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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장 찬 이들의 발걸음이 무안군(현재 신안군) 자은면 송산리 두모동으로 향했다. 반가운 손님이 온줄 알고 삽짝 안에서 마당 안을 뛰어다니며 '컹컹'하며 짖던 개가 불청객의 죽창을 보고는 이내 꼬랑지를 내렸다.

"누구랑께요"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여성이 불청객을 보더니 바가지를 떨어뜨렸다. 바가지가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방문이 열렸다. 잠시 후 자은국민학교(초등학교) 선생인 김희철과 그의 아내는 뒷결박을 당해 남진창고로 연행되었다.

이빨로 남편 뒷결박 푼 아내
 
자은면 우익들이 수장된 남진창고 앞바다. 자은국민학교(초등학교) 선생이었던 김희철은 이곳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 남진창고 앞바다 자은면 우익들이 수장된 남진창고 앞바다. 자은국민학교(초등학교) 선생이었던 김희철은 이곳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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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걱'하며 열린 창고 안에는 자은면 유지들이 대부분 와 있는지 "김 선생 왔는가?"하며 인사치레를 했다. 그렇다고 무슨 반가운 자리도 아니고 인사가 길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초조한 눈빛으로 눈인사만 나눌 뿐이었다.

"종남이 아버지가 이럴 줄은 몰랐네"라고 한 이는 자은면 청년단 단장을 하고 있는 이였다. 옆에 있는 이가 "완장이 죄지, 사람이 뭔 죄가 있당가"라며 선문답을 했다.
여기서 종남이란 자은지서 앞에서 있었던 1948년 3.1절 기념시위 때 주동적인 역할을 한 일로 영암 월출산에 은거하고 있다가 6.25때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박종남을 말한다. 그는 한국전쟁이 나자마자 광주에서 다른 재소자와 함께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이런 연유로 박종남의 아버지는 인공세상이 되자 자은면의 인민위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행정을 맡은 형식상의 자은면 수장일 뿐 우익인사를 붙잡아 들이는 분주소(지서) 일에 관여할 수는 없는 위치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역할과는 달리, 남진창고에 갇힌 자은면 유력인사들은 박종남의 부친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평소에 얼굴 붉힌 일도 없고 지역 일을 서로 상의하고 협력해왔던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인공 세상이 되고 지방 좌익이 판치는 세상에서 박종남 아버지는 남진창고에 갇혀 있는 인사들을 외면했다. 속마음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겉으로 특정 개인의 편의를 봐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1950년 10월 2일 목포에 국군이 입성했다는 소문이 바람결에 들려왔다. 남진창고에 갇혀 있던 이들의 입에서 '휴'하는 안도의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은 때 이른 것이었음이 그리 오래 되지 않아 확인되었다.

김희철 부부가 남진창고에 갇힌 다음 날 식전부터 완장 찬 이들이 동분서주했다. 창고에 갇힌 이들을 끌어내더니 몽둥이와 죽창으로 때리고 쳤다.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른 이들에게 커다란 돌맹이 한 개씩을 가슴에 안겼다. 바다에 수장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열 명씩 나룻배에 실릴 때 김희철 부부는 같은 배에 실렸고, 김희철 뒤에 그의 아내가 앉혀졌다. 배가 선착장을 출항하자마자 김 교사의 아내는 이빨로 남편의 뒷결박을 풀기 시작했다. 표나게는 할 수 없는 일이어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조금씩 했다.

드디어 뒷결박이 풀어졌을 때 김희철 부부는 바다로 헹가래 쳐졌다. 똑같이 바닷속에 빠졌지만 손이 자유로웠던 김희철은 헤엄쳐 나온 후 암태도 승봉산에 숨었고, 그의 아내는 남진창고 앞바다 물고기 밥이 되었다. 김희철은 아내 덕분에 살아난 이후 1961년도에 제23대 자은면 면장이 되었다.

