그런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12mm 아니면 18mm만 있을 뿐. 그래서 전화로 옥신각신 하기를 십여 분.

결국 12mm로 낙찰을 보고 매장을 나오는데 또 하나의 메시지가 찌릿하며 날아온다. '000크린랩 하나' 계산을 하려고 줄을 서 내 차례가 오려는데 날아온 메시지. 또 돌아서야 했다. 다시 들어가 찾고, 확인하고 나오기를 또 수 분. 배에서는 점점 아우성 소리가 커져만 간다.

이미 사방이 어둠에 잠긴 단지를 지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작은 아이가 줄넘기에 한창이다. 요즘 운동도 시킬 겸 줄넘기를 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역시 아이들이라 옆에서 지켜보면 횟수를 지키며 잘하다가도 지켜보지 않으면 또 대충 넘어가는 것이니 지켜볼 수밖에.

큰아이 역시 줄넘기하고 저녁을 먹어야 했기에 주린 배를 또 부여잡는다. 옷을 갈아입고 복도로 나와 작은 아이 줄넘기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다행이 큰아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온다. 그런 아이들을 지켜보며 이미 형광 불빛들로 촘촘해진 단지 내를 둘러본다. 또 하루가 그렇게 간 것이다.

줄넘기를 먼저 마친 작은 아이를 들여보내고, 큰 아이 하는 것을 마저 보는 것으로 오늘 있었던 일을 정리한다. 그리고 들어가니 작은 아이가 욕실에서 나오지 않아 큰 아이가 샤워 마치기까지 그렇게 또 삼 십여 분.

저녁시간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모든 면에 있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또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다.

결국, 아홉 시가 넘어서야 식탁머리에 앉았다. 그 때 이미 배는 등뼈 쪽으로 한참을 물러나 있다 못해 뱃가죽이 등에 붙어 있을 지경이었다. 막 밥을 뜨려는데 큰 아이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다가 그만 온전한 물 한 통을 방안에 떨어트려 온통 물 천지를 만들어 버리고 만다. 다행히 플라스틱이라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본 순간 그동안 참았던 화가 머리로 치솟았다.

“네가 서 너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아니고 이제 내년이면 중학교를 갈 애가 그런 조심성이 없으면 어떡하니”하는 그런 질책성 말이 거침없이 나온 것이다. 예전에도 무엇이든지 물건을 들 때면 밑을 바치고 들어야 한다고 누누이 얘기를 했건만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그것을 치우는데 또 십 여분. 아내가 치운다고 하지만 어찌 자리에만 앉아 있을 수 있을까. 의자를 치운다, 걸레를 가져온다, 하며 시간은 또 그렇게 갔다.

다시 식탁에 앉아 밥을 뜨려는데 아내가 한 소리 한다.

“당신 된장국 먹어요, 안 먹어요?”

이미 배가 고플 대로 고파 있는데 된장국은 당연히 줘야지. 꼭 그것을 물어봐야 하나 하는 생각에 또 뒷머리로 뭐가 욱하고 오른다.

"아니, 그걸 물어봐야 하나. 먹지 그럼 안 먹을까"하는 말이 결국 나오고 만다. 순간 찬물을 끼얹듯이 정적이 감도는 집안 분위기.

다른 주전부리 안하고 밥만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밥 못 먹는 것 만큼 대단한 스트레스도 없다. 나중에 아내가 슬며시 아이들에게 하는 말.

“네 아빠는 밥 안 주면 꼭 저렇게 화 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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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브리태니커회사 콘텐츠개발본부 멀티미디어 팀장으로 근무했으며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스마트스튜디오 사진, 동영상 촬영/편집 PD로 근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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