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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성아. 큰일 났다. 조만간 국군이 수복한단다."
"형님 국군이 오면 환영할 일이제, 와 큰일 이라요?"
"그게 아녀. 전쟁판이 이렇게 돌아가면 빨갱이들이 우리를 가만 두겄냐?"


그제서야 이판성은 무릎을 탁 쳤다.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기독교인인 자신들을 순순히 살려 두고 후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판성의 형 이판일(1897년)은 "전도사님을 얼른 피신시켜야 한다. 네가 안전하게 피신시켜 드려라"라고 엉뚱한 주문을 했다. 이판성(1906년생)은 형님한테 순종하는 자세로 두말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안위보다 주님의 종인 이봉성 전도사를 안전하게 피난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UN군의 인천상륙 작전으로 전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국군의 서울 수복을 전후해 인민군은 본격적인 후퇴를 시작했고, 각 지역에서는 정치보위부가 중심이 되어 우익인사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을 진행했다.

전라남도 무안군(현재의 신안군)은 목포에서도 외떨어진 고립된 섬으로 이루어진 곳이긴 하지만 전국적인 전황(戰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살벌한 공기가 전남 무안군 임자도를 감싸고 있었다.

이판성은 그날 밤 어렵사리 나룻배를 구해 노를 저었다. 다섯 시간이나 저었을까, 팔뚝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상태가 되었을 때, 멀리 희멀건 물체가 보였다. 증도였다.

어린양 있는 임자도로...
 
임자교회 이판일장로 가족들이 순교당한 모래산(백산)
 임자교회 이판일장로 가족들이 순교당한 모래산(백산)
ⓒ 모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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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교회 이판일 장로는 이봉성 전도사를 안전하게 피난시켰지만, 정작 자신은 완장 찬 이들에게 붙잡혔다. 사역자(이봉성 전도사)가 없는 상황에서 예배를 인도하던 이판일 장로는 예배당에 들이닥친 임자분주소원들에게 연행됐다.

동생 이판성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그날부로 목포경찰서로 이송됐는데, 1950년 9월 24일이었다. 추석을 이틀 앞둔 때였다. 정치보위부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이판일 형제는 순순히 풀려날 수 있었다.

당시 목포에서 목공예 사업을 하고 있던 아들 이인재 집에서 추석을 보낸 이판일은 임자도로 돌아갈 의사를 피력했다. 이인재는 펄쩍 뛰었다. 당시 목포에 피신 중인 이봉성 전도사도 만류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노모와 신도들이 있는 임자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판일의 결심은 꺾이지 않았다.

임자교회 치리목사였던 이성봉 목사에게 문안 인사를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목포교회에 시무하던 이성봉 목사는 무안군 임자, 증도, 암태 등 교회가 세워진 섬마을을 순회하며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등 담임목사가 없는 무안군 전체 지역을 관장하던 목사였다. 이판일, 이판성 형제와 그들의 어머니 남구산이 1934년 임자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때 세례식을 거행한 이도 이성봉이었다.

자신을 찾아온 문준경 전도사, 이판일 장로에게 이성봉 목사는 이사야서 26장 20절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을 들려주었다. 군경이 수복해서 치안이 확보될 때까지 목포에 은신하라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섬에서 불안에 떨고 있을 이들을 생각하며 문준경 전도사는 무안군 증도로, 이판일·이판성 형제는 임자도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박문석, <임자도에 나타난 십자가>, 사랑마루) 1950년 9월 말이었다.

47명 죽음의 행진

목포에서 이판일이 돌아왔다는 얘기를 들은 완장 찬 이들은 처음에는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이판일이 1950년 10월 1일 주일예배를 인도하고 수요일인 4일 저녁 예배도 드린다고 광고하면서 갈등은 불거졌다.

광고가 끝나고 마지막 찬송이 한창 불려질 때였다. "이 반동 ××들" 신발을 신은 채 들어선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임자분주소원들이었다. 이판일과 교인들 누구도 당황하지 않았다. 불청객의 고성에 동요되지 않고, 찬송을 불렀다.

"전부 연행해"라는 인솔자의 지시에 따라 동행한 완장 찬 청년들의 동작이 부지런했다. 중간에 있을 수 있는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뒷결박을 지었다. 10세 전후의 아이들이 입을 삐죽이다 끝내 울음을 터뜨렸으나, 20세 이상의 성인들은 한결같이 의연했다.

47명의 '죽음의 행진' 대열에 가장 나이가 많은 이는 78세의 남구산으로, 이판일의 어머니였다. 당시의 78세라면 현재는 100세에 가까운 나이나 마찬가지로, 상노인에 해당된다.

1950년 10월 4일 밤 11시가 넘어서 죽음의 행진 대열은 임자교회(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임자진리교회)에서 무안군 임자면 대기리 모래산(백산)으로 향했다. 3km가 넘는 밤길은 젊은 사람에게도 힘겨운 것인데, 78세의 남구산에게는 더욱 그랬다. 돌부리를 걷어차고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제 어머니를 업고 갈 수 있게 해주시오"라며 이판일은 머리를 조아리며 완장 찬 이에게 부탁했다. 그들도 툭하면 넘어지는 노인네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임무(?)를 빨리 끝내고 싶어선지는 모르지만 이판일의 부탁을 순순히 들어주었다.

