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13 06:44최종 업데이트 23.02.13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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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새벽 7시, 서울시 강동구 강동경희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임보라 목사의 발인이 진행됐다. ⓒ 김성욱

 
어떤 순간 사람이 긴장을 많이 하면 시간이 흘러 나중에야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의문을 품곤 한다. 나에게 임보라 목사와의 첫 만남이 그런 순간이었다. 2018년 비온뒤무지개재단 활동가로 일을 시작한 해에 '나는 앨라이입니다' 캠페인의 일환으로 종교인 앨라이(성적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사람) 인터뷰 프로젝트를 맡았다. 다섯 명의 종교인 중 첫 인터뷰이가 바로 임보라 목사였다.

성적소수자 인권운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임보라 목사는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을 비롯해 성적소수자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를 위한 집회나 행사에서 연대발언을 이어갔다. 소수자에게 차별 없고 평등한 교회인 '섬돌향린교회'를 이끄는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다. 신문에서나 보던 사람을 직접 그것도 홀로 만나야 한다니 여간 긴장되는 게 아니었다.


인권재단사람이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있던 시절 단체의 건물 5층에 자리한 섬돌향린교회에서 임보라 목사를 만났다. 낯섦과 긴장 속에서 나의 바람과 달리 캠페인용 사진을 찍은 사진사는 먼저 자리를 떴고 따스한 가을 햇살이 비춰오는 테이블에 임 목사와 단둘이 앉았다. 전날까지 질문지를 고치고 보강한 덕분에 인터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다. 임보라 목사의 반려견인 찹쌀이었다. 인간의 인터뷰는 지루했던지 찹쌀이는 교회 한쪽에 앉아 자기가 사랑하는 장난감을 잘근잘근 물고 있었고 찹쌀이에게 물린 장난감은 계속해서 '삑! 삑! 삑!' 하는 소리를 냈다.

임 목사가 진지하게 기득권 친화적이었던 종교 역사를 설명하는 가운데 난입한 이 어울리지 않게 애처로운 소음은 곧바로 나의 웃음 세포를 자극했다. 하지만 임보라 목사의 이야기는 웃을 수도 없고 절대 웃어서도 안 되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허벅지를 꼬집으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누르느라 고생했다.

이제는 답을 얻을 수 없는, 떠오른 질문

"그런데 임보라 목사님은 왜 안 웃으셨지?"

며칠 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임보라 목사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장례식장은 서울 강동구 끝자락에 있었고 신촌의 사무실에서 거기까지 가려면 서울을 가로질러야만 했다. 누가 목사 아니랄까 봐 마지막까지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헛헛한 농담을 하면 슬픔이 차지할 자리가 조금이라도 줄어들 것처럼.

장례식장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임보라 목사에 대한 기억을 돌아보기에 충분히 길었다. 시곗바늘을 천천히 거꾸로 돌리며 기억을 복기하다 2018년 그 순간에 도달했다. 그러자 궁금증이 든 것이다. 그 상황이 임보라 목사에게도 웃기지 않을 리 없는데 왜 웃음을 터트리기는커녕 그런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을까. 이제는 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이다.

막연한 추측보다는 그나마도 확실한 답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 답은 인터뷰에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 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를 다시 읽으니 다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임보라 목사가 어디서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담아보겠다는 야심이 있었는데 사실 대부분의 질문들은 다른 인터뷰나 글에서 임보라 목사가 이미 했을 법한 이야기를 묻고 있었다.

아마 나라면 질문지를 사전에 받았을 때, 그렇게 성실하게 답하고 싶지 않았을 거 같았다. 어디 어디에 어떤 글이 있으니까 그걸 참고하시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인터뷰 당시에도 임보라 목사가 답을 길게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질문 다음에는 길고 구체적이며 성실한 답변이 남겨져 있었다.

