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26 17:32최종 업데이트 23.04.28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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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나는 야마모토, 한국인들의 끔찍한 죽음 추적중입니다>(https://omn.kr/23n30)에서 이어집니다.

다카시마다이산을 떠나 탄마치와 고가야(幸ヶ谷) 공원을 거쳐 오후 2시쯤 이날의 네 번째 답사 장소인 옛 아사노 조선소 앞에 도착했다. 모두 10분 안쪽 내에 있는 거리였으나 질의 응답이 많아선지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옛 조선소 터는 100년이 지난 까닭에 아예 흔적이 없었다. 항만도로는 반듯하게 뻗어 있었고 물류창고 같은 대형 건물이 번듯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바닷가 바로 앞이어서 맞바람에 짙은 소금기가 풍겼고 한낮의 햇빛은 파도를 억누르고 있었다.

오전 11시부터 4시간이나 이어진 (점심시간을 빼도 3시간 넘게) 현장 답사에도 야마모토 스미코 선생은 지친 기색이 없다. 답사가 끝나면 요코하마역의 한 찻집에서 평가회까지 예정되어 있는데 술렁술렁 넘어갈 기미가 안 보인다.

조선인을 적으로 여긴 군·경
  

아사노 조선소 터에서 설명하는 홍보담당 야마다 야스코. 아사노 조선소는 지금 흔적이 없다. ⓒ 민병래

 

야마모토 스미코는 옛 아사노 조선소 학살에 대한 증언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했다. ⓒ 민병래

 
"'조선인은 빨치산이다. 조선인은 사회주의자다'라는 선언이 군대로부터 나왔습니다. 이렇게 주민을 선동했습니다. 관동대학살은 식민지 전쟁을 일본 내에서 조선인을 상대로 벌인 것입니다."

옛 아사노 조선소 터에서 나온 야마모토 스미코의 이 설명은 특별하다. 그가 관동대학살 90주년을 맞아 쓴 논문에도 나온 내용인데 관동 일원에서 '조선인은 빨치산이고 사회주의자'라고 군대와 경찰이 공공연하게 말한 것은 가나가와현이 유일하다. 당시 야마모토 곤베에(山本 權兵衛) 내각이 조선인에 대한 경계심을 바탕으로 '조선인 습격설'을 퍼트리고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조선인이 곧 게릴라 부대다"라고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지진 다음 날인 9월 2일 23시 30분경, 해군육전대가 요코스카에서 구축함 2척을 타고 요코하마의 하치만바시(八幡橋)에 상륙한다. 육전대는 경찰과 함께 시내를 정찰했고 그때의 상황을 요코스카 진수부사령관 노마구치 카네오((野間口 兼雄)는
는 9월 3일 해군대신 다카라베 타케시(財部 彪)에게 보고한다. 이 보고에 "주민들이 '불령선인'을 '빨치산'이라고 부른다는 것, 불령선인 본부가 히가시카 나가와에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야마모토는 군대의 보고서에 주민의 말이라며 언급된 '빨치산'이란 표현에 주목한다. 그가 가나가와현에서 많은 증언을 모았지만 누구의 입이나 자료에서도 '빨치산'이란 표현은 나오지 않았다. 당시 일본 민중에게 빨치산은 신문에서나 가끔 접할 낯선 말로 쉽게 대중 사이에서 오고 갈 표현이 아니었다.

야마모토는 "군부가 특히 요코스카에 뿌리를 둔 해군이 '조선인은 빨치산'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고 이 적대감이 계엄 상황에서 자연스레 분출되어 군대의 학살을 부추기고 경찰과 자경단 또한 무차별 살해에 나서게끔 했다"고 분석했다.

야마모토 선생의 이 시각은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요코하마와 이웃해 있는 요코스카는 메이지 시대 이래 군사항구였고 해군진수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청·일전쟁 때 사실상 선봉부대 역할을 한 해병이 군함 아에야마(八重山)를 타고 출발한 곳도 요코스카였다. 또 요코하마 조선소에서는 군함이 건조되었으니 요코하마와 요코스카는 일본이 청나라를 이기고 동학 농민군을 짓밟아 사실상 조선을 점령하고 제국주의로 발돋움하게 한 군사 도시였다.

한편 청·일전쟁 이후 러·일전쟁 전후해서 일본군은 동학 농민군에 이어 조선의 의병부대와 격전을 치러야 했다. 1918년 시베리아 간섭 전쟁 때도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빨치산 부대에 진저리를 쳤다. 식민지를 뺏고 방어하는 전선에서 일본 군대에 조선인은 곧 빨치산이다, 섬멸해야 할 적이다라는 인식은 자연스러웠다.

