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걷는 남자 포스터

▲ 하늘을 걷는 남자 포스터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명장이 돌아왔다. 가장 반짝이는 재료를 찾아들고서.

조셉 고든 래빗이 주연한 영화 <하늘을 걷는 남자>로 3년 만에 돌아온 감독 로버트 저메키스는 흔해빠진 연출자가 아니다. <백 투 더 퓨처>시리즈, <죽어야 사는 여자>, <콘택트>, <포레스트 검프>, <캐스트 어웨이>까지.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만 듣고도 가슴이 뛸 만한 작품을 빚어온 명장 중의 명장이 바로 그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그늘에서 성장한 수많은 후배 가운데 그와 견줄 만큼 뛰어난 감독으로 성장한 유일한 작가이며 기술과 이야기를 최고의 수준에서 조화시킬 줄 아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포레스트 검프>와 <캐스트 어웨이>, 신작 <하늘을 걷는 남자>까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모든 사람의 가슴에 깊이 스며드는 드라마로 풀어온 작가 로버트 저메키스의 필모그래피는 점차 하나의 점으로 수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점은 예술이라 불리는 것이 그 궁극에서 달성하고자 하는 가치와 그리 동떨어져 있지 않다. 어쩌면 로버트 저메키스야말로 현존하는 영화감독 가운데 예술의 극점이라 할 만한 것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 있는 인물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위험해서 아름다웠던 21살 청년의 예술적 쿠데타

하늘을 걷는 남자 쌍둥이빌딩 사이에서 '쿠데타'를 시작하는 펠리페 페팃(조셉 고든 래빗 분). 로버트 저메키스는 장기인 첨단 시각 기술을 앞세워 이 장면을 멋드러지게 표현해냈다.

▲ 하늘을 걷는 남자 쌍둥이빌딩 사이에서 '쿠데타'를 시작하는 펠리페 페팃(조셉 고든 래빗 분). 로버트 저메키스는 장기인 첨단 시각 기술을 앞세워 이 장면을 멋드러지게 표현해냈다.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하늘을 걷는 남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곳에서 외줄타기 곡예를 펼친 무명의 아티스트 펠리페 페팃의 실화다. 1974년 8월 7일, 지금은 9·11테러로 사라진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 사이에 외줄 케이블을 걸어 놓고 무려 45분 동안 그 위를 오간 21살짜리 무명 곡예사의 '쿠데타'가 바로 그것이다. 안전장비 하나 없이 고층빌딩 위에 줄 하나를 매달고 그 위를 오간 곡예사. 어느 누가 여기에 호기심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2000년대 들어 연출보다 제작에 집중하며 작품 활동이 뜸해진 저메키스를 현장으로 끌어낸 것만 보아도 펠리페 페팃의 매력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사실 이 이야기가 저메키스에 의해 처음으로 영화화된 건 아니다. 2008년작 다큐멘터리 <맨 온 와이어>가 펠리페 페팃의 이야기를 다뤄 제8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바 있지만 그 파급력은 영화 <하늘을 걷는 남자>에 비할 게 아니었다. 사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극영화엔 현실이 범접하지 못할 낭만이 녹아들어 있으므로.

영화는 일견 무모해 보이지만 더없이 아름다웠던 한 편의 도전기를 그린다. 1968년 세계 최고 높이의 쌍둥이 빌딩이 뉴욕에 건설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 위에서 줄타기 곡예를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꿈꾼 펠리페 페팃의 도전이 곧 영화의 줄거리다. 그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도울 동료들을 모아 무려 6년 여의 시간 동안 고공횡단 프로젝트를 준비했고 건설 중인 건물에 수개월 동안 잠입해가며 치밀하게 구조를 파악한 끝에 '20세기 최대의 예술범죄'로 불리는 사건의 주인공이 된다.

예술이 된 쿠데타

하늘을 걷는 남자 쌍둥이 빌딩 사이를 걷는 곡예를 펼치는 펠리페 페팃(조셉 고든 래빗 분). '손에 땀을 쥔다'는 표현은 이런 장면을 위해 존재한다.

▲ 하늘을 걷는 남자 쌍둥이 빌딩 사이를 걷는 곡예를 펼치는 펠리페 페팃(조셉 고든 래빗 분). '손에 땀을 쥔다'는 표현은 이런 장면을 위해 존재한다.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면 누구나 시각적 충격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지상으로부터 412m 높이, 지금은 사라진 쌍둥이 빌딩을 잇는 42m 거리에 불과 2cm 폭의 와이어를 걸어 놓고 진행된 그야말로 '혁명적인 예술'이 스크린 가득 펼쳐지기 때문이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세련된 연출과 조셉 고든 래빗의 집중력 있는 연기는 실제 벌어지는 사건을 눈 앞에서 보는 듯한 착각은 물론 관객에게 일종의 간접체험까지 선사한다. '손에 땀을 쥔다'는 표현이 이런 영화를 위해 존재한다 해도 과언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무모하게 보이는 꿈을 품고 한 명씩 마음에 맞는 동료들을 모아가며 마침내는 꿈을 이뤄낸다는 이야기가 얼핏 진부한 전개로 이어질 것 같기도 하지만, 무인도에 떨어진 택배회사 직원의 분투기를 흥미진진하게 그려냈던 로버트 저메키스의 역량은 과연 '역시나'다. 그는 자유의 여신상 어깨 위에 올라 자신이 일으킨 '쿠데타'를 회상하는 페팃의 회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장면 자체가 주는 시각적 위압감이 마치 영화의 비범함을 보증하기라도 하는 듯하다.

