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유행하는 옹정제가 모델인 현대 그림
김기동
옹정제가 아버지 강희제로부터 황위를 받은 1722년 청나라 국고에는 은자 800만 냥뿐이었다. 나라의 창고가 텅텅 빈 것이다. 이것도 장부상의 숫자일 뿐 실제로 조사하면 터무니없이 못 미칠 것이 분명했다.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가 죽고 황제가 된 지 한 달 만에 제도 개혁으로 국고를 채우기 시작해 5년 만에 5천만 냥으로 늘렸다. 옹정제가 즉위 한 달 만에 제도 개혁의 첫 조치로 중앙정부와 지방의 국고를 정확하게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먼저 중앙정부와 지방의 국고 세수 조사단을 임명했다. 후임자는 세수 조사단의 일원이므로 전임자의 과오를 책임지거나 전임자를 비호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 결과, 전임자의 전임자는 물론 그 전임자까지도 세수 적자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동안의 세수 전용과 세수 착복의 실상이 모두 드러났다. 전임자들에게 착복, 전용한 세수를 변상하도록 했고, 그렇지 않으면 가산 몰수 조치를 취했다. 이 가산 몰수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자식과 친척까지 포함했다.
그러자 세수 착복 협의가 발각된 후 변상이 두려워 자살하는 관료들이 생겨났다. 죄인이 죽었으니 모든 걸 덮어두는 게 인지상정이었지만, 옹정제는 이마저도 용납하지 않았다. 자살한 관료의 자식들이 대를 이어 아버지의 착복 금액을 변상해야 했다. 그래서 관료들은 역사서에 옹정제를 독재 군주라고 기록했다.
<품인록>에서 이중톈은 "옹정제가 시행한 이 제도 개혁으로 부패 정치인은 자취를 감추고 정치 풍토가 깨끗해졌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며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사회의 기풍 자체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옹정제 연간에는 청렴하지 않은 관료가 없었다'는 말은 약간 과장됐더라도 옹정제의 치적에 대한 공정한 평가"라고 말한다.
옹정제가 재위 13년 58세에 갑자기 죽자 이제 한숨 돌렸다는 것이 관료들의 솔직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옹정제가 여성 검객에게 암살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것은 관료 사이의 희망이 형상화된 것이라 보아도 된다.
1981년 옹정제의 묘가 발굴됐는데, 관에 안치된 그의 시신에는 놀랍게도 머리가 없었다는 말이 퍼졌다. 그러나 옹정제의 시신에 정말 머리가 없었는지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옹정제의 능묘 발굴은 이내 중단되었고 관은 아예 열어 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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