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영
이태준만이 아니었다. 전쟁 이전에 월북한 사람들 가운데 학자나 문화예술가들이 적지 않았다. "남한엔 공산주의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더 많고, 남한의 정치적 성향은 의심할 나위 없이 좌익적"이라는 1946년도 미군정의 보고서가 당시의 현실을 잘 말해준다.
이런 상황에서 38선이 남북을 갈라놓자 지식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의 월북이 많아졌다. 북한의 김일성대학이 교수진을 적극적으로 초빙하자 서울의 당대 최고 학자들이 적지 않게 평양을 선택했다. 이를 두고 똑똑한 사람은 전부 북으로 가고 서울에는 쭉정이만 남았다는 말이 돌았다. 문화예술인도 그랬다. 성혜랑(1996년 프랑스로 망명한 탈북인)에 따르면 "서울에서 온 작가, 예술가들로 넘쳐나는 평양을 보며 예술가들은 다 빨갱이였던가 생각될 정도"였다.
그들은 월북 이후 당장은 좋은 위치에 있었으나 인생 후반은 대부분 좋지 않았다. 극작가 신고송과 이서향, 만담가 신불출, 연출가 안영일, 연극배우 배용, 극작가 추민 등은 복고주의니 종파분자니 하는 명목으로 숙청당했다.
반면 북한체제가 불편했던 사람들은 월남하여 혈혈단신 객지에서 갖은 고생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정치적으로 집단학살을 당하진 않았고 일부는 크고 작은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에 비해 월북의 결과는 대부분 불행이었다. 북한은 처음부터 월북자를 남한과 미국의 스파이로 경계하는 시각이 강했다.
학계나 문화예술가 가운데 자기 발로 38선을 넘어간 월북자는 중산층 이상이 많았고, 일본 제국주의의 갖가지 친일동원에서도 완벽하게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런 사람들은 북한이 사회구성의 기본으로 삼는 성분심사, 곧 출신성분과 사회성분 모두 부정적인 평가를 디폴트로 안고 있었다. 게다가 1956년 종파사건 이후 북한의 권력투쟁은 단순한 자리싸움이 아니라 죽고 사는 또 하나의 내전이었으니.
혁명은 인민을 끌어당겨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이지만, 권력을 잡는 순간 혁명은 사라지고 권력만 남는다. 이태준은 이런 냉혹한 권력에 추돌당했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이상과 열정은 그의 문장과 함께 사그라졌다. 그래도 철원에 그를 문학의 역사로 부활하고 있으니 대한민국으로서는 참으로 잘한 일이다. 한국전쟁의 직접 책임은 전범을 특정하여 그들에게 물을 일이고, 타버린 재처럼 흩날린 귀한 것들은 이제라도 하나하나 챙겨볼 일이다. 건져낼 역사가 이태준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 알림]
2020년 이후 계속해온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답사여행 – 휴전선(강화.교동~강원.고성)>을 오마이뉴스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휴전선 답사여행 8차(8.21~26) 또는 9차(10.20~25)에 동반하고자 하는 독자는 다음 링크의 공지를 찬찬히 읽어본 뒤에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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