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부에서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았던 조봉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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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이승만 정부가 단행한 농지개혁 자체가 모든 농민에게 평등지권을 부여해 조선 후기 실학파들이 꿈꾸었던 사회를 창출했다. 이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이상을 실현한 놀라운 사건이었다. 최근 뉴라이트 인사들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농지개혁을 이승만의 치적으로 극구 상찬한다는 보도를 접했다. 이들이 왜 이런 발언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사실 인식에 문제가 있음은 분명하다. 우선 이들은 지금 한국에서 농지개혁과 유사한 정책을 추진한다고 하면 거품 물고 반대하리라 짐작한다. 스스로 지지하지 못할 이상을 이승만이 실현했다고 상찬을 하고 있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농민을 위한 정책이라고 여기고 추진하지는 않았다. 단지 미국의 압박과 당시 지주층의 견제를 누르고 농민층을 무마하기 위해 정략적으로 추진했을 뿐이다. 농지개혁을 개혁으로 여기고 성공시키기 위해서 헌신했던 사람들은 조봉암 초대 농림부 장관과 농림부 내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 인사들(조봉암, 강정택, 강진국, 이순탁 등 4인), 그리고 국회 내 혁신적 성향의 소장파 의원들이었다. 물론 이런 엄청난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당시 미국이 남한의 농지개혁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둘째, 박정희 정권의 무분별한 도시개발의 결과로 부동산 투기 광풍이 불기 시작해 주기적 현상으로 발전하고 있을 때, 노태우 정부가 종합토지세와 토지공개념 3법을 도입했다. 1986년부터 이어진 국제수지 흑자가 1988년에 절정에 달하고, 그해 3월에 13대 총선, 9월에 서울올림픽이 치러지자, 막대한 유동성이 시중에 풀리면서 엄청난 투기가 발발한 것이다. 1989년 전국 평균 지가 상승률은 39%를 기록했다. 노태우 정권은 이를 사회의 토대를 흔드는 위험한 현상으로 받아들였고, 부동산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과 조순·문희갑·김종인 등 개혁적 성향의 정부·청와대 인사들이었다. 노태우 정부의 이 정책에 대해 국민은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토지공개념을 두고 행한 여론조사 지지율이 거의 90%에 달했으니 말이다. 이때는 조·중·동(조선·중앙·동아) 등의 언론도 토지공개념을 지지하는 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국민이 깨어 있고, 언론이 공정하며, 국민 여론에 부응하는 개혁가들이 있으면 상당히 의미 있는 경제개혁이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토지공개념 3법은 위헌 소송의 대상이 되어 모두 위헌 또는 헌법 불합치 판정을 받았으며, 그 가운데 '택지 소유 상한에 관한 법률'은 1999년 위헌 판정이 내려지기 전 위헌 소송이 진행되는 도중에 폐지되었으며, '토지초과이득세법'은 1994년 헌법 불합치 판정을 받은 후 문제 조항의 개정을 거쳐 몇 년 동안 유지되다가 1998년에 폐지되었다. 단, 토지공개념 3법 가운데 '개발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은 1998년 위헌 판정을 받았지만, 문제 조항의 개정을 거쳐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오늘날 적지 않은 국민이 토지공개념을 위헌이라고 믿는 것은 토지공개념 3법이 이런 우여곡절을 겪었던 기억을 가졌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왜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강조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