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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그때의 일을 이야기하려면 아무래도 열두 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열두 살에 이른바 무단가출을 했다. 술에 취한 아버지의 주머니를 뒤져 얼마인가의 돈을 훔쳤다. 그 돈으로 고창에서 버스를 타고 광주로 갔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열 살 즈음부터 남의 집 일을 다니기는 했었다. 열 살짜리 사내애가 일을 하면 얼마나 할까마는, 하여튼 일 년이면 적어도 한 달 정도는 작은 지게를 지고 어른들 틈에 끼어 부잣집 마당을 어슬렁거리곤 했다. 그렇게 해서 받은 품삯이 얼마였는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학교의 미술시간에 반드시 필요한 크레용이나 도화지 같은 것을 제때 공급해주지 못하는 집안 형편을 내가 비교적 일찌감치 파악하고 소위 자립갱생을 도모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당시 농촌에서 남의 집 일이란 대개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아직 해가 뜨기도 전에 일을 시작해서 아침을 그 댁에서 먹는 것이다. 어느 하루 학생들이 한참 등교하던 시간쯤에 보릿단 두 개인가 세 개인가를 지고 낑낑거리며 부잣집 마당을 들어서다가 한 소녀를 보았다. 내가 먼저 본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내 이름을 불렀다. 깜짝 놀란 목소리로 어? 너, 너, 하다가 내 이름을 부르는, 불러놓고는 자기가 놀라서 뛰어 달아나는 그녀의 등에서 토끼 두 마리가 수놓아진 책가방이 출렁거렸다.

남학생이든 여학생이든 모두가 하나같이 보자기에 책을 싸서 어깨와 옆구리 사이로 비스듬하게 메거나 등에 묶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토끼든 목단이든 그림이 그려진 책가방을 보기도 좋게 등에 마치 얹은 듯이 하고 다니는 학생은 학교 전체를 뒤져서 열 명이나 될까 하던 시절이었다.

바로 그 열 명도 채 안 되는 희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그녀였다. 그리고 그녀는 비록 짝꿍은 아니지만 고개만 돌리면 언제라도 눈이 마주치는 위치에 앉아 있는 동갑내기 같은 학년에 같은 반, 세로로 선을 긋자면 다른 줄이지만 가로로 선을 긋자면 같은 줄이 되는 아주 가까운 이웃이었다.

"너는 우리 학교에 맞지 않다. 다른 학교를 전학을 가라"

그녀의 마당에서 등에 지게를 진 내가 책가방을 둘러맨 그녀와 마주친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음에는 그저 막연하기만 했다. 어쨌든 그날 이후 학교가 싫어지고 있었다. 당시에 소위 '모퉁이학교'라 해서 1, 2년 선배들이 학교에 간다고 집을 나와서 학교는 안 가고 천렵이나 무슨 참외서리 같은 것으로 시간을 채우는 일이 많았다. 나는 어느새 그들과 한패가 되어 있었고, 나중에는 1, 2년 후배들을 중간에서 기다렸다가 학교에 못 가게 잡아서 끌어들이는 악역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도 이내 시들해졌다.

가고 싶었다. 어디론가 멀리 가버리고만 싶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돈 한푼 없이도 어디론가 갈 수 있다는 생각은 아직 못하고 있었다. 그저 돈을 벌어서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의 집 일은 이제 꿈에서도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때 보인 것이 아이스케키 장사였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하는 그 장사 한철만 하고 나면 내가 그만 큰 부자가 될 것 같았다. 어느새 부자가 되어 있는 내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부자가 된 나는 이제 '모퉁이학교' 따위에 숨어드는 불량학생도 아니고 학교의 교장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교장선생님인 나는 토끼 두 마리가 수놓아진 책가방을 매고 다니는 그 여학생을 불러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는 우리 학교에 맞지 않다.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라."

그렇게 부푼 꿈을 안고 아이스케키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는 잘 되었다. 아주 잘 되었다. 아이스케키 통을 메고 들어간 첫 마을에서 바로 승부가 결정되었다. 두 시간도 채 안 되어 아이스케키 통은 깨끗하게 비워졌다. 그리고 나는 피로 자신의 얼굴을 장식하는 인디언처럼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기다시피 해서 그 마을을 빠져나왔다.

