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최초의 다큐멘터리 감독. 2000년 미 대선에서 녹색당을 지지하다 2004년에는 민주당으로 돌아선 남자. 미시간 대학 자퇴의 학력으로 미국 여론을 선도하는 인물. 좌파 언론인, 다큐멘터리 감독, TV 리얼리티 쇼 진행자, 베스트셀러 <멍청한 백인들>의 작가. 그렇다. 바로 <화씨 9/11>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마이클 무어다.

우리에게 미국 좌파의 선두기수이자 부시의 저격수인 이 마이클 무어가 '사기꾼'이란다. 아, 그의 안티사이트인 'MooreWatch.com'이나 공화당 과격파의 주장 아니냐고?

최신작 <식코>에서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이트 운영자를 위해 마이클 무어가 치료비를 보내줬다고 하니 전자는 아닐 테고, 후자들은 부시 정권의 끝물이니 날을 세울 필요가 없지 않겠나.

 <볼링 포 콜럼바인>의 한 장면

<볼링 포 콜럼바인>의 한 장면 ⓒ 스폰지


마이클 무어에 반기를 들고 나선 이들은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현관문도 걸어 잠그지 않는 선한 시민들로 묘사된 캐나다 인들이다. 캐나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데비 멜닉과 릭 케인은 과연 마이클 무어의 혁신적이고 대중적인 작업 방식이 과연 어디까지 유효한가에 대한 질문은 마이클 무어적인 방식으로 되돌려준다.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2일 막을 내린 제4회 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에서 상영된 <마이클 무어 뒤집어보기 Manufacturing Dissent: Michael Moore and the Media>이다.

다큐멘터리의 진실과 허구, 과연 어디까지

<카메라를 든 사나이>로 다큐멘터리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지가 베르토프는 '예술이란 역사적 투쟁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그 투쟁의 <무기>'라고 말한 바 있다. 영화감독이 단순히 현실세계를 기록해서는 안 되며 분석해야 한다고 믿은 것이다. 아마도 마이클 무어는 이 지가 베르토프식 다큐멘터리 연출관의 신봉자였음이 틀림없다.

마이클 무어의 <로저와 나>는 그러한 연출관이 반영된 히트작으로 주류 다큐멘터리가 지녔던 형식주의, 엄격성을 깬 혁신적인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제네럴 모터스(GM)의 발흥지인 자신의 고향 미시간 플린트가 당시 회장 로저 스미스의 플린트 공장의 멕시코 이전 계획으로 대량 실업 사태를 맞자 마이클 무어는 로저 스미스 회장을 만나기 위해 직접 카메라를 들고 나선다.

개인적인 이력과 소회의 삽입과 영화나 뉴스릴의 적극적인 도입, 그리고 GM 본사 회의장을 돌진하는 저돌성, 거침없는 풍자와 유머, 극 영화를 방불케 하는 경쾌한 편집을 무기로 삼은 이 다큐멘터리는 워너브러더스의 배급망을 타며 미국에서만 600만 달러의 수익이라는 당시 다큐멘터리 최고 흥행 기록을 기록했다.

작은 소도시를 집어삼킨 대기업의 횡포라는 문제를 배꼽 잡는 편집과 유머 감각으로 승화시킨 독립 다큐멘터리의 승리. 고인이 된 정은임 아나운서가 베스트 필름으로 꼽았던 1989년 작 <로저와 나>는 개발과 독재로 점철된 우리 사회에서도 소위 '비짜' 테이프로 유통되며 화제를 모았었다.

고향의 미시적인 문제에 천착했던 마이클 무어는 90년대 들어 흑인은 정말 택시 잡기가 어려울까, 왜 미네소타는 교도소 사업을 벌이나 등을 고발하는 등 'a comedic investigate magazine show'라는 모토를 내세운 TV 프로그램 <TV 네이션> 등을 통해 방송과 다큐멘터리의 사회적 책무를 드높였다. 대기업의 인원 감축과 대량 해고를 고발한 <빅원> 등을 거쳐 왠만한 코미디 영화보다 웃긴 그의 화법과 대중적인 감각은 진화를 거듭했다.

급기야  <볼링 포 콜럼바인>과 <화씨 9/11>에 이르러 미국의 총기 문제와 부시의 이라크전 파병으로 시선을 확장하며 신랄하면서 때로는 수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비판과 선동을 계속하고 있다.

최선의 의도가 과연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마이클 무어의 이러한 활약을 정리한 것은 <마이클 무어 뒤집어보기>가 진보주의자를 넘어 영화 팬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마이클 무어의 방법론이 과연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거물이 된 마이클 무어, 당신은 누구십니까?

 <마이클 무어 뒤집어 보기>이 미국 포스터

<마이클 무어 뒤집어 보기>이 미국 포스터 ⓒ IMDB.COM

사실 왜곡을 서슴지 않는 편집, 인터뷰이의 상황을 교묘히 이용하는 인터뷰, 과도한 자기 드러내기와 권력지향. <마이클 무어 뒤짚어보기>가 제기하는 마이클 무어와 작품들에 대한 문제들이다.

일반 극영화와 달리 다큐멘터리는 대상과 카메라와의 거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직접적으로 감독의 목소리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의 방향성은 유효하다.

특히 캐나다에서 무어를 추적하기 위해 전 미국과 프랑스를 넘나드는 릭과 에런 감독은 무어의 주변 인물들과의 인터뷰, 전작들의 삽입, 저돌적인 인터뷰 시도 등 마이클 무어 자신의 장기를 고스란히 돌려주고 있다.

