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06 14:07최종 업데이트 23.04.25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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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0일 서울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제25회 지학순정의평화상 시상식이 있었다. 이날 수상자는 재일동포 다큐멘터리 감독 오충공이었다.

지학순 주교는 박정희 정권하에서 '유신헌법 무효'라는 양심 선언을 하며 저항하다 1974년 7월 긴급조치 1·4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는 징역 15년이라는 중형을 선고 받았고 교회 안팎은 큰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지학순의 희생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탄생하는 밑거름이 되었고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이듬해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지학순은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위원장, 한국노동교육협의회장을 맡아 민주화를 위해 계속 노력했다.

이런 그의 삶을 기려 만든 지학순정의평화상. 풀뿌리 국제인권상답게 1997년 제1회 '민주노총'을 시작으로 2011년 '캄보디아 지뢰금지운동', 2019년 '김복동과 정의기억연대' 등 굵은 발자취를 남긴 단체와 인사들이 이 상을 받았다.

오충공 감독은 다큐멘터리를 통해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의 진실을 꾸준히 밝혀왔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아 2023년 수상자가 되었다. 특히 올해는 관동대지진 100주년이고 그의 세 번째 작품 <1923 제노사이드, 백년의 침묵>(가제)이 개봉될 예정이어서 수상의 의미는 더욱 컸다.

오 감독은 감사 인사에서 "새로운 작품에 대한 격려로 받아들인다"라며 "일본에서 수십 년씩 관동대학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시민운동을 해온 사람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라고 말했다. 
 

3월 10일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지학순정의평화상을 받은 오충공 감독. 그는 새 작품을 격려하는 뜻으로 받아들인다고 인사말을 했다. ⓒ 민병래

 
첫 작품 <감춰진 손톱자국>

1983년에 발표된 오충공의 첫 번째 작품 <감춰진 손톱자국>은 아라카와 유골 발굴 현장에서 시작한다. 1950년 오카야마대학 교육학부를 나온 기누타 유키에(絹田幸惠)는 도쿄 아타치(足立)구의 한 소학교에서 재직할 때 어떤 학생으로부터 아라카와 강의 유래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 그는 마을 노인을 찾아다니며 이모저모 강의 역사를 조사한다.

기누타는 이 과정에서 아라카와 방수로 공사 현장에 조선인 노무자가 많았고 관동대지진 때 이들이 학살 당해 이 둔치에 묻혔다는 증언을 접한다. 그에게 "죽은 조선인들의 뼈가 그대로 묻혀 있을 텐데 독경이라 해줘야 하지 않을까"라는 노인의 말이 가슴 아리게 다가왔다.

그때부터 기누타는 에도가와구에서 네 차례 구의원을 했던 사회당 출신의 다카노 히데오(高野秀夫)와 손잡고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하고 추모하는 준비 모임'을 만들었다. 시민들의 호응이 커 백여 명 이상이 모였고 사무국, 문헌반, 발굴준비반 등으로 역할을 나눴다. 지역 노인의 많은 증언을 채록했고 매장된 장소도 콕 짚을 수 있을 정도로 발굴 준비를 해나갔다.

마침내 기누타는 (아라카와가 국가 관리 하천이기에) 건설성과 협의를 했고 하루 한군데씩 3일만 그리고 발굴 당일 원상 복구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으로 발굴 허가를 받았다.

학살 60년 만인 1982년 9월 2일 아라카와의 하류, 학살이 가장 심했던 곳인 (구) 요츠기바시(지금의 기네가와 다리 옆) 아래 둔치에서 발굴이 시작되었다. 추도 집회가 열리고 기병연대의 학살을 증언한 노인이 첫 삽을 떴다. 많은 언론사와 학살을 겪고 살아남은 재일동포 그리고 (가해 당사자였던) 일본인들이 모여들었다.