마을마다 아이들 세계의 법칙이 있고 그 법칙에 의한 텃새가 엄하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까닭이었다. 나 자신이 우리 마을에 낯선 아이가 들어오면 괜히 툭툭 건드려보고 싶었던 것을, 그랬으면서도 다른 마을 아이들은 아무런 텃새도 없이 그저 착하기만 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아무렇게나 들어가서 돈을 벌자고 설쳐댄 까닭으로 받아야 하는 당연하면서도 슬픈 형벌이었다.

엉뚱하게도 아버지가 벼락을 맞았다. 아이스케키 공장 사장님은 그런 방면으로 이골이 나 있었다. 하긴 그런 자신도 없이 아이들에게 아이스케키와 아이스케키 통을 내줄 수는 없었을 터이다. 남의 돈이라면 옆에서 구경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아버지에게 아이스케키 공장 사장님의 방문은 벼락도 그런 벼락이 없었다.

어쨌든 오랜 세월 마을 이장을 해 오신 아버지의 주머니에는 항상 돈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의 인감도장을 이장이 관리하던 시절이었고, 받아야 할 돈이건 갚아야 할 돈이건 읍내까지 나가야만 가능한 대부분의 돈거래를 이장이 대신 해주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남의 돈으로 아들이 진 빚을 일단 갚았다. 그리고는 뭔가 자신이 없었던 것인지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주머니에 아직 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또 그것을 훔쳐들고 십 리도 넘는 읍내의 버스 터미널로 내다렸다.

원도 한도 없이 영화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소년원을 출소하고 6개월쯤이나 지났을까. 박박 밀려버렸던 머리가 길었다는 기념으로 고창의 문화사진관에서 그 당시 매우 큰 돈을 들여서 만든 사진
 소년원을 출소하고 6개월쯤이나 지났을까. 박박 밀려버렸던 머리가 길었다는 기념으로 고창의 문화사진관에서 그 당시 매우 큰 돈을 들여서 만든 사진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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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도착한 광주, 말로만 듣던 광주의 거리를 헤매고 다니기 얼마나 했던가.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훔쳐 먹어야 하는지를 모르는 까닭에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프고, 눈앞도 침침하고 해서 아마 아무렇게나 쭈그리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내가 그만 밟혀서 죽는 줄 알았다. 간신히 살아남아서 이게 대체 무슨 꼴인가, 하고 사방을 살펴보니 사람들은 어느새 간 곳이 없고 영화 포스터만 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을 보았다. <영사실 조수 구함-무등극장 백>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유리문에 붙어 있는 도화지 반 장 크기의 광고를 보았다. 제삿날에 입는 아버지의 흰 두루마기처럼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종이에 붓으로 쓴 글자였던가, 하여튼 공들여 쓴 흔적이 역력한 그것은 우편배달부가 내가 직접 전해준 무슨 초대장 같았다.

극장이라니. 영화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횡재란 말인가. 영화라고는 천막을 친 가설극장에서 두세 번 정도 그것도 마을 형들이나 누나들을 따라 몰래 들어가서 본  게 전부인 나로서는 즐비하게 붙어 있는 영화 포스터를 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영화천국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네가? 너는 인마 너무 작아서 안 돼."

그 아저씨가 극장 사장님이었는지 단순한 관리인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하여튼 그는 그랬다. 나는 너무 작아서 안 된다고.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극장이 나를 불러서 왔는데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 아저씨는 결국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월급은 없다. 밥은 먹여준다. 잠은 극장 안 아무 데서나 자도 좋다.

까짓 월급 따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원도 한도 없이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3개월이 지나도록 영화는 단 한 편도 볼 수 없었다.

무등극장이 개봉관인 까닭에 영화 한 편을 한 달이 넘도록 그야말로 마르고 닳도록 되돌린 탓이기도 했지만, 영사실 조수라는 것이 그렇게 영화나 보고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필름 한 통이 다 돌아가면 그것을 끄집어내서 되돌리는 게 영사실 조수의 임무였다. 게다가 내 키가 작아서 필름을 꺼내려면 의자를 딛고 올라서야 하는데 매번 떨어질까 무서워 긴장을 해야 했고, 실제로도 몇 번인가 떨어져서 필름이 흩어지는 등 난리를 치기도 했다.

오늘이나 영화를 볼 수 있을까, 내일이나 볼 수 있을까, 그렇게 미련하게 마른침이나 삼키는 날들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3개월이나 보낸 뒤에서야 나는 확연하게 알았다. 야아 이것은 아니다, 안 되겠다, 속았다, 혼자 그런 고민을 씹고 있는데 영사실장이 꿀밤 한 대를 지독하게도 아프게 매기면서 하는 말이 이랬다.

