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31 20:08최종 업데이트 23.01.3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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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말]
윤석열 대통령이 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교육부·문화체육관광부 2023년도 정책방향 연두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교육을 하나의 서비스와 용역이라고 보고, 수요자와 공급자가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대통령실

복합위기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에게는 어떤 교육 철학이 필요할까?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매우 적극적으로 자신의 교육관을 피력해왔다. 취임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그는 "교육부의 첫 번째 의무는 산업인재 공급"이며, 교육부는 "스스로를 경제부처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과 협의해 이전 교육부와는 다른 기준으로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해에 들어서면서 그의 "다른 기준", 즉 시장 중심적 교육관은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교육부 신년 업무보고 자리에서 이례적으로 긴 모두발언을 통해 윤 대통령이 강조한 것은 시장의 자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교육 시장의 자유였다. 그는 "교육을 하나의 서비스와 용역이라고 보고, 수요자와 공급자가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거리낌 없이 말했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 학생들은 상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무한경쟁을 뚫고 기업이라는 수요자의 선택을 받으려면 학생들은 "쓸모 있는" 상품이어야 한다. "잘 팔리는" 전공을 선택하고 스스로의 경쟁력을 키워 인재 시장에서 적자생존 하는 것이 바로 학생들에게 주어진 시장의 자유다.

윤석열 정부는 교육 현장에서 시장의 원칙을 충실히 구현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교육을 위한 최선이라고 믿고 있다. 자연히 시장 경쟁에 유리하고 경제적 수요가 많은 분야가 교과과정에서 더 우선시된다. 윤 대통령에 따르면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기술과 같은 분야가 그것이다. 그는 "디지털 인재를 많이 양산해서 산업계에 공급하는 것이 교육의 책임"이라며,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교육의 방향은 자유주의"라고 한마디로 정리해버렸다.

실제로 현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은 학교 서비스 시장화, 자유 경쟁을 통한 산업인재 양성, 대학 규제 철폐와 경쟁에 기반한 적자생존, 기업 및 산업 수요(특히 디지털 기술)에 최적화된 교과과정, 디지털교육기획관 신설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2024년부터 대학들은 총입학정원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자유롭게 학과를 개편할 수 있다. 따라서 학과의 신설·통합·폐지도 자유로워진다. 예컨대 가장 쉽게 떠오르는 시나리오는 인문계열(특히 문학·사학·철학) 정원을 축소하고 공학계열 정원을 늘리는 것이다. 역시나 교육부는 자율화 정책 덕분에 "4차 산업혁명과 같은 산업구조 재편에 적합한 학과 개편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학마저 각자도생 시장 될 것
        
물론 사회 변화에 조응하는 유연한 교육 현장을 설계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소위 4차 산업혁명이 시대의 변화를 모두 반영하는 것은 아니며, 시장이 우리 사회의 전부도 아니고, 교육의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단순 환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학생들이 시장에 호응하는 발 빠른 산업 인재가 되어야 할까? 그저 "돈 되는 전공"을 우선시하는 시장친화적 대학 환경에서 복합위기의 시대를 살아갈 역량을 기를 수 있을까?

이미 교육 현장은 많은 면에서 시장화되어 있다. 그러나 현 정부의 정책은 "자유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학교의 시장화를 가속화하고, 대학 내의 삶마저 각자도생과 적자생존으로 바꿔버릴 것이다.

학생들은 기초학문을 공부하고 싶어도 자원과 선택지가 없어 취직이 잘 되는 학과를 택해야 할 것이고, 동시에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학점 관리에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경제적 성취를 최고의 성공으로 간주하는 교육 관료들의 정책 비전 속에서, 열린 탐색과 깊은 모색을 할 기회는 사라지고 학생들은 오직 스스로의 상품성을 기준으로 달리게 된다.

시장화된 학교는 학생들의 삶, 건강, 그리고 학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자유 경쟁 시장"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이들은 누구이며, 가장 먼저 낙오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능력주의와 비장애중심주의(ableism)를 당연하게 내세우는 정책 기조 앞에서 경쟁의 문턱조차 밟지 못하는 학생들은 없을까.

혹시 학생들은 이미 지쳐서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우리가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지난달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이태원 참사 생존자를 우리는 구하지 못했으니까.

지금의 10대와 20대는 우리 모두에게 큰 상처를 입힌 사회적 참사를 직접적으로 경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장기화된 재난이라고 할 수 있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본질적으로 달라진 학습 환경을 갑작스럽게 받아들여야 했다.