굴착기를 동원해 깊이 파 내려갔다. 9월 2일과 3일, 태풍 때문에 잠시 멈췄다가 7일, 이렇게 삼일 동안 작업했지만 유골이 나타나지 않았다. 60년이 지났기에 장소를 제대로 짚지 못한 면도 있었겠지만 유골이 나오지 않았던 이유 한 가지가 옛 신문에 의해 밝혀졌다.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의 관헌은 계엄령을 틈타 조선인만이 아니라 일본의 사회주의자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9월 3일과 5일 사이에 가메이도 경찰서에서 나라시노 기병연대의 병사들이 사회주의자인 노동운동가 10여 명을 참살한 것이다.

이때 혼란 상태에서 일본인 자경단원 4명도 함께 살해 당했다. 자경단원의 유족은 항의했고 10월 10일이 되어서야 계엄당국은 살해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정당한 법집행이라고 주장했다. 유족들은 뼈라도 수습하겠다고 했으나 경찰은 조선인과 함께 묻혀 구별할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유족이 11월 13일부터 독자 수습에 나서겠다고 통보하자 경찰은 유골을 몰래 빼돌렸다. 당일에는 유족의 현장 접근을 막았다. 그리고 11월 17일에는 2차로 세 트럭 분의 유골을 파내어 어디론가 가져갔다. 바로 이 은폐 행위 때문에 유골 발굴이 어려웠던 것이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여러 장소를 파보았다면, 은폐 작업에도 불구하고 유골을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허가받은 시간은 단 3일. 마지막 날 아쉬움이 가득한 채 땅은 메워졌고 들끓었던 관심은 사위어질 뻔했다. 
 

아라카와 주변 약도.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유골 발굴 장소다. ⓒ 민병래

 
그런데 아라카와 강변에 청년 오충공이 있었다.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던 그는 전공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민이 컸다. 역사와 문학을 좋아했던 오충공은 학교를 중퇴하고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었다.

이후 그는 영화로 눈을 돌려 재일조선인 원자폭탄 피폭자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세상사람들> 제작에 조감독으로 참여했다. 오충공은 영화를 체계적으로 공부하려고 이마무라 쇼헤이가 만든 요코하마 방송전문학교(현 일본영화대학)의 다큐멘터리학과에 들어간다. <나라야마 부시코>를 만든 이마무라 쇼헤이는 일본의 젊은 영화학도들이 선생으로 모시고 싶어하는 감독이었다.

역사적 다큐, 세상에 선보이다

오충공이 졸업 작품을 준비할 때였다. 한 일본인 친구가 작가 요시무라 아키라가 관동대학살에 관해 쓴 책을 보고 이를 작품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뚜렷한 기획서가 있는 건 아니고 팀을 꾸려 작업을 해보자는 수준이었다.

바로 그때 아라카와 유해 발굴에 관한 뉴스가 들려왔다. 오충공은 졸업 작품으로 승인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학교에서 촬영 장비를 빌려 일본인 학우들과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발굴 모습을 영상에 담으면서 때로는 삽을 들고 땅까지 팠다. 유골이 나타나지 않으니 난감하고 막막했다.

하지만 오충공은 아라카와 강변에서 학살을 목격한 일본인 그리고 현장에서 살아남은 재일동포 1세 조인승을 만나게 된다. 오충공은 이들의 증언을 영상에 담아 1983년 관동대학살을 다룬 최초의 다큐멘터리 <감춰진 손톱자국>을 세상에 선보인다.
 
다리 밑에서 제방을 봤더니 하천 옆, 둑 경사면에 참살 당한 조선인들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지. 여섯 일곱명 있었던가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 누워 있었지. 얼핏 봐도 노동자처럼 보였어. 아이는 없었는데 30살에서 40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도 한 명 있었어. 많이 저항한 모양으로 손이 잘려있었는데 잘린 단면이 보였지.
- 당시 부친과 수레를 끌고 나리히라에서 아라가와로 향하고 있던 시마가와씨

