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열장에 전시된 델프트 도기들.
Kim Traynor
이때 가장 먼저 근사치에 도달한 이들이 페르메이르의 도시 델프트의 도공들이었다. 이들은 백색 주석 유약으로 하얀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코발트블루 안료를 입혀 청화백자를 모방한 '델프트 도기(Delftware)'를 개발했다. 델프트 도기는 청화백자와 동일한 내구성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파란색 무늬만큼은 거의 흡사했다.
게다가 훨씬 경제적인 제작 비용 덕분에 델프트 도기는 단숨에 유럽 최고의 수출상품으로 부상했다. 너무 귀해서 고이 모셔두고 바라보기만 하는 관상용 예술품이 아니라 그릇, 타일, 화병 등 생활도자로 만들어진 덕분에 폭 넓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타일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태양왕 루이 14세는 델프트 타일로 실내외를 장식한 별궁 '트리아농 데 포셀라인(Trianon de Porcelaine)'을 지었을 정도였다.
델프트 도기의 원산지인 델프트에서도 타일 소비량이 가장 많았다. 페르메이르와 동시대에 활동한 장르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피터 데 호흐(Pieter de Hooch, 1629-1684)의 그림을 보면 굽도리, 벽난로 주변, 계단 등을 장식한 델프트 타일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모두 생활 흠집이 많이 생겨 청결을 유지하기 어려운 부분들이다.
델프트 타일과 여성성
특히 벽난로 주변은 불을 피우면 생기는 그을음을 쉽게 닦아낼 수 있어 타일 만한 마감재가 없었다. 더욱이 델프트 타일은 흙을 저온에서 구워내는 경질도기(earthenware)이기 때문에 급격한 온도 변화로 인한 수축과 팽창도 거뜬히 견뎌 낼 뿐더러 청아한 파란색 손그림으로 장식적인 효과까지 누릴 수 있어 일석삼조의 재료가 되었다.
<우유 따르는 하녀>에서 페르메이르는 델프트 타일에 사랑의 신인 큐피드를 그려넣었다. 이 큐피드는 발난로를 향해 화살을 당기는 모습이다. 네덜란드처럼 냉기 가득한 저지대에서 발난로는 겨우내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여성들은 보통 치맛단 속에 넣어 아랫도리를 따뜻하게 데우는 데 사용했다. 이런 연유에서 발난로는 여성의 성적 욕망을 은유하는 상징물로 통한다. 그런데 페르메이르의 하녀는 우유를 다루는 서늘한 부엌에서 발난로를 등지고 서 있다. 큐피드가 쏘는 사랑의 화살을 외면한 채 가사일에 전념하는 그녀는 스스로 절제하고 인내하는 '바람직한' 여성상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피터 데 호흐의 <젖먹이는 여인>
Pieter de Hooch
흥미롭게도 피터 데 호흐의 작품에서도 델프트 타일은 여성성과 결부된다. 그의 작품 속 공간은 모두 집안이며, 집안은 모두 아이를 양육하고 살림을 꾸리는 여성의 공간으로 그려졌다. 이는 네덜란드 사회가 제시하는 이상적 가정의 모습이었다. 17세기 중엽 세계 최대 무역국으로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네덜란드는 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약 한 세기 먼저 근대 시민사회 개념을 확립했다. 이때 가정은 여성의 영역이며, 여성의 미덕은 가정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자녀를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양육하는 것이었다. 페르메이르의 네덜란드에서 장르화에 등장하는 여성들 대다수가 집안에서 가사를 돌보는 모습으로 그려진 이유가 이러한 맥락에 있다.
페르메이르가 활동했던 시기 네덜란드는 세계 해상 무역을 장악한 가장 부유한 나라였다. 그런데 역사상 최초의 거품 경제 현상인 튤립 투기 광풍이 몰아친 것도 이 때다. 인간 탐욕의 끝을 보여주는 사건이 철저한 금욕주의가 지배하던 시기에 발생한 것이다. <우유 따르는 하녀> 또한 델프트가 도기 생산과 동서 교역의 중심지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에 탄생한 작품이다. 단출한 부엌에서 열심히 일하는 여인을 그린, 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림이 오늘날까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품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진정한 삶의 가치란 허황된 풍요가 아닌 절제의 미덕에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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