그러니 군사도시 요코스카에 주둔하는 육전대의 보고서에서 "조선인은 빨치산이다"라는 표현이 주민의 말이라며 나온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야마모토 스미코 선생은 조선소 터에서 오랜 시간 "조선인은 빨치산이다"라고 선언한 군대의 의식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이어서 48명의 조선인이 이곳에서 살해된 경위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아사노 조선소에서 매립 작업을 하고 있는 조선인이 단체로 학살당한 것은 그곳에 조선인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걸 잘 아는 것은 누구일까? 경찰이다. 가나가와현 경찰은, 이해의 7월 1일에 특별고등과를 설치했다. 도베(戸部) 경찰서는 2일 아침 유언비어가 전해지자 곧바로 조선인이 일하고 있는 작업소나 기업, 함바를 정찰하러 나갔다."

조선인은 이처럼 치안의 대상으로 항상 감시를 받고 있었다. 유언비어가 있었기 때문에 정찰하러 다닌 것이 아니라 평소 조선인에 대해서 특별고등과가 눈을 번뜩이고 있었고. 그런 까닭에 마치 겨누고 있던 듯 한 곳에서 집단으로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식으로 학살당했을까? 모두 참살당해 현장을 빠져나온 자가 없고 목격자도 없다. 다만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요코하마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해 가장 생생한 증언을 남긴 다바타 기요시(田畑潔), 그는 아사노 조선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나카무라초 주위에서 벌어진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발견된 조선인을 빙 둘러싸고 아무 문답 없이 손에 손에 들고 있는 죽창, 삽으로 조선인의 몸을 괴롭힌다. 그것도 단숨에 싹 해치우는 게 아니라, 모두가 각각 흠칫거리며 하기에 더 잔혹하다. 머리를 치는 자, 눈에 죽창을 찔러 세우는 자, 귀를 쳐서 떼어내는 자, 등을 두드려 패는 자, 발등을 베어 찢는 자… 조선인의 신음과 소리 지르며 욕을 하는 일본인의 성난 소리가 섞여,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장면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고통을 줄 대로 준 후에 죽은 조선인의 시체를 구라키바시(倉木橋)의 둑가에 죽 늘어놓고는 강 쪽으로 뻗은 벚나무의 작은 가지에 매단다. 미요시바시(三好橋)부터 나카무라바시(中村橋)에 걸쳐 200그루 이상의 나무에 전부 피투성이의 사체를 단다. 그래도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이에게는 매단 채로 다시 린츠를 가해… 사람이 할 짓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지옥의 형장이었다. 완전히 죽은 인간은 매달린 줄을 잘라 강 속에 떨어뜨린다. 강 속은 몇 백 구나 되는 사체로 가득하고 어제까지 푸르렀던 물은 새빨간 탁류가 되어 버렸다.
- <시오(潮)> 1971년 9월 98~100쪽
 
이것이 나카무라초 주변에서 벌어진 참상의 모습이다. 아마 조선소 터의 학살 장면도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인의 시체는 어떻게 됐을까? 나카무라초의 시체처럼 틀림없이 요코하마 바다로 떠내려갔을 것이다. 조선인 사체가 많아 바다를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라고 했으니 요코하마의 바닷물은 핏물과 흩어진 살점에 검붉고 피비린내가 가득했으리라. 요코하마 위에 있는 도쿄에서도 스미다강을 통해 바다로 시체를 떠내려 보냈으니 도대체 도쿄만에는 얼마나 많은 조선인의 사체가 떠다닌 걸까?

야마모토의 설명이 끝나고 나서 우리 답사반은 아사노 조선소 앞 검푸른 바다에 국화꽃 한 송이씩을 던졌다. 먼바다 어디선가 100년 전 조선인의 영령이 손짓하는 듯하다. 영가라고 하던가? 원한이 많아 구천으로 가지 못해 떠도는 영혼을. 울부짖음과 아우성이 물마루를 타고 밀려오는 듯하다. 제대로 씻김굿을 해 그 한을 풀어 드려야 하는데 고작 국화꽃 한 송이로 시늉만 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야마모토 스미코의 선창으로 우리는 '아리랑'과 '고향의 봄'을 불렀다.  