이것은 그저 온라인 수업을 위해 디지털 기술을 잘 활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코로나 학번"이라고 불리는 20대들 사이에서 실제로 정신질환이 증가하고 있다. 이에 대한 주의 깊은 관심과 대처가 시급하다.

2021년도 20대 우울장애 환자는 17만 8867명, 공황장애 환자는 3만 2471명, 양극성장애 환자는 2만 8089명,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환자는 3347명으로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특히 모두가 정신과를 방문해 진단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할 때 통계에 잡히지 않은 이들도 많을 것이다.

불행히도 한국의 대학은 정신적 위기에 처한 학생들을 위한 배려와 돌봄의 체계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다. 교육 현장의 유연성은 바로 이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정신질환이 있으면 학습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를 맺거나 유지하는 것도 어렵게 된다. 셔터스톡

트라우마를 비롯한 정신질환이 있으면 집중력과 지구력을 요하는 학습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를 맺거나 유지하는 것도 어렵게 된다. 친구와 동료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교수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힘들다. 실은 그 누구보다도 담당 교수가 학생들의 어려움을 헤아려주는 것이 필요하지만 정작 고통의 당사자인 학생들은 선뜻 입을 떼지도, 자신의 처지를 알리지도 못한다.

모든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하고 정신적 위기에 적극 응답하는 학교 현장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교육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정책을 개선하는 것이 시급하다.

첫째, 신체장애에 주로 집중된 학생 지원 절차를 정신질환까지 확대해야 한다. 특히 현재 장애인복지법으로 인정받는 정신질환은 매우 제한적이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질환으로 인정받지 못할 뿐 아니라, 정신질환의 경우에도 수년간 호전되지 않고 고착되는 경우에만 인정된다. 이같은 정책은 참사와 재난, 혹은 개인적 사고 이후에 급성 트라우마를 경험하는 학생들에게 특히 치명적이다.
     
둘째, 근본적으로는 법제를 확립해야 하지만 우선은 각 대학이 현재 존재하는 특별지원위원회의 심의 절차를 확립하고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정신질환의 양상에 따라 학생들이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위원회가 개입해야 하며, 각 수업 담당 교수들에게 지원 요청을 전달하는 것 역시 위원회의 역할이어야 한다.

필자의 대학을 포함, 대부분의 미국 대학에서는 학생들의 신체·정신장애는 물론 의학적으로 진단할 수 없는 (혹은 진단할 필요가 없는) 일시적 위기를 겪는 학생들을 보살피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보통 장애지원센터가 이를 일괄적으로 담당한다.

모든 학생은 소중하다
   
셋째, 이 과정에서 여전히 한국 사회에 만연한 낙인효과를 억제하기 위한 행정절차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미국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자신의 질병 혹은 상황을 센터에 알리면 담당 직원이 이를 심사해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교수들에게 알려준다. 이때 핵심은 학생의 구체적 상황이 개인정보로 보호받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학생에게는 출석 의무를 유연화할 수 있다. 교수들은 출석 자율화에 대한 요청을 받지만, 그 이유가 트라우마인지 혹은 신체장애인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학생들은 자신이 "멘탈 관리가 안 되는 우울증 환자"로 교수에게 찍힐까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다.

정부와 대학은 "모든 학생은 소중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정신적 위기를 겪고 있는 학생들을 책임지고 지원해야 한다. 전지구적 팬데믹과 재난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한 지금, 능력주의와 시장 지상주의를 탈피하고 포용과 돌봄을 중심으로 한 학습공동체로의 전환을 촉진할 수 있는 교육 철학과 정책의 수립이 시급하다.

단 한 차례의 실수로도 영원한 낙오자가 될 수 있는 각자도생의 세계에서, 정신질환을 앓게 된 학생들은 학교로부터 그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한 채 그대로 학사경고를 받거나 제적당하기도 한다.

지금이야말로 학생 지원 체계를 더욱 가다듬고 필요한 예산과 자원을 적극 배정해야 할 때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학교에서조차 외면받는 학생이 없도록, 더 늦기 전에 국가와 대학이 움직였으면 한다. 
 
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소셜 코리아 운영위원)김정희원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김정희원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소셜 코리아> 운영위원입니다. 권력, 정의, 불평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조직 이론 및 조직 행동론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최근 <공정 이후의 세계>를 출간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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