이판일은 노모를 업고, 이판성은 당시 다섯 살이던 막내아들 성재의 손을 붙잡고 걸었다. 어린 성재는 영문도 모른 채 걷다가 다리가 너무 아파 아버지 이판성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완장 찬 이들은 그런 아이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성재가 가장 어렸는데, 그보다 몇 살 많은 11세, 14세 어린아이들을 향해서도 불청객의 몽둥이찜질은 멈추지 않았다. 불청객의 악마같은 행동에 어른들은 항의 한 번 제대로 못하고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예수 부정하면 살려 준다"
 
임자교회 후신인 임자진리교회
 임자교회 후신인 임자진리교회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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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리 모래산에 도착했을 때는 1950년 10월 5일 새벽 1시였다. 그곳에는 이미 커다란 구덩이가 여러 개 파여 있었다. 이판일 가족 12명과 임자교회 수십여 명의 신도들이 구덩이 앞에 세워졌다. 누구도 자신이 살아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완장 찬 이들 가운데 책임자가 "예수를 부정하라. 그러면 살려 주겠다"고 엉뚱한 주문을 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완장 찬 이들은 남구산을 시범 케이스로 죽창으로 찌르고 쇠몽둥이로 내리쳤다. 하지만 남구산은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옆에서 피눈물을 흘리던 이판일·이판성 형제는 "어머니만은 무자비하게 죽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구산이 "얘들아, 비겁하게 죽으면 못써"라며 엄히 꾸짖었다. 사방에서 "아멘" 소리가 울렸다.

독기가 오른 완장 찬 이들의 죽음의 칼춤이 본격화됐다. 죽창과 쇠몽둥이가 허공을 찌르고 아이들의 비명이 어둠의 모래산을 들썩였다.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이들이 모래 구덩이에 떨어졌다. 그 위에 떨어지는 모래가 뒷결박 지어진 이들의 얼굴에 뿌려졌다. 모래가 코와 입을 막았다.

이판일 장로가 무릎 꿇고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주여, 이 부족한 종과 어린 영혼들을 받아 주옵소서, 저들을 불쌍히 여기사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그의 기도가 마치기도 전에 죽창이 이판일의 가슴에 꽃혔다.

이판성의 막내딸 이완순(당시 8세)은 피의 제전이 벌어진 그날 다른 집에 가서 잠을 자 화를 면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집에 와보니 아무도 없어 울면서 마을을 다녔다. 완장 찬 이들은 이완순을 붙잡아 갯벌로 데려가 입을 찢고 생명을 끊어 내던져 버렸다.

이완순을 제외한 이판일 가족 12명이 대기리 백산에서 죽임을 당했는데, 임자교회 신자 35명은 여기저기서 죽임을 당했다. 그중 한〇수의 가족 12명은 임자도 곳곳에서 죽임을 당한 대표적인 경우다. 인민군이 후퇴하는 시점에서 인민군과 지방좌익들은 기독교인과 경찰 가족, 우익인사 가족들을 조직적으로 체포하기 시작했다. 임자도에서도 기독교인과 우익인사 사냥이 시작되었다. 한〇수(당시 26세)는 당시 부자이자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대상 우선순위에 해당됐다.

검거 대상은 한〇수 개인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 누나, 사돈, 조카, 동생 등 12명이 붙잡혔다. 이들은 진리선착장 앞바다와 대기리 백산, 진리 뒷등(뒤안들)에서 지방좌익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의하면 한〇수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소유의 토지를 관리하고 육성회장을 하여 많은 땅을 소유했던 부자였다고 한다. 한〇수의 아버지는 해방 전에 사망했고, 할머니 장아무개가 사람을 써서 농사지었다고 한다. 즉 지방좌익의 눈에 한〇수의 집안은 친일파이자 부농에 기독교인으로 처단대상 우선순위에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원래 한〇수 집안은 전통적으로 불교를 믿는 집안이었으나 진리교회가 만들어지면서 임자도의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이 한〇수 집안 아이들도 교회를 놀이터 삼아 출입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완장 찬 이들은 한〇수를 진리 농협창고에 구금했다. 한〇수는 진리선착장에 끌려갈 때 "나는 아무 죄가 없다"며 울부짖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전남 신안군 민간인 희생 사건(1) 임자면 진리교회 적대세력 사건을 중심으로', 2022)

왜 임자도는 죽음의 땅이 되었을까
 
48인순교기념탑. 우측이 이판일 장로의 손자 이성균 목사
 48인순교기념탑. 우측이 이판일 장로의 손자 이성균 목사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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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에 임자도에서는 이판일 장로 집안을 포함해 진리교회 신도 48명만이 지방좌익에 의해 죽임(순교)을 당한 것이 아니다. 임자도에서 기독교인, 지주, 우익집안이라는 이유로 지방좌익에게 학살된 이들의 명단이 밝혀진 것은 992명이다.

이는 임자면에서 1952~1955년도에 각 마을을 순회하면서 조사한 결과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갓난아이를 포함해 누락된 인원이 대략 300명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약 1300명의 주민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우익이라는 이유로, 부자라는 이유로 불법적인 죽임을 당한 것이다.

특히 문준경 전도사에 의해 1932년 7월 17일 임자도에 세워진 임자교회는 1943년 일제의 성결교단 해산령으로 교회가 폐쇄되었다가 1945년 해방을 계기로 교회 건물을 되찾은 곳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을 맞이해서는 종교탄압의 일환으로 떼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교인 중 일부 젊은 층의 정치적 입장이 무엇이었건 간에 노인, 어린이 가릴 것 없이 집단학살을 한 것은 종교 말살 정책과 같다. 어떤 경우라도 종교·사상·양심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태그:#임자교회, #이판일, #임자도, #모래산,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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