인간 지옥이 된 염전 탱크
 
임자면 진리 유지들이 탱크 속에 생매장되어 죽임을 당한 염전 탱크가 있었던 곳.
▲ 염전 터 임자면 진리 유지들이 탱크 속에 생매장되어 죽임을 당한 염전 탱크가 있었던 곳.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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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은면 남진창고에 갇힌 이들 중에 천운이 깃들은 이는 김희철 한 명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물고기 밥이 되었다. 자은면 인근의 임자도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국군이 목포를 수복했다는 소식을 전후해 완장 찬 이들은 기독교인, 경찰 가족, 우익인사들을 여러 곳에 가두고 피의 제전을 벌였다. 진리선착장, 대기리 모래산, 도찬리 앞바다, 광산리 등이 그곳인데 진리 염전이 또 하나의 장소였다.

진리 앞바다에는 염전이 있었는데 6.25 당시에는 지금과 그 모습이 달랐다. 가로세로 각각 5m에 높이가 20cm 되는 철판에 바닷물을 담아 장작으로 불을 때 수증기를 증발시켜 소금을 얻는 방식이었다.

그렇다고 철판에 바닷물을 그냥 붓는 것은 아니었다. 사전 단계로 가로세로 5m, 높이 3m의 탱크에 말린 뻘과 바닷물을 섞어, 내리는 과정이 먼저 이루어졌다. 평소에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 1차 공정으로 이용되는 탱크가 인간 지옥의 공간이 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임자면 진리의 유력인사들이 염전 탱크 앞에 엉거주춤 서 있던 때는 1950년 10월이었다.

바닷가의 찬바람이 뺨을 때렸지만 추운 줄도 모르는 이들은 완장 찬 이들이 대체 자기들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려 하는지 불안하기만 했다. 그런데 잠시 후 지휘자의 명령으로 사내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결국 불안에 떨던 이들은 염전 탱크에 들어갔고, 그 위에 흙이 퍼부어졌다.

비명은 이내 파도 소리에 묻혔다. 설령 비명이 면소재지까지 들렸다손 치더라도 탱크속에 매장된 이들을 구해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수십 명의 임자면 진리 유력인사들이 이 세상과 작별했다.

'악마의 제전'에서 살아남은 어머니
 
임자면 도찬리 고씨 일가가 지방좌익에 의해 학살된 바닷가.
▲ 도찬리 앞바다 임자면 도찬리 고씨 일가가 지방좌익에 의해 학살된 바닷가.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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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청년단에 속해 있던 임자면 도찬리 고장봉(당시 29세)은 완장 찬 이들의 처형대상 일순위였다. 사실 고장봉의 형제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의 큰형은 마을 이장이었고, 셋째 형은 어장을 운영하고 있는 상황이라 도찬리에서는 유지 측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한청년단 활동을 하고, 이장을 하고, 어장을 운영한 이들에게만 불행의 여신이 다가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고장봉 10남매의 가족 50명이 악마의 제전에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1950년 10월 4일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그날, 고장봉 가족 50명은 도찬리 앞바다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렇게 고씨 일가가 세상과 작별하던 날 엄마 등에 업히거나 손을 잡고 따라간 아기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옆집에 숨어 있거나 따라가지 않은 어린이들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비록 며칠에 불과했지만 고씨 일가를 학살한 완장 찬 이들은 몰살된 이들의 집에서 현금, 옷, 가재도구를 강탈하기도 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으로 고장봉의 아내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녀의 친정이 임자면 대기리였는데, 친정 식구들이 좌익활동을 한 이들이라 그녀의 구명운동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임자면사무소 공무원이었던 임자면 광산리 윤장춘은 1950년 그해 가을에 완장 찬 이들에 의해 진리 농협창고에 구금되었다가 진리선착장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의 아내 이영순도 마찬가지였다.

약 70호가 옹기종기 살던 이 마을의 평화는 1950년 가을 무참히 깨졌다. 다른 마을의 완장 찬 이들이 와서 소위 부자거나 우익성향의 인물과 그 가족들을 마을 앞산 부근에서 학살했다.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살아난 윤정남(1943년생)의 증언은 당시 상황의 참혹함을 보여준다.

"아버지(윤장춘)와 어머니(이영순)는 진리선착장에서 죽었는데 그나마 시신 수습을 했습니다. 그런데 동생 한 명은 모래 언덕에 숨어 있다가 살아났는데 한 살짜리 동생은 엄마가 업고 갔다가 부모님과 함께 죽었어요."