호쇼지에서 만난 이성칠의 사연
 

이성칠의 사진을 안고 설명하는 야마모토 스미코. 이성칠은 조선 동포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호쇼지를 찾았다. ⓒ 민병래

 
 

호쇼지의 ‘관동대지진 한국인 위령비'.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 1970년 9월 1일에 세웠다. ⓒ 민병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아사노 조선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날 답사의 마지막 장소인 호쇼지로 향했다. 천년 고찰답게 입구 돌계단엔 양쪽으로 아름드리나무가 몇 길 높이로 솟아있었다. 이 절을 마지막 답사 장소로 정한 까닭은 가슴 아픈 사연이 서려 있어서다.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이성칠은 1923년의 학살을 피해 살아남았고 숨져간 동포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는 가나가와현에 있는 여러 절을 찾아다니며 조선인을 위해 9월 1일에 기도를 바쳐달라고 부탁한다. 모든 절에서 마다했는데 오직 호쇼지의 주지 사에키 묘치(佐伯妙智)만이 그의 애원을 받아들인다. 이런 인연으로 이성칠은 이 절에 1924년 9월 1일 자로 '학살 조선인제령위'라는 위패를 바쳤고 호쇼지에서는 해마다 9월 1일에 조선인을 추도하는 기도식이 열렸다.

이런 인연으로 1970년 9월 1일 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서 이 절에 '관동대지진 한국인 위령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관동대지진에 의해 직접 혹은 간접적 피해를 받아 허망하게 이슬로 화했다"라고 쓰여있는데 '학살'이라고 쓰지 못했던 아픔과 고뇌가 느껴진다.

호쇼지 경내로 올라가는 층계는 가팔랐다. 천천히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는 야마모토 선생에게 피곤하시지는 않은지, 조선인 인권을 위해 살아오면서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는지, 자제분들은 어머니의 이런 활동을 어떻게 보는지, 이것저것 말을 건넸다. 절 입구에 들어서서 왼쪽에 있는 추도비 앞에 서자 야마모토 스미코는 제일 힘겨웠던 때에 대해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1990년대부터 역사수정주의가 나타나면서 학살은 없었다는 얘기가 퍼지기 시작했어요. 조선인을 도운 일본인도 많았고, 일본인도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이 널리 퍼졌어요.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코웃음 쳤는데 일본 사회에서 이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되었어요."

오전 내내 설명할 때는 카랑카랑하고 단호한 목소리였는데 일본의 변화된 현실을 얘기할 때 선생의 목소리는 사뭇 잦아들었다. 표정도 눈에 띄게 무거워 보였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같은 역사수정주의가 나타나고 아베를 비롯한 극우파가 자민당을 움켜쥐면서 이들의 압력으로 교과서가 개정되었다.

관동대학살에 대해 '학살'이 '살해'나 '수난'으로, 학살의 책임자가 '군경'에서 '자경단'으로, 살해된 숫자도 수천 명에서 '00명' 같이 모호하게 바뀌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진출로 바뀌고 강제동원을 부정하고 거리에선 헤이트 스피치(증오를 선동하는 발언)와 혐한(한국 혐오) 발언들이 쏟아져나왔다. 역사가 뒤로 가고 있으니 어찌 힘이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호쇼지에서 일정을 끝으로 이날 현장 답사를 모두 마쳤다. 야마모토 스미코와 실행위원회의 다른 선생들 그리고 우리 답사팀은 모두 모여 추도비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요코하마역의 한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나가와현 실행위원회에서 준비한 따뜻한 녹차를 마시며 2월의 찬 기운에 움츠린 몸을 녹였다.

차 한잔을 다 마실 때쯤 나는 답사 시간에 채 못했던 질문을 쭈뼛거리며 던졌다. 2023년 관동대학살 백주기에 대한 가나가와현의 계획이 무엇인지? 또 백주기 이후는 어찌할 셈인지? 사실 이런 질문은 조심스러웠다. 한국에는 이 아픔을 기리는 자그마한 추도물 하나 없는 마당에 이런 질문을 할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야마모토 선생이 정년퇴직을 한 건 2000년. 역사수정주의의 대두로 힘은 빠졌지만 그는 첫 마음으로 돌아가 퇴임 한 해 전인 1999년 요코하마 우시오다 초등학교에서 '츠루미(鶴見)구 어린이회'를 만든다. 조선인 학생 수가 줄어들어 여름학교를 계속할 수 없자 그는 소속 학교에 상관없이 조선인 어린이를 모으고 지역 소학교 교원들을 참여시켜 이 모임을 발족시킨 것이다.
  
야마모토는 여기서 같이 활동하던 교사들에게 다시금 '관동 조선인 대학살'에 대해 연구와 추도 활동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묵묵히 증언과 증거를 수집해 나갔다. 일본의 우경화에 맞서려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모으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은 증언과 자료로 야마모토 스미코는 논문 <요코하마에서 관동대지진 시 조선인 학살>을 썼다. 그리고 2012년 9월 1일 구보산(久保山) 추도비 앞에서 재일조선인 등 다섯 명이 모여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사실을 알고 추모하는 가나가와현 실행위원회' 결성을 다짐하고 이듬해 같은 장소에서 '가나가와현 실행위원회' 결성식을 열었다. 한 40명 오면 정도 오겠거니 생각했는데 60명 이상이 모여 풍성한 자리가 되었다.