사람과 세상에 진지하고 진중했던 사람
 

2014년 5월 20일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저지 운동을 펼치다 벌금형을 선고 받은 임보라 섬돌향린교회 목사가 서울 서초동 중앙지법 앞에서 벌금형에 저항하며 자진 노역을 결의하는 기자회견을 하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연합뉴스


인터뷰를 모두 읽고 나니 답이 보였다. 임보라 목사는 인터뷰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찹쌀이가 어떤 소음을 만들어도 그게 들리지조차 않았을 것이다. 그때야 대답에 완전히 집중하여 골똘히 생각하는 임보라 목사의 모습이 그림처럼 떠올랐다.

임보라 목사는 이제 막 활동가가 된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요청한, 당시에는 단체의 블로그에만 실릴 예정이었던 인터뷰에 나보다도 더 진지하고 진중한 태도로 임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 인터뷰였음에도. 그리고 이는 임보라 목사가 세상과 사람과 삶에 보인 태도이기도 했다.

특히 내 주변 성소수자 친구 중에 힘들 때 임보라 목사를 찾아 많이 기댔다는 사람이 많았다. 임보라 목사는 직업도 직업이거니와 어느 정도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기에 내가 모르는 사례들도 많을 것이다. 실제로 부고 소식 이후 삶이 힘든 시절 임보라 목사를 찾았을 때, 별다른 인연이 없었음에도 그가 얼마나 격의 없이 이야기를 들어주었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많았다.

누군가의 고통과 고민을 껴안는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상대방의 안타까운 처지에 진심으로 공감하지 않고서야 그럴 수 없다. 임보라 목사는 소수자들의 투쟁 현장에 늘 함께한 것으로 유명했다. 나도 집회를 갈 때마다 마이크를 잡고 연대 발언을 하는 임보라 목사의 모습을 늘 만났다.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장에 가는 것도 고생이고 발언을 준비하는 것도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의제를 정확히 파악해야 제대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수자들의 의제를 진지하고 진중하게 받아들여야 연대를 이어가는 것도 가능하다.

임보라 목사가 종교인이자 사회 운동가로서 어떤 행보를 남겼는지 정리하는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이 짧은 글에 그걸 담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임보라 목사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가치를 남겼으며 우리는 무엇을 이어가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어쩌면 그것은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진지하고 진중한 태도가 아닐까. 한쪽에서는 '내가 알 바냐'를 다른 쪽에서는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를 외치는 시대, 정직함과 선량함이 점점 위선이라 비웃음을 사는 세상에서 이는 너무나 소중한 가치다. 임보라 목사를 보내는 것이 더욱 가슴 아픈 이유다.

춤과 노래를 사랑하고 개와 고양이와 살며 숲을 보는 사람

마지막으로 남기는 부연.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묘비명으로 무엇을 새기고 싶은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건 내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느냐는 질문과도 같았다. 그때는 없다고 비워두겠다고 했는데 최근에는 생각이 좀 바뀌었다. 글을 쓰고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했던 사람 정도로 기억되기는 싫었다.

가령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좋아했는지도 함께 이야기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내가 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 소설가인 듀나를 팬덤 수준으로 좋아한다는 것도 사람들 기억에 남았으면 좋겠다. 지금도 틈만 나면 듀나를 영업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사후에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임보라 목사는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임보라 목사의 어린 시절 김추자와 남진은 지금의 아이돌들과 같았고 임 목사는 그들의 춤을 무척 잘 췄다고 한다. 노래패 활동을 했고 학교 축제 무대에도 섰으며 '기독교계의 노찾사'라고 소개되기도 했다. 스트레스가 심하고 에너지가 바닥일 때도 있지만 퀴어퍼레이드에서 사람들과 춤을 추며 행진하면 엄청난 힘을 받았다고 한다.

직함과 하는 일을 빼고 편히 자기소개를 해달라고 했을 때, '개와 고양이와 사는 초록나무'라고 답했다. 초록나무는 임보라 목사의 별명인데 성의 한자가 '수풀 임'이고 이름에 '보아라'라는 뜻도 담겨 있어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춤과 노래를 사랑하고 개와 고양이와 살며 숲을 보는 사람, 임보라 목사가 많이 그리울 것이다. 이제는 평안과 행복이 영원히 임보라 목사의 곁에 함께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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