"너 인마, 가서 엄마 젖 좀 더 먹고 키를 기워서 다시 와라."

그 뒤로 어찌어찌 이발소에 들어가서 몇 달, 메리야스 공장에서 몇 달 하는 동안 나는 어느새 열다섯 살이 되었고, 그리고 목소리는 굵어져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제 광주를 떠나야 할 것 같았다. 목소리도 굵어진 어른이 되어서까지 월급 한푼 없이 겨우 밥이나 얻어먹고 있다는 것은 뭔가 영 안 어울린다는 생각도 아마 없지 않았으리라.

배가 고파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만난 고향 아저씨

광주에서 서울까지 완행열차로 열한 시간이었던가 열세 시간이었던가. 하여튼 비둘기호 완행열차 입석표를 사서 들고 다리가 먹먹해질 때까지 선 채로 흔들리다가 용산역에서 내렸는데 배가 어찌나 고픈지 그만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좀 또릿또릿한 녀석이었더라면 아무 데나 들어가서 일단 먹어댄 다음 돈 없다고 버텼을 테지만, 팔자에 그런 용기는 적혀 있지 않았던 까닭에 쓰레기통이나 뒤지고 있었다. 그런데 쓰레기통을 뒤지는 데도 순서가 있었다. 아니 관리자가 있었다고나 할까. 하여튼 용산역을 중심으로 배회하는 이른바 '역전의 용사'들 네다섯 명에게 걸려 코피가 터지고 팔이 부러질 정도로 얻어맞았다. 그리고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아니 한패가 되었다. 죽도록 얻어맞고도 도망갈 생각을 안 하고 앉아 있으니 그들도 아마 어쩔 수 없었을 터이다.

그렇게 해서 이른바 '양아치'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지만, 다행이랄까 불행이랄까 열흘도 채 안 된 어느 날 새벽기차에 몸을 싣고 온 고향 아저씨에게 덜미가 잡혔다. "야 이놈아, 너 수복이 아니냐?"하고 갑자기 뒤통수를 탁탁 치며 웃어주던 그 아저씨는 그 즈음 양말 행상을 하고 있었다. 그리 많지도 않은 식구인데도 농사만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서울특별시를 돌아다니며 양말장사를 하는 틈틈이 내려가서 농사일을 하고 다시 올라오는 이중생활을 한다는 것이었다.

거처는 아침마다 공동변소를 향해 200미터도 넘게 뛰어야만 하는 중랑천 뚝방 판잣집에 세를 살고 있었다. 그것조차도 그 아저씨가 얻은 방은 아니었다. 사촌과 친형제 합해서 3형제가 세들어 있는 방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 3형제와 그 아저씨 그렇게 4명이 모두 양말 행상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자기도 그렇게 더부살이를 하면서 나를 데리고 들어간 것이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날부터 나는 도둑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셈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은 둥둥 떠내려가는 똥덩어리가 한눈에 보이는 그 샛방에서 사흘이나 있었던가 나흘이나 있었던가. 어느 하루 그들 양말장수 일행을 따라서 버스를 타고 청계천에 있는 양말 도매상으로 나갔다. 내 일이었지만 내 자신은 영문도 모르는 채 따라나선 그 길이 일종의 면접시험 자리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렇게 해서 양말 도매상 종업원 살이를 하게 되었다. 월급은 없었다. 밥 먹여주고 잠자리 제공하고 명절 때 옷 한 벌씩 사주고 가끔 용돈을 준다는 조건이었다. 장사를 다 배운 뒤에 월급을 준다 했는데 그 기간이 얼마였던가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하여튼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조건이었다.

사장님 댁이 삼일아파트 5층이었다. 그 하나만으로도 나는 충분했다. 나는 지금 아파트 5층에 산다는 내용의 편지를 얼마나 많은 친구들에게 써서 보냈는지 모를 정도로 아파트에 산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흥분시켰다. 다른 애들은 아직 구경도 못해본 아파트를 나는 직접 살고 있는 것이었다. 항상 올려다보기만 했던 높은 건물을 이제는 그 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살고 있는 것이었다.

