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붐>의 한장면

<라붐>의 한장면 ⓒ Societe De Production


필자에게 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여배우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이제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오드리 헵번(Audrey Kathleen Ruston), 다른 한 명은 80년대 완벽한 여신으로 군림했던 소피 마르소(Sophie Marceau)이다.

1966년생인 소피 마르소는 이제 어느 덧 40대에 접어든 배우이다. 그리고 80년대를 기억하지 못하는 영화팬들에게 그녀는 <브레이브 하트>와 <007 제19탄 - 언리미티드>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은 배우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안타까움이 있다면 단지 위의 두 작품으로만 기억되기에 너무 아까운 배우라는 것이다.

그녀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최고의 여배우이자 지금도 활발하게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배우이다. 그녀와 함께 커가면서 오랫동안 그녀의 연기활동을 지켜본 팬들이라면 그녀에 대한 추억 한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특히 최근 영화를 통해 그녀를 만나는 팬들 중 80년대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낸 청춘들이라면, 소피 마르소의 변하지 않는 미모는 예전의 기억을 새록새록 떠 올리게 할 것 같다. 당시 그녀는 청춘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완벽한 여신이었다.

<라붐>을 통해 데뷔한 소피 마르소

 <라붐>의 한 장면

<라붐>의 한 장면 ⓒ Societe De Production


그녀가 영화팬들에게 처음 자신을 알린 작품은 1980년 <라붐>을 통해서였다. 이 작품을 통해 그녀는 엄청난 흥행 성공을 거두며 프랑스에서 일순간에  최고의 아이돌 스타가 된다. 그때 그녀의 나이 불과 13살이었다.

<라붐>의 주인공 빅은 당시 소피 마르소와 같은 나이인 13세였다. 그녀는 빅을 통해 처음 사랑에 눈떠가는 소녀의 모습을 차분하게 표현하였는데, 특히 무엇보다도 주목 받은 것은 그녀의 외모였다. 이 작품에서 그녀의 외모는 너무나도 청초하면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귀여운 소녀 그 자체였다.

소피 마르소의 데뷔작 <라붐>은 유럽에서의 인기를 등에 업고 아시아에도 상륙하게 된다. 일본에서 흥행 성공을 계기로 한국에 수입된 이 작품은 극장에서 개봉하자마자 당시 청소년들에게 최고의 화제작이 된다. 한국에서 소피 마르소의 인기는 이 작품을 통해 형성되었다. 이후 그녀는 각종 학생 잡지에서 표지모델 혹은 기사거리로 등장하였다.

1982년 <라붐2> 역시 인기를 얻으면서 그녀는 본격적인 배우의 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라붐2>는 이전 작품의 인기에 기댄 안일한 작품이란 비판 역시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최고의 아이돌 스타로 잘 나가던 그녀는 의외의 선택을 한다.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최고의 연기파 배우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주연한 <사강의 요새>(1983년)에 출연한 것이다. 이 작품으로 그녀는 프랑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세자르 신인 여자배우상을  수상한다. 당시 그녀의 나이 겨우 16살이었다.

성인연기자가 되기 위한 그녀의 연기변신은?

 <격정>의 한 장면

<격정>의 한 장면 ⓒ Sara Film


세자르 신인 여자배우상 수상 이후 탄탄한 연기생활을 지속할 것 같았던 그녀는 의외의 작품들을 선택하면서 실망스러움을 안겨준다.

그 시작은 그녀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최초의 문제작으로 대두된 영화 <나이스 줄리>(1984년)였다.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쟝-뽈 벨몽도와 함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연기했다. 그녀가 이 영화에서 맡은 역할은 18세 소녀 줄리 역이었다. 쟝-뽈 벨몽도가 맡은 스테판 마르겔은 영화에서 지독한 바람둥이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8세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 특히 그녀의 아내에게 자신의 외도가 들킨 현장에서 줄리를 자신의 딸이라고 소개하는 부분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 작품을 연출한 조지 로트너 감독은 소피 마르소를 타락시켰다는 엄청난 비판에 시달려야했다. 그런 비판 때문인지 그는 이후 6년 동안 다른 작품을 연출하지 못했다.