여섯 일곱 명이 거의 발가벗겨져서 뒤로 이렇게 묶여서 줄줄이 끌려왔어요. 앞뒤로 작업복을 입은 자들이 줄을 잡고 있었는데 석탄이 타고 있는 불구덩이 쪽으로 와서 멈췄어, 그리고는 한 사람씩 한 사람은 몸체를 잡고 한 사람은 다리를 잡고는 이런 식으로 타고 있는 불 속에 (산 사람을) 던져 넣었어요. 나도 어렸을 때라 차마 제대로 볼 수가 없었어.
- 지금도 꿈에 나타난다는, 다카세 요시오
 
영상에는 참혹한 살육 장면이 생생하게 증언된다. 일본인이 글로 남긴 수기와 회상은 많았지만 학살에 관해 이렇게 자기 얼굴을 드러내고 말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이 다큐는 역사적이다.

물론 쉽게 얻어지지 않았다. 이 다큐를 찍을 때 오충공은 27살, 증언자들은 대부분 80대 안팎으로 할아버지와 손주뻘이었다. 또 일본인과 조선인이라는 간격이 있었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 오충공은 진정성을 보였다. 카메라 없이 찾아가 담소도 나누고 같이 목욕탕도 가고 게이트볼도 쳤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마음의 문을 열어 '들었다'가 '보았다'로 바뀌는 진실한 증언을 담아냈다.

재일사학자 강덕상은 이 작품을 평하며 "오충공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졌다"고 말했다. 귀중한 증언을 얻어내기 위해 마음 졸였던 청년의 마음이 헤아려졌던 모양이다.
 

<감춰진 손톱자국> 포스터 사진은 자경단에 끌려가는 조선인의 모습이다. ⓒ 오충공제공

  
피맺힌 조인승의 증언

한편 <감춰진 손톱자국>에선 조인승의 체험이 복원된다. 조인승은 학살 당시 22살로 경남 거창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머슴살이를 했다. 어머니는 중풍으로 아버지는 뇌출혈로 여읜 그는 흰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얘기에 일본으로 왔다. 사촌형과 도쿄 오시아게에 둥지를 튼 조인승은 막노동을 하다 학살에 휘말린다.

그는 지진이 난 9월 1일 밤 요츠기 다리를 건너 도쿄 도심 반대편 아라카와 제방으로 갔다. 거기서 소방대원한테 잡혀 피난동포 15명과 함께 새끼줄로 묶여 강변에서 밤을 지새운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소방대원에 이끌려 다시 다리를 건너 도심쪽에 있는 데라지마 경찰서로 연행되어 간다.
 
다리를 건너는데 형처럼 보이는 시체가 있어 확 뛰쳐나갔지. 도망간다고 낫으로 다리를 찍혔어. 다리를 다 건넜을 때 우리 일행 중 3명을 나오라고 하더니 소방대원인지 뭔지가 때려 죽였어. 산사람을 쳐 죽이니까. 발버둥을 치고 너무 처참했지.
 
1일 밤에서 2일 아침 사이에 그는 참혹한 일을 겪었다. 이유도 없이 붙잡혔고 거리 곳곳에 널려있는 동포의 시체에 부들부들 떨었다. 경찰서에 끌려가는 길 내내 그는 무서움에 진저리를 쳤다.
 
나는 한가운데 몸을 웅크리고 걸었지. 옆으로 가면 머리를 맞으니까, 여자든 아이든 상관없어. 빈손이 아냐. 망치든 칼이든 손에 들고 이 사람이 아니어도 옆사람이 죽이고 옆에 있는 일본인이 죽이지 말라고 해도 모두 하나가 되어 죽이는 거야.

가까스로 도착한 경찰서에서도 그는 보호받지 못했다. 2일 밤 경찰서 마당에서 잘 때 갑자기 자경단이 몰려오는 듯한 소리에 350명 가까운 동포들이 깨어나 이리저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경찰에게 다 붙잡혔고 일부는 죽임을 당했다. 경찰서 구내에서도 지옥은 계속된 것이다.