자본주의 바라보는 감독의 시각

하늘을 걷는 남자 쌍둥이빌딩을 바라보는 펠리페 페팃(조셉 고든 래빗)과 그의 동료들.

▲ 하늘을 걷는 남자 쌍둥이빌딩을 바라보는 펠리페 페팃(조셉 고든 래빗)과 그의 동료들.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지난 5일 개봉해 박스오피스 3위에 올라 있는 <더 셰프>에는 주인공인 아담 존스(브래들리 쿠퍼 분)가 자신의 팀이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 속 인물들처럼 되길 원한다'는 대사가 등장한다. 주방장이 한 명씩 자기 주방에서 활약할 요리사들을 모아 최고의 팀을 만들어간다는 영화의 줄거리가 <7인의 사무라이> 속 이야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는 영화 속 아담 존스의 희망인 동시에 감독인 존 웰스의 소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7인의 사무라이>와 <더 셰프>, <하늘을 걷는 남자>를 모두 본 입장에서 이 대사는 <하늘을 걷는 남자>에 더욱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 펠리페 페팃과 그의 친구들이 마치 <7인의 사무라이>에 등장하는 간베이와 여섯 무사들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간베이와 펠리페 페팃은 동기와 목적이 확연히 달랐지만 그들이 꿈에 이르는 과정과 그 속에서 주변인이 펼친 활약이 비슷한 감흥을 전해줬기에 나는 이 두 편의 영화가 서로 유사한 멋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모해 보이는 프로젝트를 위해 동료들을 모으고, 그들과 이상을 나누고 서로를 이해해나가는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롭게 표현되고 있던가 말이다.

영화는 펠리페 페팃의 이야기인 동시에 지금은 사라진 쌍둥이빌딩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쌍둥이빌딩이야말로 조셉 고든 래빗이 연기한 펠리페 페팃의 대척점에 선 또 다른 주인공과도 같다. 페팃이 잡지에서 빌딩을 처음 본 순간 가슴 속에 불길이 일었다. 빌딩은 페팃이 언젠가 올라야 할 목표가 됐다. 그리고 마침내 페팃이 빌딩과 빌딩 사이를 걷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을 지탱해준 빌딩을 향해 진심어린 찬사를 잊지 않는다.

<포레스트 검프>의 여러 장면들에서 미국의 보수주의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몇몇 유능한 평론가들과 같이 생각해보면 이 장면은 매우 유의미하게 읽힌다.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이룬 청년이 영광의 순간에 자신을 지탱해 준 빌딩을 향해 감사를 전하는데 그 빌딩이 쌍둥이빌딩, 즉 세계무역센터라는 게 말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맨 와이어의 하중이 빌딩과 연결된 다른 와이어에 의해 분산되고 있고 결국은 이 위대한 도전이 펠리페 페팃 본인 뿐 아니라 건물의 조력에 의해 이뤄졌다는 설정은 현대 자본주의, 곧 세계무역센터가 표방한 자유주의가 인류의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해왔음을 상징하는 건 아닐까?

상처를 치유하는 성숙한 방식, 쌍둥이타워를 향한 멋스런 헌사

하늘을 걷는 남자 쌍둥이빌딩 옥상에 올라 맞은 편 빌딩을 바라보는 펠리페 페팃(조셉 고든 래빗 분). 이 영화는 지금은 사라진 쌍둥이빌딩(구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대한 헌사라 할 수 있다.

▲ 하늘을 걷는 남자 쌍둥이빌딩 옥상에 올라 맞은 편 빌딩을 바라보는 펠리페 페팃(조셉 고든 래빗 분). 이 영화는 지금은 사라진 쌍둥이빌딩(구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대한 헌사라 할 수 있다.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로버트 저메키스가 이 영화로부터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명백하다. 대표작 <포레스트 검프>로 미국 보수주의 가치를 전면에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은 저메키스는 <하늘을 걷는 남자>에서 사라진 쌍둥이빌딩의 찬란했던 순간을 복원함으로써 현재의 아픔을 씻으려는 시도를 감행한다.

어디 그 뿐인가. 프랑스 출신의 주인공이 미국의 역동성과 자유로움을 추종하는 모습을 몇 차례에 걸쳐 보여주며 유럽과 다른 미국을 강조한다. 과연 이 영화가 미국의 힘과 가치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쉽게 그렇다고 답하지는 못할 것이다.

<포레스트 검프>에 담긴 보수성을 일부 비평가들이 비난했음에도 그 영화는 명작으로 인정받았다. <하늘을 걷는 남자> 역시 그러할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에 미국 보수주의의 특성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게 부적절하거나 거부감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 속에 투영된 보수는 과거의 영광을 진정으로 영광스럽게 보존하려는 멋스런 어른의 태도에 가깝다. 쌍둥이빌딩의 모습, 자유의 여신상의 강조, 미국인들의 포용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따라서 <하늘을 걷는 남자>는 9·11 테러로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성숙한 방식이며 쌍둥이타워를 향한 멋스런 헌사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것이 저메키스, 나아가 미국의 보수주의라면 나는 기꺼이 그를 응원하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씨네만세 하늘을 걷는 남자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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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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