<나이스 줄리>가 분명 좋은 작품은 아니지만 한 가지 얻은 성과가 있다. 그것은 그녀가 이제 아역 배우 꼬리표를 뗐다는 것이다. 이렇게 실망스러움을 안겨주었던 <나이스 줄리> 이후 그녀가 선택한 작품은 미래에 그녀의 남편이 되는 거장 안드레이 줄랍스키의 <격정>(1985년)이었다. 그녀는 이 작품을 통행 완전히 성인 연기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농도 짙은 베드신을 선보이며 많은 남성 관객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격정>을 기점으로 하여 그녀는 <폴리스>(1985년), <지옥에 빠진 육체>(1986년)를 통해 계속해서 농도 높은 연기를 보여준다. 소피 마르소 팬을 자처하던 당시 청소년 팬들에게 이 시기는 끔찍한 악몽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이스 줄리> 이후 개봉되는 그녀의 영화들 대부분이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 작품들을 보기 위해 삼류 극장으로 작품이 넘어오기를 고대하던(?) 소피 마르소 팬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 당시 그녀의 팬이라면 극장에 들어가기 위해 나이를 속이지 않은 사람들은 극히 드물 것이다.

1980년 <라붐>을 통해 인기를 얻었던 소피 마르소는 <라붐2> 이후 나오는 작품마다 에로틱한 장면들을 보여줘 많은 한국팬들의 원망을 샀다. 특히 그녀의 열성팬들은 <나이스 줄리>를 연출한 조지 로트너 감독에 대한 원망이 대단했다. 소피 마르소를 타락시킨 주범으로 생각한 것이다. <라붐2> 이후 그녀가 선택한 작품들이 한국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하면서 그녀는 서서히 잊혀가는 스타가 되어가고 있었다.

<유 콜 잇 러브>로 부활

 <유 콜 잇 러브>의 한 장면

<유 콜 잇 러브>의 한 장면 ⓒ TF1 Films Productions


이런 그녀의 인기를 완벽하게 회복시켜준 작품은 1988년 작 <유 콜 잇 러브>였다. 특히 이 작품은 영화의 동명 주제가까지 큰 인기를 얻으며 당시 젊은 층에게 선풍적인 인기 몰이를 하였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상당히 단순했지만 청순했던 시절 소피 마르소의 이미지를 되살려, 그녀의 팬들과 그녀를 새롭게 알게 된 팬들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이 작품을 통해 그녀는 한국에서 완벽하게 청순미의 여신으로 부활하게 된다.

<유 콜 잇 러브>는 팝 음악 작곡가 에드워드 젠슨(벵상 링던)과 에스페라 발렌타인(소피 마르소)의 사랑에서 생긴 오해와 그 오해를 풀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런 단순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언급한 청순미를 한껏 뽐낸 소피 마르소의 매력 때문이었다. 그녀의 청순하면서도 청초한 미모는 이 작품에서 다시 한 번 완벽하게 빛났다.

오랜만에 예전 <라붐> 느낌의 소피 마르소를 만난 영화팬들은 열광적인 환호로 <유 콜 잇 러브>에 응답하였다. 특히 이 작품의 가장 백미는 대학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한 에스페라 발렌타인과 에드워드 젠슨이 서로 화해하고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나오는 캐롤라인 크루거의 주제가 '유 콜 잇 러브'였다. 영화 내용은 생각나지 않더라도 이 영화의 주제가는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도저히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영화 <유 콜 잇 러브>는 그녀의 연기 인생에 있어서도 전환점이 된다. 이후 그녀는 <혁명가의 연인>(1988년),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1989년), <고요한 펠리세이드>(1989년), <쇼팽의 푸른 노트>(1991년), <샤샤를 위하여>(1991년), <팡팡>(1993년), <달타냥의 딸>(1994년)까지 좋은 작품을 이어간다.

