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군축행동의날인 4월 25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참여연대, 전쟁없는세상 등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군방비 증액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희훈
- 우리나라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 국가인데 군축은 너무 이상적인 말 아닌가요?
- 북한이 동해로 미사일 쏘고 있는데 병역거부는 시기상조 아닌가요?
- 소수의 희생은 안타깝지만 남북 대치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요?
평화활동가들은 평화교육 현장에서, 군사기지나 군사시설이 들어서는 작은 마을에서, 종전캠페인을 펼치는 거리에서, 병역거부권을 주장하는 인터넷 게시판에서 이와 같은 반응을 수시로 마주한다.
분단국가,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은 너무나 강력해서 평화운동 캠페인을 가로막는 통곡의 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과연 평화운동의 주장은 전쟁이 끝나지 않은 한반도에서는 현실을 모르고 이상적인 주장만 되풀이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전쟁에 대해, 북한과의 군사적 긴장 관계에 대해 과도한 걱정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1945년 제국주의 일본의 패망 이후 미국과 소련은 각각 한반도 남쪽과 북쪽을 분할 점령했고, 1948년 남과 북에서 단독 정부가 수립된 이후 1950년부터 1952년까지 3년 동안 계속된 한국전쟁으로 분단은 깊게 뿌리내렸다.
수백만 명이 총에 맞아, 굶어서, 추위에 죽고 다치고, 한 마을에서 서로를 빨갱이로 반동분자로 몰아 죽음으로 내몰았던 전쟁은 한국 사회 모두에게 큰 상흔을 남겼다. 휴전 이후에도 이어진 군사적 갈등과 국지적인 무력 충돌은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군사안보만이 우리가 가져야 할 유일한 태세이며, 한때 민주주의와 인권도 군사안보를 위해 유보할 수 있다는 무리수를 정부가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도 전쟁이 남긴 상흔이 너무나 크고 휴전 이후에도 이어진 탓이었다.
전쟁 이후 이어진 이러한 분단체제에서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종전선언을 하지 않았고 평화협정을 맺지 않은, 다시 말해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차원에서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지 않은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김남주 시인이 시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에서 입산금지 팻말에도,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농부의 졸라맨 허리에도, 부자들의 담벼락에도 삼팔선이 있다고 말한 것처럼 한국전쟁은 휴전협정을 맺은 지 70년이 지난 우리의 일상에 촘촘하게 박혀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 D.P. >가 보여준 가혹하고 인권침해적인 군대 내 폭력의 실상, 5명의 청소년이 목숨을 잃었던 2013년 사설 해병대 캠프, 여전히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불타오르는 이슈인 군 가산점제와 여성징병제 이슈까지 전쟁의 흔적은 온오프라인과 남녀노소의 일상을 가리지 않는다. 개인의 일상뿐만이 아니다.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폭력
사회의 구조와 문화에서도 전쟁과 분단의 흔적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남북 모두 분단으로 인한 과도한 군비 경쟁으로 사회의 다른 영역이 발전이 더뎠다. 현재에 와서는 남과 북이 격차가 제법 있지만, 한국만 보더라도 전 세계 10위에 해당하는 군사비 지출을 조금만 줄이고 다른 공공영역에 쓴다면 큰 발전을 거둘 것이다. 한국보다 군사비의 총액은 적지만 정부 예산에서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북한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군사안보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군사화로 이어졌고 한국 사회는 학교, 직장, 가정을 가리지 않고 오랫동안 군대식 위계질서와 상명하복 문화가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김병로, 서보혁은 함께 쓴 책 <분단폭력-한반도 군사화에 관한 평화학적 성찰>에서 분단이 남긴 이러한 폭력적 행위와 사회 구조를 '분단폭력'이라고 개념화한다. 눈에 쉽게 보이는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일상에 스며든 군사화된 구조적 폭력과 문화적 폭력에서 전쟁과 분단을 읽어낸다.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폭력은 사람들의 일상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한다. 북한의 미사일 실험과 군사적 도발은 우리의 평화를 위협하는 분단폭력의 일부다. 국민의 평화와 안전을 보호하는 일은 북한군의 미사일 위협을 제거하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상흔과 분단의 구조가 만든 폭력을 극복하는 일이어야 한다. 분단폭력을 극복하는 것은 군사적인 수단으로는 불가능하다. 일상과 사회구조에 스며든 폭력은 군사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화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는데, 평화적인 방식은 나약하고 수동적이며 현실을 바꿀 힘이 없다고 생각한다. 전쟁이 일어나 적군이 총부리를 겨누고 탱크와 폭격기로 밀고 들어오는 상황에서 평화적인 저항은 무기력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이 뿌리 깊은 오해와 편견의 그럴듯한 근거가 되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군사적 수단으로 지키는 평화는 끝없는 군비 경쟁을 멈출 수 없다. 군사력의 우위 속에서 전쟁억지력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아슬아슬한 비전쟁 상태가 아니라 평화적인 방식으로 쌓아가는 단단한 안보가 필요하다. 한반도가 아직 전쟁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분단되었기 때문에 평화가 시기상조가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평화적인 방식이 큰 의미를 갖는다.
역설적이게도 병역거부자가 가장 많이 등장한 시기는 베트남 전쟁 때였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평화 시기에는 주로 종교인들과 소수의 평화주의자들이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행동으로써 병역거부를 선택하는 반면 전쟁 때는 더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멈추기 위해 병역거부를 선택하게 된다.
물론 그들 중에는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해 죽거나 상대방을 죽이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회피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지만, 그 사람들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병역거부까지도 전쟁 시기에는 강력한 평화운동의 일부로 인식되고는 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병역거부가 그랬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에 따르면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말까지 징집을 거부한 병역거부자가 3만 4천여 명에 달했다. 전쟁에 참가했다가 병역거부를 결심하고 탈영한 이들의 숫자는 1972년에 8만 9천여 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캐나다, 스웨덴과 같은 나라로 망명했다. 전쟁 시기였기 때문에 병역거부는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전쟁 반대의 강력하고 집단적인 목소리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반전운동의 거대한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