그 후 2014, 2015년 아베가 집권하면서 많이 위축될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회원은 계속 늘었다. 또 '가나가와현 인권센터'와 '요코하마 YMCA'가 합류하면서 더욱 튼튼해졌다.

"조선인만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야마모토 스미코, 그는 평생 조선인의 인권을 위해 살아왔다. ⓒ 민병래

 
2022년 코로나 이후 처음 연 행사에는 150명 정도 되는 사람이 모여 회원 모두가 놀라워했다. 실행위는 그동안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이 더 많이 참여하게끔 학습회, 영화 상영회, 시 낭독회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는데 그 효과가 나타난 것이었다. 한편 회원들이 대부분 장년 이상인데 최근 요코하마의 조선학교 학생들이 추도회나 현장 연구 모임에 자주 참여해 큰 활력소가 되고 있다.

야마모토 스미코는 '백주기와 관련한 나의 질문'에 다소 뜸을 들이더니 신중하게 말했다.

"100주년을 맞아 가나가와현 실행위원회 회원의 바람은 지금 모임을 사단법인으로 만들고 작은 추도비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모은 자료를 하나의 보고서로 발간하고자 합니다."

실내여서 그런가 바깥의 학살지 방문 때보다는 조곤조곤한 목소리, 하지만 다짐하듯 가나가와현실행위원회 차원의 추도비 설립에 의지를 보였다.  

짧지만 긴 하루, 평가회까지 마치고 숙소로 가기 위해 요코하마역에서 도쿄로 가는 JR선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는 요코하마의 바닷빛을 담은 석양이 펼쳐졌다. 50분을 달려 조선인이 많이 정착했다는 도쿄의 우에노역에 내리니 석양은 어느새 거뭇한 빛깔을 띠었다. 숙소로 걸어가는 길,야마모토 스미코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나는 이 일을 조선인만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일본인을 위해서 합니다. 사죄하지 않으면 불행이 반복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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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야마모토, 한국인들의 끔찍한 죽음 추적중입니다 (https://omn.kr/23n30)
덧붙이는 글 1) 당시 가나가와현에 시행된 군대 파견 현황은 육전대가 상륙한 이후 3일 11시 보병 제1연대(110명)가 구축함으로 요코하마에 상륙한다. 나라시노(習志野)에서 온 기병 15연대(250명의 정예)가 3일 오후 2시 40분 육로로 도착한다. 4일 아침에는 카나가와 경비사령관 오쿠다이라(奥平)소장이 보병 제57연대(630명) 등을 이끌고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2) 이재동포위문반의 조사에 따르면 아사노 조선소터에서 48명이 학살되었다. 이는 "요코하마 아사노 매립지에서 50여 명 살해…"라는 1923년 10월 22일 자 후쿠오카 니찌니찌신문(福岡日日新聞:현재 서일본신문(西日本新聞))의 보도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3) 다바타 기요시의 증언은 우시오(潮) 1971년 9월 98~100쪽에 나온다. 여기선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국가와 민중의 책임>(논형 2013간 야마다쇼지 저) 229쪽에서 재인용했는데 약간 내용을 줄였다.
4) 가나가와현 실행위원회가 구보산에서 결성식을 한 까닭은 이 비가 지닌 사연 때문이다. 간토연구자 야마다 쇼지는 그의 책에서 이 사연을 소개했다.
 "요코하마시 니시구(西區) 구보산 묘역 내에는 '관동 대지진 순란 조선인 위령지비'가 있다. 이 비는 1974년 9월에 요코하마시의 이시바시 다이시(石橋大司)가 혼자서 세웠다. 이시바시는 1915년 7월 18일 요코하마시에서 태어났는데 관동 대지진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는 9월 3일 네기시 방면으로 피하려고 후쿠토미초(福富町)에 있던 집을 나서던 길에 구보산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반나체로 전봇대에 묶여있는 조선인의 사체를 보게 되었다.
 
그는 이를 잊지 못했다가 1970년대에 접어들어 당시 아스카타 이치오 (飛鳥田一雄) 요코하마 시장에게 지진으로 숨진 이들이 묻혀있는 구보산 묘역이 망가진 상태이니 이를 수리하고 학살된 조선인의 추도비를 세워달라고 요구했다. 여러 번 편지를 보낸 끝에 묘역 정비는 되었으나 조선인에 관한 요청은 거부되었다. 이때 이시바시는 홀로 추도비를 세우기로 마음 먹고 시 당국의 이해를 얻어 구보산 묘역 한 편에 추도비를 세웠다. 그때 이시바시는 59세였다."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국가와 민중의 책임>(논형 2013간 야마다쇼지 저) 55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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