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베이
동행인 중 한 사람과 카페에서 단 둘이 커피를 마셨다. 처음에는 모르는 척 서로의 일상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하지만 방안에 이미 들어온 코끼리가 알아서 사라지겠는가. 동행인은 결국 커피를 마시다 눈물을 흘렸다. 왜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그 친척이 저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왜 하필 가장 정 많고 살갑고 타인에게 잘 베풀던 선한 사람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냐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건 내게 익숙한 질문이기도 했다. 많은 경우 성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건 다른 이들에 비해 더욱 빠르고 자주 부고를 접하게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거의 해마다 한 번에서 두 번은 멀고 가까운 사이의 동료들을 보냈다. 이를 악물고 질문했다. 왜 하필 당신인가.
사람이 죽는 데는 분명한 원인이 있다. 암에 걸려서, 우울증을 앓다가, 사고로 혹은 재해로. 많은 경우 이 원인에는 사회적인 문제가 엮여 있기도 하다. 우리가 치열하게 이유와 원인을 질문해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질문이 '왜 하필 그 사람인가'가 되면 거기서부터는 딱히 답을 구할 수 없다. 반드시 그 사람일 이유가 없다는 건 역설적으로 아니어야 할 이유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건 사람이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다.
동행인에게 그렇게 말했다. 여러 번의 부고를 겪고 나니 알게 된 게 있다고. 이유를 질문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비난해도 괜찮다고. 하지만 절대로 답을 구하려고 해선 안 된다고. 그건 가능한 일도 아닐뿐더러 사람을 망가지게 만들기도 한다고.
막연한 한 해의 시작이라도 외롭지는 않기를 바라며
언젠가 본 영화에서 중년 남성인 등장인물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자기 자신을 더 잘 알수록 세상에 덜 흔들리게 된다고. 어린 나이에 영화를 보던 나는 생각했다. 저 나이를 먹도록 스스로를 모른다면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적어도 자기 자신과는 365일을 내내 함께할 텐데.
하지만 결국 시간이 흐르고서야 알게 된 건, 삶에서 했던 많은 선택 중 사실은 내 욕구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게 정말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고 원하는지 판단할 근거가 별로 많지 않게 된다. 반추를 반복할수록 점점 모호해진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나를 모르는만큼 세상을 잘 알기도 어렵다. 특히 사람이 나고 죽는 것과 관련하여서는 더욱 그렇다. 원리는 알 수 있지만 결과는 결코 모르는 가장 대표적인 영역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건 늘 반복되는 일이다. 마치 해가 지면 다시 달이 뜨는 것처럼. 하지만 누가 우리에게 오고 언제 떠나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그 일이 정말로 벌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람이 알 수 없는 영역에 답을 구하고자 골몰하면 현실을 살아갈 수 없다. 필연적으로 상처를 입고 무너지게 된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소리치는 것과 같다. 그런 맥락에서 내게 겸손은 일종의 생존전략과도 같다. 모를 수 밖에 없는 게 있다면 그 영역의 순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자 한다. 아플수록 무릎을 꿇어야 하는 일은 분명히 있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나면 정말로 고개를 들어야 할 곳이 어딘지 보인다.
2023년이 끝나고 2024년이 왔다. 시간과 날짜는 인간이 정한 것이기에 세상은 그와 무관하게 움직인다. 2023년의 막바지까지도 세상은 시끄러웠고 누군가는 더욱 심란한 연말을 보냈을 것이다. 연말의 여파가 이어지며 누군가는 심란한 새해를 시작하고 답이 없는 질문을 품은 채 방황할지도 모르겠다. 원하지 않는 방식의 마무리였고 시작일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전할 확신이 담긴 위로는 없다. 무엇도 어떻게 되리라 약속할 수 없으니까. 다만 분명한 건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헤매겠지만 결코 홀로 그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유도 사연도 각각 다를지라도.
한 해의 시작이 막연하고 심란할지라도 외롭지는 않기를 바란다. 조금만 더 함께 마음을 추스르고 용기를 내보자. 그리고 견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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