당시를 회상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80대 노인에게 할 수 있는 위로의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렬로 세워져 있던 피묻은 죽창
 
임자면 광산리 사람들이 학살된 장소.
▲ 광산리 임자면 광산리 사람들이 학살된 장소.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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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권이 무안군에 속해 있던 신안군 압해면 고이리는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 칠동마을은 전주 이씨 집성촌이었다. 6.25 전에 칠동마을에 화재가 있었는데, 이는 이씨와 K씨가 서로 방화한 것임은 후일 밝혀졌다. 그만큼 양 성씨 간에 갈등은 전쟁 전부터 내재해 있었다. 6.25가 나자 인공시절 마을의 권력을 쥔 이들은 6.25 전 마을의 소작농이었던 K씨들이었다.

인민군 점령기에 무안군 운남면의 좌익들이 완장을 차고 압해면 고이도로 들어와 칠동마을의 청년 10여 명을 배에 태워 끌고 나갔다. 끌려간 청년들은 운남면사무소 부근에서 좌익에 의해 구덩이에 매장되었다.

이때부터 고이도의 좌익들이 완장을 차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칠동마을 가옥에는 피묻은 죽창이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당시 칠동마을 상황은 이아무개의 회고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고향 집에 가기 전에 대충 고향 동리 분위기를 알고 동리를 들어서니 동리는 완전히 빨갱이들 세상이 되어 간간이 인민가만 들려왔다. 고향 집에 들어가 보니 반동분자 집이라고 좌익들이 우리 집을 비롯하여 이씨 집은 물론 취객들 집까지 전부 문지방에 붉은 딱지를 붙여 놓고 출입을 금지시켰다."

1950년 8월 9일 아침 7시경 완장 찬 이들은 이아무개의 집으로 18세 이상의 이씨 남성들을 전부 모이게 했다. 칠동마을과 인근 지역에서 온 완장 찬 이들의 손에는 나무 방망이가 들려 있었다. 이씨들은 한 명씩 불려 나가 초주검이 됐다. 당시 경찰이었던 이〇〇, 교사였던 이〇〇, 학도호국단 간부였던 이〇〇의 소재를 대라는 것이었다.

6월 28일 수백 명의 좌익들이 칠동마을로 들이닥쳐 이씨 성의 남성 8명을 학살했다. 이후 국군 수복으로 후퇴하는 좌익들은 칠동마을 이씨 성의 남녀노소를 집단 학살했다.(진실화해위원회, 『전남 신안군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 ⑶, 2023)

오리무중이 된 신안군 희생 규모

도대체 한국전쟁 당시에 전남 무안군(현재의 신안군 지역)에서 학살된 민간인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사실 그동안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 실태를 정확하게 조사한 적은 없었다.

그나마 임자면이 1953년부터 1955년까지 각 마을별 실태조사를 통해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자 992명의 명단을 작성했다. 이 명단은 수정·보완 작업을 통해 1962년에 최종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이 명단에도 당시 아기나 일부 노인들이 누락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더군다나 군경에 의한 희생자들은 한 번도 제대로 조사된 적이 없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2008년도에 신안군 피해실태 조사를 벌였지만 불과 105명을 찾아냈을 뿐이다.

임자면만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자 약 1300명에 군경에 의한 피해자 약 200명으로 1500명의 전쟁 피해자가 발생했다고 추정된다. 신안군은 이외에도 자은면과 암태면 순으로 피해가 컸다고 알려졌지만 그 수치는 추정조차 불가능하다.

그런데 6.25 당시 목포공업학교 교사였던 이상득(암태면 익금리 출신)의 자서전에 의하면 암태도보다 며칠 늦게 수복된 자은면에서 우익진영 인사 약 600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자은창고에 구금되었던 우익인사 100여 명은 백부대에 의해 구출되었다고 한다.(이상득, 『나의 자서전, 가르치며 배우며』, 1991)

신안군의 피해 전체 규모가 정확히 밝혀지고, 양쪽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들과 그 가족의 한이 풀리는 날은 올 수 있을까?

태그:#뒷결박, #물고기밥, #염전, #대못질, #암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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