더구나 거듭된 인터뷰 요청을 무시하던 마이클 무어와 마주친 순간은 십수 년 전 그가 로저 스미스 회장에게 들이닥치던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결정적은 증거들은 이렇다. <로저와 나>에서 로저 스미스 회장은 의도적으로 마이클 무어를 수차례 회피한 것으로 그려진다. 특히 GM의 회의장에서는 마이클 무어의 발언을 막기 위해 마이크를 꺼 버리는 광경이 그대로 까발려진다.

하지만 마이클 무어의 옛 친구이자 <로저와 나>를 함께 작업했던 제임스 머슬맨은 이것이 음향 삽입과 편집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 폭로한다. 로저 스미스와 마이클 무어는 15분간 만남을 가졌지만 마이클 무어가 이를 과감히 삭제했으며, 로저 스미스는 그의 작업을 가만히 놔두는 것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플린트 시민들이나 노조의 반응도 영화와는 상반된다. 마지막 파업 시위에 3명이 나온 영화 속 화면과는 달리 플린트 시민들은 꾸준하게 시위를 벌여왔으며, 마이클 무어의 다큐가 시 전체로 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한다. 마이클 무어는 또 재정을 살리기 위해 쇼핑센터를 짓고 관광산업을 유치했던 플린트 시의 사업이 헛짓거리였음을 조롱하는데 이 또한 1989년 이전 사업이었으며 이는 <로저와 나>가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도 이라크 전에 참전해 두 팔을 잃은 병사의 인터뷰 또한 사실은 신경안정제가 투입된 상황에서 연출된 것뿐이었으며, 그 병사는 공공연히 부시의 지지자임을 밝히며 마이클 무어를 비난하는 식이다. 이러한 영화 세부적인 결함을 넘어 <마이클 무어 뒤짚어보기>는 다양한 측면에서 영화와 마이클 무어 한 개인을 결합시킨다.

그의 재단이 비치는 진보성과 달리 '핼리버튼'과 같은 방위산업체에 주식 투자를 했다는 증거, 녹색당의 네이더 지지자들에게 배신자 소리를 듣게 된 사연, 정치 성향 때문에 파면을 당했다면 소송을 걸고 승소를 이끌어낸 잡지 <마더 존스>와의 관계, 자기중심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속내까지.

주변인들과 비평가들, 인터뷰이들을 통해 속속 밝혀지는 사실과 증언들은 어지간한 팬이 아니고서는 그의 영화를 다시금 바라보게 되는 또 다른 기준이 되어준다.

특히 <볼링 포 콜럼바인>과 <화씨 9/11>과 전국을 순회하는 강연을 통해 미국 좌파의 나팔수 역할을 자임하고 공화당 측에 경각심을 일깨웠던 작업들이 결국 미국 선거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평가하는 대목은 자못 흥미롭다. 그의 선동적인 작업이 좌파를 결집시키기보다 우파들의 반감을 사는 한편 그와 대척점에선 다큐멘터리들이 쏟아져 나오며 우파를 결집시켰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가 2004년 대선에서 네이더를 져버리고 캐리의 손을 들어줌으로서 결과적으로는 좌파의 표를 분산시키며 부시 재집권을 도왔다는 평가는 대선을 앞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아 보인다.

 <화씨 9/11>의 한 장면

<화씨 9/11>의 한 장면 ⓒ 스튜디어 플러스


목표를 위한 수단의 정당화, 눈감아 줘야하나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편집실로 가면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건 CIA나 군이 하는 짓과 똑같잖아요. (중략)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를 믿었습니다. 우리의 심장과 영혼의 소리를 따르지 않았어요."

물론 제임스 머슬맨의 주장이 마이클 무어를 흠집 내려는 옛 친구의 모함일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안티 카페를 비롯해 마이클 무어를 둘러싼 시시비비들을 적잖이 확인할 수 있다.

섣불리 예술 작품과 개인을 떨어져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과 관련한 컨텍스트의 삭제가 정당성을 떠나 지향하는 바를 위해 무시될 수 있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마이클 무어의 영화와 전략을 지지할 것이냐 비난할 것이냐, 그것은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 개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이클 무어를 뒤집어 보는 것은 다큐멘터리와 영화라는 텍스트를, 그리고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임을 다시금 상기시켜준다. 깐느영화제가 그에게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것도, 전세계인이 그의 작업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미국이라는 제국과 부시 정권의 전횡에 대한 시의적절한 문제제기에 동의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여전히 <식코>를 통해 미국 의료제도의 폐단을 지적하는 마이클 무어의 작업은 지지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영화를 본 뒤 씁쓸함을 지울 수 없는 것은 목적을 위한 방법론의 정당화에 대한 판단 때문이다. 이건 마이클 무어 개인의 행적과 정치 행위를 떠나 그 텍스트 혹은 목표에 동의할 때 과연 수단을 무시한 뒤에도 지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과연 마이클 무어는 올 미국 대선에서는 누구를 지지할까. 그리고 우리는 할리우드 진출이든 대선이든 그 목표의 가치를 인정한다면 어떠한 수단과 방법론이라도 눈감아줘야 할까.

덧붙이는 글 아쉽게도 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EIDF)은 물론 다시 보기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러한 묻혀진 영화를 상영하게 하는 힘은 관객들의 몫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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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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