하는 일도 시골에서의 남의 집 일에 비하면 거의 노는 수준이었다. 새벽부터 몰려드는 양말 행상들을 맞이해서 그들이 불러주는 대로 물건을 내주는 일로 두세 시간 정도 정신없이 보내고 나면 할 일이 거의 없었다. 낮 동안 내내 만화책이나 보다가 저녁이면 다시 몰려드는 양말 행상들의 보따리를 받아서 보관하고 나면 그 자랑스런 삼일아파트 5층으로 퇴근해서 밥 먹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여유를 만끽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향 아저씨가 나를 그곳에 '심어놓은' 이유는 나로 하여금 그런 여유나 만끽하며 살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한 달 정도 지난 뒤에야 밝혀지게 되어 있었다. 나를 중심으로 뭔가 일이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렇게 한 달 동안 친구들에게 편지로 아파트 자랑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원을 출소한 뒤의 어느 날 고향의 선배 그리고 후배들과 오배이골 병풍바위 위에서. 고인돌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이 오배이골은 현재 습지공원으로 조성되었고, 고창군에서는 이 습지를 별도로 유네스코에 등재하는 방안을 찾고 있는 중이다.
 소년원을 출소한 뒤의 어느 날 고향의 선배 그리고 후배들과 오배이골 병풍바위 위에서. 고인돌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이 오배이골은 현재 습지공원으로 조성되었고, 고창군에서는 이 습지를 별도로 유네스코에 등재하는 방안을 찾고 있는 중이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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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을 훔쳐 양말 장사를 하면 돈을 엄청 벌겠다고 생각했지만

한 달 정도 지나서 양말 도매상의 구조를 어지간히 알게 되었을 즈음 고향 아저씨가 말했다.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주제는 단 하나, 돈이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 서울에서는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한다. 고향을 가더라도 돈이 없으면 손가질밖에 안 받는다. 그러니 너도 이제부터 돈 벌 생각을 해라. 돈을 어떻게 벌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저씨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

등등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눈물이 나왔다. 눈물 나게 고마웠다. 일찍이 그 누가 그렇게 눈물이 나올 정도로 나를 걱정해준 사람이 있었던가. 그리하여 나는 매일 저녁 무렵 그 아저씨의 양말 행상 보따리 속에 한 뭉치씩 혹은 두세 뭉치씩 양말을 넣어놓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런 정도는 사실 일도 아니었다. 매일 수천 뭉치씩 나가고 들어오는 양말 더미들 속에서 한두 뭉치 정도는 눈에 띄지도 않았다. 게다가 사장님이 다방 여자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탓에 집안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거의 매일 부인과 여자 문제로 말다툼을 하면서도 사장님은 오후 서너 시만 되면 "야 문단속 잘 해야 한다" 그렇게 한 마디 남기고 퇴근해 버리기 일쑤였다.

고향 아저씨가 사장님의 그런 가정사를 소상히 꿰뚫고 나를 그렇게 '심어놓았던' 것이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도둑질을 하면서도 도둑질을 한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 정도로 그렇게 자연스럽게 도둑질을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여건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속담을 고향 아저씨는 아마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큰 욕심 부리지 않고 3개월 만에 그만두기로 했다. 3개월 만에 그만두고 다시 아침이면 똥덩어리가 둥둥 떠내려가는 중랑천변의 그 삼형제가 얻어놓은 월세방으로 돌아와서 양말 행상에 나섰다. 그동안 훔쳐낸 양말 가운데 일부를 상자에 담아서 그것을 다시 보자기로 싸서 어깨에 둘러매고 다니며 양말이요, 양말 사세요,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별로 신명이 나지를 않았다. 팔면 파는 대로, 벌면 버는 대로 다 내 것이 되는 명실상부한 사업가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재미가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양말 한 켤레를 팔기가 무섭게 그 돈을 들고 만화가게 같은 데로 들어가서 시간을 죽이기 일쑤였다. 그런 어느 하루 월세방 주인들인 삼형제의 돈이 통째로 없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즈음에 삼형제는 똑같이 각자 하나씩의 적금을 들고 있었다. 양말 장사를 하는 이유가 사실은 그 적금을 들기 위함이었다. 만기가 몇 년이고 얼마짜리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납입 기일이 다가오면 서로가 돈을 꾸러 다니는 등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하루 세 끼를 굵은 우동국수에 검은 간장 그리고 대파 몇 쪽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매일 양말을 팔아서 남은 이익금은 국수 살 돈과 연탄 살 돈을 제외한 전액을 천장 속에 보관해 두었다.

