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강원도 여행을 떠났다. 지금쯤 강릉 난설헌생가에는 겹벚꽃이 활짝 피었으리라. 버스로 다섯 시간을 달려 묵호에 도착했다. 끝없이 펼쳐진 동해바다를 앞마당으로 들여놓은 묵호등대 근처 숙소 주인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짐을 풀고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아놓았던 그리움을 한껏 풀어내렸다.
24일, 차를 빌려 타고 난설헌생가에 갔다. 순두부 끓이는 고소한 냄새가 퍼지는 초당마을 솔숲 속에 차를 세우고 허초희, 그녀의 흔적을 따라 들어갔다. 만개한 분홍빛 겹벚꽃으로 둘러싸인 난설헌 생가는 마치 솜씨 좋은 화가가 정성 들여 그려놓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집안 마당도 꽃천지로 변해 있다. 사랑채에 교산 허균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난설헌의 재주를 일찍부터 알아본 가족들
난설헌의 아버지인 초당 허엽은 슬하에 허성, 허봉, 허균, 세 아들과 딸 난설헌을 두었다. 그는 딸의 재주를 일찍부터 눈여겨보고 세 아들과 똑같이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특히 둘째 오빠인 허봉은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면 여동생을 위해 귀한 책을 일부러 구해오기도 하고 친구였던 손곡 이달에게 누이의 글공부를 부탁하기도 했다.
손곡 이달은 조선시대 삼당시인(三唐詩人)중의 한 사람으로 서얼 출신이다. 신분의 한계로 불우한 일생을 보낸 이달의 삶은 난설헌의 동생인 허균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허균은 당시로서는 개혁적인 소설 '홍길동전'을 쓰게 되었다.
그는 총명하고 진취적이었으나, 이단아로 낙인찍혀 결국 역적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는 생전에, 불행하게 죽은 누나의 글을 모아 중국과 일본에서 난설헌시집이 발간되게 했으며 난설헌의 시가 칭송을 받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내외 담을 지나 안채로 들어갔다. 조선의 반가(班家)에서 볼 수 있는 내외 담은 가옥 내부를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지키며 남녀의 공간 사이에 만들어져서 남녀가 내외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정갈한 마당 한쪽에 모란꽃이 탐스럽게 피어있다.
난설헌 영정 앞에 섰다. 모란꽃만큼이나 고운 얼굴이 슬퍼 보이는 것은 그녀의 아픔과 고통이 내게 슬픔으로 투영된 탓일까.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부족함 없이 자란 난설헌은 열다섯 살에 김성립과 혼인을 하게 된다. 불행의 시작이었다.
신혼의 단꿈은 잠시. 김성립은 아내의 뛰어난 글솜씨와 자신이 자주 비교되자, 점점 아내를 멀리하고 기방 출입이 잦아졌다. 급기야는 집을 나가 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 허엽이 객사하고 허봉과 허균이 유배를 가는 등 친정이 몰락하자 시댁의 냉대는 심해지고, 두 아이마저 잃은 난설헌은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스물일곱의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난설헌은 뛰어난 재주를 지녔음에도 시대가 품어내지 못한 불운의 시인이었다.
영정 앞에 서서 그녀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조선에 태어난 것, 여자로 태어난 것, 김성립과 혼인한 것, 이 세 가지가 한스러웠다는 난설헌의 굴곡진 삶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생가 바로 곁에 있는 기념관으로 가는 길에 강릉 허씨 5 문장으로 불리는 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의 시비가 서 있다. 두 아이를 잃은 슬픔을 쓴 난설헌의 작품, '곡자(哭子)'를 읽노라니 그녀의 애절한 심정이 내 마음을 울린다.
오는 4월 27일부터 28일까지 초당동 허균허난설헌기념공원에서 '나, 난설헌'이라는 주제로 난설헌 문화제가 열린다.
생가 주위로는 초당순두부집들이 많다. 난설헌의 아버지 초당 허엽이 깨끗한 바닷물로 간을 맞추어 두부를 만들었는데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자 자신의 아호를 붙여 초당 두부라 했다고 전해진다.
생가를 찾을 때마다 초당순두부를 먹는데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난설헌생가에서 가슴 시리고도 아름다운 봄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