그렇게 겨우 목숨을 건진 조인승은 9월 14일이 되어서야 30km 가까이 떨어진 지바의 나라시노 수용소로 가게 된다. 주먹밥 2개를 지급 받고 진창길을 맨발로 걸어서 간다.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 당한 조선인은 6661명이라고 알려져 있다(관련기사: 끔찍한 살인 숨기는 일본, 진정 우리의 파트너인가 https://omn.kr/22xwy). 학살에서 살아남은 동포들이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 나눈 인사가 "오오, 살아계셨습니까!"였으니 그 참담함이 오죽했을까?

일본은 학살 범죄를 은폐하려고 시체를 강물에 띄워 보내거나 휘발유를 뿌리고 태워버렸다. 그러니 유해를 찾을 길이 없다. 조인승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사촌형이 나보다 네살 위다. 지금 살았으면 86세가 되었을 것이다. 뼈라도 어디 묻혔는지 알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긴다.

이런 끔찍한 경험을 한 조인승은 오랫동안 후유증에 시달렸다. 23살 차이가 나는 아내 박분순과 결혼했는데 수십년 동안 악몽에 시달리고 밤중에 벌떡 일어나 발버둥을 치곤 했다. 후유증을 겪은 건 그만이 아니다. 많은 동포가 눈앞에서 가족이 맞아 죽고 불에 타는 모습을 겪었으니 그 충격이 오죽했을까?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경상남도 하동군 출신의 유학생 '정인영'은 그 정신적 상처를 못 견뎌 자살까지 했을 정도다.

<감춰진 손톱자국>은 발표 후 언론의 많은 조명을 받고 청구문화신인상을 받았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자신이 만든 학교에서 이렇게 힘이 넘치는 다큐멘터리스트가 나온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오충공을 격려해주었다.

그러나 오충공에게 <감춰진 손톱자국>은 미완의 작품이었다. 그는 "유골이 발견되었으면 관동대학살을 다룬 내 영화는 한 매듭 지을 수 있었다. 그 후 다른 주제나 극영화로 옮겨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골이 발견되지 않아서 나는 이 주제를 놓을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2편 인근 마을에 조선인 넘겨 살해하게 한 일본 당국(https://omn.kr/23ckt)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1) 1998년 국제영화제 초대작으로 상영될 때 번역 제목이 <숨겨진 손톱자국>이었다. 2016년부터 이 영화의 국내상영운동을 시작할 때 배급사 미디어세림(대표 신채원)과 오충공 감독이 '숨겨진'보다는 '감춰진'이 조금 더 주체성을 담고 있다고 판단해 <감춰진 손톱자국>으로 번역 제목을 확정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의 기억과 수용>(신채원의 성공회대 석사학위논문. 2021)
2) 아라카와방수로 공사는 1910년 대홍수 이래 1911~1930년까지 시행되었는데 이와부치 수문에서 도쿄만에 이르는 길이 22km의 큰 공사였다.
3) 당시 조선인 노무자는 대부분 합숙소 생활을 했고 부근 가메이도 남쪽의 오지마(大島) 부근에는 중소기업이 많이 있어 조선인 직공이 적잖이 일했던 터였다. <독립신문>에는 아라카와 부근과 구역 내에서 약 120여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4) <동아일보> 1923년 10월 6일 자에 정인영에 관해 아래와 같은 기사가 나온다. " 일본에 가서 오랫동안 고학을 하던 정인영(鄭寅永, 30)씨는 지난 9월 27일 밤 동경부하 하호총정 취방(東京府下 下戶塚町 趣訪) 173번지 촌송(村松) 방에서 친구들과 함께 자다가 새벽쯤 되어 가만히 일어나서 책상 위에 있던 면도칼을 들고 그 집 변소에 가서 머리와 가슴을 함부로 찔러 자살을 하였는데, 그 원인은 아직 알 수 없으나 그는 본래 자기의 처지를 비관하던 중 지난번 진재 당시에 가진 위험을 당하고 신경에 무슨 이상이 생겨서 그가 취한 듯하다는데, 그의 본적은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상가리(慶尙南道 河東郡 靑岩面 上架里)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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