상표가 아마 비사표였던가 그랬을 것이다. 비사표 당성냥 통을 종이로 겹겹이 발라서 구멍을 뚫고 그 안에 돈을 넣어서 천장에 두었다가 적금 납입일 전날 밤에 칼로 잘라서 돈을 빼고 다시 종이로 바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비사표 당성냥 통으로 된 일인금고 세 개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도둑의 증거를 잡으려다 도둑이 되고 보니

돈이 없어졌다는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이 그렇게도 실감날 수 없었다. 남의 월세방에 더부살이로 끼어든 내가 아니면 누가 그 돈을 가져갔을 것인가. 게다가 나는 이미 도둑질을 한 경험도 있었다. 그것도 한두 차례가 아니라 무려 석 달 동안을 하루도 빠짐없이 도둑질을 해 왔다. 하지만 나는 그들 삼형제의 돈에 눈독을 들인 적은 없었다. 천장 속에 그들의 금고가 있다는 것은 알아도 거기에 손을 대본 적은 없었다.

도대체 이 사건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눈앞이 캄캄해서 아무 의욕도 나지를 않았다. 모두들 장사를 나갔지만 나중에 나간다는 핑계를 대고 방안에 웅크리고 앉아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문득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로 옆방에 세들어 살고 있는 홀아비 한 사람을 나는 평소에도 수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도대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거니와 거의 매일 방안에만 처박혀 있는 것 같은데도 사흘이 멀다고 고기 굽는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비라도 내려서 우리가 장사를 못 나가는 날이면 화투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한 번도 우리를 자기 방으로 들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어쩌면 그 홀아비가 범인인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그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는 순간부터 나는 아마 탐정이 되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숨소리 한 번 크게 내지 않고, 발자국 소리 한 번 크게 내지 않고 하루 종일 방 안에 웅크리고 옆방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만일 운이 좋다면 그가 한 번은 밖으로 나가줄 터이었다.

운이 좋았다. 그가 밖으로 나왔다. 연탄을 갈러 나온 것 같았다. 연탄이 떨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나는 빌었다. 당시에 연탄은 누구나 없이 새끼줄에 두 장씩 꿰어놓은 것을 사다 쓰고 있었다. 한 번에 네 장씩 사다가 이틀 정도 버티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로 운이 좋았다. 그가 마침내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문을 살짝 열고 내다보니 연탄을 사러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 없어서 그의 뒤를 밟았다. 그가 계단을 올라 연탄가게 쪽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내려와서 그의 방으로 스며들었다. 그날의 나는 정말로 운이 좋았다. 그의 방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베개가 눈을 채웠다. 베개를 보는 순간 저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이 들었는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랬다.

그리하여 베개를 마치 누군가로부터 빼앗듯이 거칠게 움켜잡고 치켜들었는데, 그 순간의 무게감이 벌써 달랐다. 그렇게 나는 아마 눈이 뒤집히고 있었을 것이다. 베개를 어떻게 뜯어내서 그 안의 돈을 확인하게 되었는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돈이 쏟아져 나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전 소리를 내며 양말 한 짝이 떨어졌다. 양말 속에 지폐와 동전이 섞인 채로 들어 있었다.

그때 돈이 들어 있는 그 양말을 차라리 들고 나왔더라면 들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들고 나간다는 생각은 전혀 해볼 수 없었다. 돈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로 나는 겁에 질려 있었다. 왜 그렇게 겁을 먹고 덜덜 떨어야 했는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랬다. 겁에 질린 채로 덜덜 떨고만 있었을 뿐 그 방에서 빨리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도무지 해보지를 못했다.

마침내 주인이 들어왔고, 거친 욕지거리와 함께 커다란 주먹으로 귀뺨을 몇 대나 얻어맞았는지 코피를 질질 흘려가며 파출소로 끌려갔다. 파출소에서 한나절을 있다가 저녁 12시 즈음에 경찰서로 갔고, 며칠 뒤에 다시 구치소로, 그리고 다시 며칠 뒤에 소년원으로 갔다.

돌아보면 잘못된 만남은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도둑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런데도 나는 도둑이 아니다, 하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구치소에서나 소년원에서나 이런저런 절차를 거치면서 무수하게 구타를 당했지만,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프다거나 억울하다거나 괴롭다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뭐랄까,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르고 알 수도 없는 거대한 어떤 비밀을 나 혼자만 알고 있다는 묘한 자긍심 같은 것이 내 안에서 나를 강하게 키워주고 있다는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로 그 사건은 이후 내 인생에 훌륭한 지침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인지 나로 하여금 양말을 훔쳐 양말 장사를 할 수 있는 길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 그 아저씨와의 만남을 한 번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따라서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잘못된 만남' 글 공모 취지와는 다소 어긋난 것일 수도 있다.

덧붙이는 글 | '잘못된 만남'응모글



태그:#도둑, #소년원,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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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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