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녹야> 스틸컷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녹야>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인천항 여객터미널 검색대에서 보안 요원으로 일하는 진샤(판빙빙 분)는 어느 날 초록머리 여자(이주영 분)를 만난다. 머리에 손톱과 발톱은 물론, 가슴 한편에 초록 불꽃 문신까지 하고 있는 그녀는 검색에는 제대로 협조하지 않지만 어딘가 묘하게 시선을 끄는 구석이 있다. 여자의 진짜 정체는 마약 밀매상 화교인 동(김민귀 분)의 애인이자 운반책. 그녀가 맡은 역할은 인천에서 화장품으로 둔갑시킨 마약을 중국으로 옮기는 인간 컨베이어 벨트다. 이날 벌어지는 검색대에서의 작은 실랑이는 두 여자의 인생을 바꾸게 되는 동행으로 바뀌게 되고, 영화는 이 짧은 시간 속에서 잔혹한 남성들로부터 권력과 자유를 되찾는 여성의 서사를 펼쳐나간다.

영화 <녹야>를 연출한 한슈아이 감독은 사춘기 소녀의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을 그려낸 데뷔작 <희미한 여름>(2020)으로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에 초청되어 피프레시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번 작품은 그의 두 번째 장편 영화임과 동시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갈라 프레젠테이션에 초청하게 만든 작품이다.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도 초청된 바 있는 이 작품은 로드 무비의 형식을 빌어 성장에 대한 메타포를 담고 있으면서도 여성 권력의 이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특히 폭력과 자유, 개인의 선택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서로 다른 성향과 태도를 보이는 두 인물의 공존을 지켜보는 일은 꽤 흥미롭다. 그 자체만으로도 긴장감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해도 좋겠다.

다소 올드한 형식과 낡고 오래된 배경이 이 영화가 가진 상투적인 부분처럼 다가오지만, 두 인물을 바라보는 영화의 독특한 시선과 영화의 후반부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는 극의 구조는 경제적 빈곤과 폭력에 노출된 두 인물의 세계를 오히려 더 선명하게 완성해 낸다.

02.
시작에서 그려지는 두 인물의 설정은 조금도 닮아있지 않다. 검색대의 보안 요원으로 일하는 진샤는 직업의식은 물론 공공의 선(善)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까지 투철한 쪽에 속하는 인물이다. 초록머리 여자와 처음 만나게 되는 장면 역시 그녀의 그런 워크에식(Work ethic)으로부터 시작된다. 초록머리 여자는 그렇지 않다. 마약을 운반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는 모습이나 처음 만난 진샤의 집까지 따라가 의뭉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구석만 봐도 그렇다.

그런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도록 강요하는 것은 이 작품이 초반부에서 제시하는 상황적인 부분들이다. 남편 승훈의 품을 떠나 스스로 영주권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3500만 원과 부패한 직장 상사 및 동료들의 모습은 진샤로 하여금 자신이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던 선을 넘도록 채근해 온다. 초록머리 여자 역시 마찬가지. 더 이상 남자에게 구속받고 싶지 않다는 의문스러운 말을 남기는 그녀지만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탈출하게끔 재촉하는 영화의 움직임은 이미 스스로 검색대를 통과하기를 포기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초록머리 여자의 가방 속에 감춰진 마약은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이 함께 서울로 향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녹야> 스틸컷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녹야>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3.
영화가 두 사람의 이탈(離脫)을 바라보는 시선이 도망과 탈출의 영역에 있는지, 성장과 희망의 영역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다. 여전히 카메라는 흔들리고, 인물을 담아내는 앵글은 타이트하기만 하며, 두 눈빛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감 위에서 불안하기만 하다. 진샤와 초록머리 여자가 무엇으로부터 떠나고자 하는지가 중요한 이유다. 이 자리에 무엇이 놓이느냐에 따라 그 이후에 따르게 되는 두 여성의 삶에 완전히 다른 의미가 부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새로운 장면들은 아니다. 불필요하게 쓰다듬어지는 수산 시장에서의 일과 진샤의 남편 승훈(김영호 분)으로 인해 일방적이고 강제적으로 행해지는 성관계, 그리고 여성을 쓰고 난 다음 폐기할 수 있는 도구로 인식하고 있는 듯한 초록머리 여자의 남자친구 동까지. 그동안의 수많은 여성 서사에서 그랬듯이 그들 곁에 존재하는 남성의 지독한 폭력과 잔혹한 공격성이다. 이들 각각의 서사를 지나는 동안 두 사람의 이야기는 조금씩 다른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남편의 폭력을 껴안지 않고서는 한국에서 살아갈 수 없는 여자와 남자친구의 구속 밖에서는 내일을 지켜낼 수 없는 또 다른 여자의 이야기. 상처를 안고 있으면서도 그 상처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었던 시간의 흔적이 그렇게 도드라지기 시작한다.

04.
"우리가 왜 용서를 받아야 하는데?"

무엇으로부터, 또 누구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고 그 물음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두 여자의 세계를 둘러싸고 있던 껍질은 한번 더 깨지기 시작한다. 그릇된 환경 속에서 오랜 시간 응당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던 성(性)의 수직적 구조가 무너지는 장면이다. 빼앗긴 권력 구조를 이양받고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그들의 행동이 단순히 복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지키고자 하는 연대와 사랑의 행위라는 것은 그래서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끝까지 초록머리 여자의 발목을 붙들고 있던 환경을 부수고 나와 홀로 도로를 질주하는 진샤의 모습 속에 두 번의 밤을 함께 보낸 다른 여인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실제로 초록머리 여자의 모습은 진샤가 동을 만나는 장면에서 그 어느 때보다 큰 존재감을 보인다). 이제 물리적으로는 바이크 위에 한 사람만이 남게 된 것이나 다름없지만, 두 인물의 사랑과 연대가 서로 다른 세계의 결합을 가능하게 만든 것과 다름없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녹야> 스틸컷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녹야>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5.
처음에 언급한대로 이 작품에는 로드 무비의 형식을 통해 성장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지점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 성장이라는 것이 문자 그대로 점차 커지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외력에 의해 꼼짝할 수 없는 상태로부터의 이탈, 그로 인한 세계의 확장을 의미하고 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연대와 평등, 자유와 사랑과 같은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으로 이어지게 된다. 혼자서는 결코 할 수 없었던 행동. 그리고 존재하지 않았던 내일.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의 가장 잔혹한 장면은 역시 두 사람이 함께 바이크를 타고 아무도 없는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이다. 누구도 따라오지 않는 황량한 도로를 배경으로 무엇엔가 쫓기는 듯 도망치는 두 사람의 모습이야말로 이 사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폭력과 억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장면이다.

물론 일련의 과정 모두를 지나온 진샤의 마지막 질주 뒤에도 그 황량한 배경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초록머리 여자와 함께 주고받았던 그 한 번의 경험과 기억은 남은 삶 속에서 두 번 다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영화 부산국제영화제 녹야 판빙빙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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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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