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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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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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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전국의 고등학교는 내년 학사 운영 계획을 수립하느라 분주하다. 아직 1학기가 마무리되지 않은 때라 조금 이르다 싶겠지만, 이것저것 고려하고 챙겨야 할 내용이 적지 않다. 2025년인 내년부터 고1은 고2, 고3과는 달리 2022 개정 교육과정을 새로 적용받게 된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은 고교학점제의 전면 시행을 골자로 한다. 앞선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도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에 맞춰 과목을 선택하도록 했지만, 대학별 전공에 따라 이수 과목이 지정되는 부작용이 컸다. 학교마다 무늬만 학생 선택제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대입에서 문과와 이과 구분을 없앤 것도 '문과 침공'이라는 생채기만 남긴 채 껍데기만 남았다. 의치대와 공대 등에선 '핵심 권장 과목'이라 하여 특정 과목의 이수를 요구했고, 계열의 칸막이가 사라진 상황에서 미적분과 기하, 언어와 매체 등 고득점에 유리한 과목이 득세했다. 그 와중에 기존의 문과 과목은 애물단지 신세로 전락했다.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실패는 예견됐다. 이전의 숱한 교육과정이 그러했듯, 온존한 학벌 구조와 대입 제도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초중고 모든 교육과정이 대입에 철저히 종속된 현실에서 교육과정의 개정은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잊지도 않고 또 온' 것에 불과하다.

과연 2022 개정 교육과정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학교마다 대비하는 모습을 보건대, 이번에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주상 같은 교육과정의 개정과 시행은 '정공법'이지만, 단위 학교의 '편법'을 이긴 사례는 없다. 대입 제도 앞에 교육과정은 '공자님 말씀'일 뿐이다.

대입 제도 앞 교육과정은 '공자님 말씀'

지금 학교마다 서둘러 내년을 준비한다는 건, 다양한 '편법'을 마련하고 있다는 뜻으로 봐도 무방하다. 좋게 말하면, 교육과정의 이상과 학교의 현실을 어떻게 포괄할 것인가 고민하는 것이고, 솔직해지자면, 변화 속에서 대입 실적을 높이는 방안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학생 선택권도 '종속 변수'에 불과하다.

고교학점제는 학생의 수요에 따라 과목을 개설하는 게 핵심이다. 학생 선택권의 기본 전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과목이 개설되기를 바랄까. 어리석은 질문이다. 대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과목을 바랄 테고, 해당 수업에 수강 신청이 몰리게 될 건 불 보듯 환하다.

자기의 적성과 흥미보다 대학 진학이 우선인 현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고3 아이들과 상담하다 보면, 열에 일곱 여덟은 여전히 진로에 대해 고민 중이라고 답한다. 고1 때부터 '수능 대박'만 외치는 현실에서 진로 탐색 활동은 대입 공부를 위한 '쉬는 시간'에 불과하다.

전공 선택의 폭이 넓은, 정확하게는 졸업 후 취업에 유리한 이과 과목이 다수 개설될 테고, 문과 과목은 교양 교과 정도로 축소될 것이다. 요즘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모르는 아이는 없다. 편하게 공부하고 싶어서 문과 과목을 선택한 거라고 비아냥댄다. 학교마다 '문과반'은 그냥 '꼴통반'으로 통한다.

문과 과목 중엔 공통 과목인 통합사회를 제외하곤, 대부분 선택받지 못할 공산이 크다. 진로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문과 과목을 수강했다간 낭패를 당하기에 십상이다. 의치대나 공대와는 달리, 대다수 대학의 문과 관련 학과에는 이수 과목 제한이 없다.

서슬 퍼런 학벌 구조와 '문송한' 현실이 혁파되지 않는 한, 학생 선택권의 보장이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하긴 최근 최상위권의 의치대 선호 현상이 뚜렷해지면서, 명문대 공대생들조차 주눅이 드는 현실이다. 과학 영재들이 모였다는 과학기술원이나 포스텍 재학생들조차 자존감에 생채기가 났고, 서울대 공대는 '의치대 사관학교'라는 별칭까지 생겨났다.

석차 등급을 기존의 9등급 체제에서 5등급으로 등급 구간을 넓힌 것도 큰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경쟁이 완화되는 측면이 없지 않겠지만, 과정 중심의 평가로 전환을 이끌기에는 태부족하다. 상대평가와 절대평가를 절충한 어정쩡한 타협은 '언 발에 오줌 누기'일 뿐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

대입의 유불리를 따져 선택한 과목이 수업의 집중도를 높이고 진로 역량을 키울 수 있다고 여긴다면 오산이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 책임지라는 것으로 들릴 따름이다. 차라리 학생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대학이 '조건'을 걸지 못하도록 하는 편이 낫다.

교육과정의 운영에 있어 지역과 단위 학교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취지도 강퍅한 현실 앞에 왜곡될 수밖에 없다. 학교마다 대입에 유리하도록 과목을 개설하고 그에 따라 이수 단위를 가감할 게 뻔하다. 애먼 의치대와 최상위권 대학에 '꽃놀이패'를 쥐여주는 꼴이다.

교사들도 혼란... '탁상공론' 절감하는 요즘

무엇보다 교사의 수급 문제로 혼란이 빚어질 가능성이 크다. 개설 과목과 이수 단위에 따라 정원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서다. 새로운 교육과정의 시행을 앞두고 학교마다 정원이 기간제 교사로 채워지곤 했다. 특히 고등학교의 경우, 자신의 전공과 다른 과목을 가르치는 상치교사를 둘 수 없어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교육과정이 바뀔 때마다 기간제 교사는 시나브로 늘어났고, 그 수가 정규 교사보다 더 많은 학교도 있다. 현재도 심각한 상황이지만, 2022 개정 교육과정이 전면 시행되면 문과 과목 담당 교사의 수업 시수는 더욱 줄어들게 될 것이다. 과원이면, 선택을 받은 과목 교사에게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 잘 가르치는지와는 상관없다.

대입에서의 유불리가 학생의 과목 선택을 좌우하고, 그것이 학교 교육과정 편성의 기준이 되면, 그러잖아도 고등학교의 일상을 쥐고 흔드는 최상위권 대학의 위세가 날로 커져만 갈 것이다. 대학이 제시하는 '조건'에 따라 교사의 수요도 요동칠 테고, 결국 모든 과목을 기간제 교사가 가르치는 극단적인 상황이 현실화할지도 모른다.

과목별로 한 줄 세우는 등급이 존재하고 수능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는 한, 백약이 무효다. 당장 문과 과목이 직격탄을 맞고 있지만, 그 파장은 도미노처럼 학교 교육 전반에 미치게 될 것이다. 학벌 구조를 혁파하기는커녕 대학의 눈치만 살피는 미봉책으로는 학령인구의 급격한 감소까지 겹친 공교육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2015 개정 교육과정이 좌초된 현실은 2022 개정 교육과정이 가져올 미래다. 각 교육과정이 나올 때마다 창의와 포용, 자율과 참여, 혁신과 미래 등 온갖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였지만, 아이들은 극심한 무한경쟁에 시달리며 각자도생의 가치관을 체화해 갔다. 이젠 교육과정의 개정에 대한 기대조차 없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고교학점제와 수능을 뒤섞느라 혼란이 빚어지고 있는 가운데, 생뚱맞게 AI 관련 과목이 개설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대번 아이들은 해당 과목이 대입에 반영되는지부터 묻는다. 정부의 교육 정책을 두고 왜 탁상공론이라고 하는지 절감하는 요즘이다.

태그:#2022개정교육과정, #고교학점제, #학생선택제, #문송합니다, #5등급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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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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