유럽과 프랑스에서는 이미 대배우로 성장한 그녀지만 할리우드 진출은 생각보다 늦었다. 그녀의 첫 할리우드 진출작은 멜 깁슨이 직접 감독을 맡은 영화 <브레이브하트>(1995년)였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여주인공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이 작품은 남성이 주가 되는 전쟁영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존재감을 영화 속에서 잘 드러냈다. 이렇게 그녀가 영화 속에서 빛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연기력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그녀는 <안나 카레니나>(1997년), <로스트 & 파운드>(1999년), <007 제19탄 - 언리미티드>까지 계속해서 할리우드 활동을 이어간다. 그뿐만 아니라 2000년 들어서도 거의 매년 한편씩 영화 주인공을 맡으면서 아직 현역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80년대 외국 여자배우 트로이카 중 홀로 남아

 <브레이브 하트>의 한 장면

<브레이브 하트>의 한 장면 ⓒ A Twentieth Century Fox


80년대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외국 여자배우 트로이카는 피비 케이츠, 브룩 쉴즈, 소피 마르소였다. 대부분 여자배우들이 그렇지만 인기 수명이 남자배우에 비해 길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세 명의 여배우 중 지금까지 활발한 연기활동을 보이고 있는 배우는 이제 소피 마르소뿐이다. 브룩 쉴즈와 피비 케이츠는 이제 추억의 스타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이렇게 자신의 매력을 유지하면서 아직까지 현역에서 활동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녀가 연기를 정말 사랑하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한국 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인기가 절정에 있을 때 연기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연극무대에 도전했다. 이 도전 시기가 1991년이다. 이미 1983년 <사강의 요새>로 세자르 신인여자배우 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으며, 당시 프랑스 최고 인기 여배우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그녀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런 도전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1991년 그녀는 장 아노울리의 < Euidyce >를 통해 연극 무대에 데뷔한다. 특히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연극 시상식 몰리에르 어워드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한다. 이미 최고의 인기 여배우가 연극을 통해 또 다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이후에도 그녀는 연극 무대에 꾸준하게 출연하며 자신의 연기에 대한 열정을 과시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그녀는 9분짜리 단편 영화 < L''Aube A L''envers >를 통해 1995년 칸 영화제에 초대되기도 하였다. 그녀의 영화와 연기에 대한 열정이 얼마만큼 큰지 가늠해볼 수 있는 또 다른 증거다. 혹자는 그래서 그녀가 배우로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는 시기가 오면 영화 감독으로 데뷔할 것이라고도 말한다.

이렇게 그녀는 자신 스스로 영화와 연기에 대한 열정을 다방면으로 표현하고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에 대해 망설임이 없었다. 이런 그녀의 노력이 있었기에 어느 여자배우보다 긴 연기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녀가 단지 인기에 연연해 자신 스스로 발전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소피 마르소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어느 누구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던 연기자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자신을 가꾸어갔다. 그리고 이러한 도전은 언제나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 오늘날의 소피 마르소를 있게 한 힘은 이런 도전정신의 결과기도 하다.

소피 마르소는 1980년 13살의 나이로 데뷔하였다. 수많은 스타들이 등장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 28년 동안 그녀는 여전히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배우로 영화계에 남아 있다. 그리고 한국 영화팬들에게는 80년대를 대표한 청춘스타 소피 마르소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80년대 소피 마르소의 사진과 브로마이드를 보면서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한국 팬들에게 프랑스와 유럽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성장해 있는 그녀의 모습은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젊은 시절을 공유하고 나이가 들어왔던 영화팬들이라면 그녀의 건재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같은 시대를 공유하고 같이 성장한 스타가 아직도 활발한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많은 힘을 얻고는 한다. 그녀가 앞으로도 영화를 통해 계속해서 오랫동안 팬들 가까이 남아 있는 배우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해본다.

소피 마르소 라붐 유 콜 잇 러브 브레이브 하트 무비조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