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27 11:41최종 업데이트 23.02.27 11:41
  • 본문듣기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원칙과 방식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문장은 간결하고 명확하게'가 아닐까?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독자에게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다면 본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그런데 문장이 길어질수록 그런 일이 생길 가능성이 커진다. 주어와 술어가 호응하지 않거나 목적어가 엉뚱한 자리에 배치되거나 잘못된 조사를 쓰게 된다. 겨우겨우 이 모든 위험을 피해 아주 길고 완벽한 문장을 만들었다고 해도 문제가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다.


문장이 너무 길면 글쓴이가 정확하게 써도 독자가 글을 잘못 읽을 가능성이 있다. 긴 문장의 시작과 중간을 기억하며 마지막까지 온전하게 그 내용을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요즘은 모바일의 시대가 아닌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글을 읽던 사람들이 긴 문장을 읽다가 내려야 할 곳을 놓치는 건 생각만 해도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명확하게'는 '간결하게'보다 지키기 쉬운 원칙처럼 보인다. 쓰고자 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쓰기만 하면 될 것 같다. 하지만 이 또한 만만치가 않다. 특히 글쓴이가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글이 그렇다. 머리에 떠오른 생각과 감정을 내가 고른 말에 온전히 담고 그걸 상대방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게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니다.

가령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하는 소소한 말다툼을 떠올려보라. 대부분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와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어야지'의 반복이다. 이런 다툼은 대부분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해서 발생한다.

'안 해서' 벌어지는 경우도 있다. 상대방이 듣기에 껄끄러운 주장을 해야 하거나 말을 하고 나면 책임을 져야 할 경우에 사람들은 표현을 모호하게 흐리곤 한다. 사람들과 점심 메뉴를 고를 때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지 않나. 사실 마음속으로는 비빔밥이 먹고 싶지만 '피자는 너무 느끼할 거 같아요'라고 말하는 일.

'간결하고 명확하게', 이 원칙을 지키기 어려운 이유

원칙은 꽤나 강경한 것이다. 한마디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으로 지정되었다는 건 무슨 뜻일까. 아마 지금까지 이를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했다는 뜻이 아닐까. 그만큼 '간결하고 명확하게 쓰기'는 중요하지만 지키기 쉽지 않은 원칙이다.

주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 그리고 소수자의 입장에서 글을 쓰는 내게는 더욱 그렇다. 사람들에게 보편적이고 익숙한 내용을 설명하고 거기에 기반해 주장을 펼치는 건 비교적 쉽다. 하지만 '보편'이 아니라 '예외'로 규정되어 배제된 존재, 제도가 일부러 무시했기에 잘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건 무척이나 어렵다. 

가령 '체벌은 아동학대이기에 금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어떨까. 아마 누군가는 체벌 또한 교육의 방식이므로 무작정 금지할 수 없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폭력을 당하지 않는 건 기본적인 인권이고 아동 또한 여기서 예외는 아니라는 건 이미 익숙한 전제이다. '체벌 반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그 주장이 무슨 내용인지 이해는 할 수 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의 자율적인 성별 정정은 인권의 문제다'라는 말은 어떨까. 이제는 트랜스젠더의 존재가 사회에서 그리 낯설지는 않다. 하지만 '개인의 성별은 태어날 때 지정이 되는데 누군가는 지정 성별과 자신의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부터 이해시키기 어렵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성별을 타고나는 자연스러운 것이라 인식하기에 이런 선입견 밖에서 생각하도록 하는 게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성별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만든 제도와 문화의 탓이다.
 

글쓰기 ⓒ pixabay

 
글을 쓰며 어느 순간 느껴진 불편함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를 최대한 간결하고 명료하게 써야 하는 상황은 최근에 더욱 많이 생겼다. 개인적인 이유인데, 나이를 점점 먹으며 그렇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며 나도 친구들도 이전에는 멀게만 느껴졌던 삶의 양식으로 한 발짝 다가서고 있다.

예를 들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아졌다. 그 친구들과 대학을 다닐 때는 정말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일이었다. 불가능한 미래는 아니지만 당장은 내 것이 아닌 일. 그래서 당시에는 결혼이나 육아에 대해 다소 냉정하게 말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이성애자인 친구들도 부모님의 결혼 생활을 지켜보며 냉소적인 농담을 던지고는 했다. 하물며 동성애자로서 애초에 결혼 제도에서 배제된 나는 어땠을까.

하지만 시간이 흘러 상황이 달라졌다. 나는 여전히 이성 간 결혼이 매우 제도화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결혼하는 일이란 제도에 편입되는 것일 뿐 그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냐'고 묻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단지 아무리 개인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일에도 제도는 늘 개입할 뿐이다. 그게 사회의 기본적인 특성이다.

예를 들어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에는 개인적인 면도 있지만 사회는 그런 노동에 최소한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불해야 하고 어떤 지시는 해선 안 되는지 미리 정해둔다. 제도를 만들어두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한 아무런 소명이나 신념도 없이 제도화된 노동시장으로 편입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과 존중을 담는 글쓰기

이성 간 결혼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무런 부연을 하지 않는 게 과연 괜찮은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제도화된 이성애, 결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와중에도 인스타그램을 켜면 배우자나 아이와 함께 행복해하는 친구들의 사진이 올라오곤 했다. 친구들이 올린 방긋 웃는 갓난아기들의 사진을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공평하게 글을 쓰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연하기 시작했다. 이성 간 결혼이 제도화 되어 있다는 말이, 결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부인하는 뜻은 아니라고. 사람들이 그 속에서 느끼는 애틋함·행복함·간절함·친밀감은 모두 진실된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고. 비록 그 제도에 차별적인 부분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게 글은 더 길어진다.

지금은 확고하게 단언할 수 있는 주제들이 내게 있을 것이다. 다만 확실한 건 세월이 내가 계속 그러도록 내버려 두진 않을 것이란 점이다. 나도 친구들도 나이를 먹으며 삶의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 것이다. 아니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혹은 그저 갑작스럽게 세상이 바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새로운 위치에 서게 되면 이전에는 쉽게 판단했던 주제들에 대해 더욱 복잡한 고민이 생기고 '간결하고 명확하게' 쓰는 일은 더욱 어려워질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미래를 겸허하게 수용하고 싶다. 원치 않게 글이 복잡해지지만 그나마라도 간결하고 명확하게 쓰려는 분투가 그 누구의 존재도 경험도 감정도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기 위한 것이라면, 그렇게 함께 가기 위한 것이라면 나는 그것이 가치 있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정체성도 삶의 방식도 모두 다양하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각양각색의 사람들 모두를 온전히 존중하고 아끼고 싶다. 내가 쓰는 글이 어느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원고 하나에도 가능한 깊은 주의를 기울이는 근본적인 이유다. 만일 이 일을 할 수 없거나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는 글을 쓰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