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이 승리했다'

이 말을 현실에서 찾기는 어렵다. 언론에서 볼 수 있는 말은 주로 '협상이 중단됐다', '고공농성이 시작됐다', '경찰 진압으로 마무리됐다' 또는 '합의에 도달했다' 정도이다. 현실파업은 합의안에 도장을 찍어야 끝이 난다.

이렇게 체결이 어려운 계약서가 또 있을까? 신문이나 방송에서 파업 관련 기사를 보면 항상 답답했다. 이럴 때 보면 좋은 뮤지컬이 있다. 우연히 만난 뮤지컬, '할란카운티'.

파업에서 승리한 광산 노동자들
 
   우연히 보게 된 뮤지컬 <할란카운티>, LG아트센터 앞에 걸린 뮤지컬<할란카운티>의 현수막.

우연히 보게 된 뮤지컬 <할란카운티>, LG아트센터 앞에 걸린 뮤지컬<할란카운티>의 현수막. ⓒ 최설화

 
무대는 1970년대 미국 할란카운티다. 광산노동자들은 파업에서 승리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파업에 참여했다. 광산 노조가 파업 승리를 선언할 때 후련한 느낌을 받았다. '할란카운티'는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한 뮤지컬이다.

할란카운티 광산노동자는 역사 속에서도 파업에 승리했을까? 궁금해졌다. 검색해 보니 실제 파업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할란카운티 U.S.A>가 있었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찾지 못했다. 결국 국회도서관에서 DVD로 다큐멘터리를 봤다.

다큐멘터리 무대는 1973년 미국 켄터키주 할란 브룩사이드 광산이었다. 광산 노동자와 가족들은 하수도 시설도 없는 컨테이너에 살고 있었다. 광부들은 석탄 가루인 탄진으로 폐 기능이 악화됐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찼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24시간 내내 지옥과도 같았다. 집도, 탄광도, 총탄이 오가는 파업현장까지. 그들이 총에 맞으면 그제야 붉은색을 볼 수 있었다.
 
할란카운티 파업을 이해하려면 193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할란카운티에서는 제1차세계대전(1914-1918) 때부터 석탄을 캤다. 당시 일당은 5달러였다. 전쟁이 끝난 후, 석유 사용이 늘고 석탄 사용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1931년에는 주당 8달러를 받았다. 광부들은 탄광회사가 제공한 임대 주택에서 살았다. 임금이 높아지면 회사는 임대료를 올렸다. 생활 필수품을 살 때도 회사가 운영하는 잡화점만 가야했다. 생필품 가격은 평균보다 20% 비쌌지만 다른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 해고되었다. 이 상황에서 1931년 대공황이 닥쳤다.
 
할란카운티 광부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정관을 만들고, 노조위원장 선출을 위한 투표일을 잡았다. 그날 회사 측은 노조 설립 자체를 막기 위해 아주 간단한 방법을 사용했다. 모든 노동자를 집에 가두었다. 집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총을 들고 막았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1970년, 광부들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다른 지역 광부들이 일주일 13달러 받을 때 할란카운티 광부는 일당으로 8달러 받고 있었다. 여전히 하수도 시설은 없었다. 회사가 제공한 집에 살았고, 탄 진폐증 진단을 받으면 광산에서 쫓겨났다.
 
1970년 할란카운티 광부들은 1931년 광부들과 다르게 행동했다.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집에 갇혀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1970년대 미국에는 민주노총 같은 상위 노조가 있었다. 광부들은 미국광산노조연합에 가입 준비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사측은 1931년에 살고 있었다. 상위 노조 가입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결국 할란카운티 노동자들은 미국광산노조연합에 가입하지 못했다. 그리고 파업을 시작했다.

회사를 돕는 사람들의 실체
 
  다큐멘터리<할라카운티 U.S.A> 관련 이미지.

다큐멘터리<할라카운티 U.S.A> 관련 이미지. ⓒ 바바라 코플

 
파업이 시작되자, 회사를 돕는 사람들이 실체를 드러냈다. 법원 판사는 파업 광부들이 광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접근금지명령을 내렸다. 이 판사는 광산 회사의 주주였다. 판사는 노동자의 시위 공간을 규정한 피켓 라인을 만들었고, 그 라인안에는 3명의 노동자만 서 있도록 했다.
 
판사가 만든 피켓 라인을 이용한 건 회사측이었다. 회사는 대체 인력으로 조직 폭력배와 전과자를 고용했다. 구사대라고 불리는 대체 인력은 피켓 라인 안으로 시위하는 파업 노동자들을 가뒀다. 구사대는 피켓 라인을 뜷고 광산으로 들어가려는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막았다. 결국 광산은 구사대가 차지하고 파업 노동자들은 피켓 라인을 뚫기 위해 온몸을 던졌다. 그래서 광산에 가까이 가는 노동자는 경찰이 즉시 체포했다. 검사는 징역을 선고하고 판사는 유죄 판결을 내렸다. 피켓 라인을 넘으려는 모든 노동자들은 감옥으로 갔다. 파업 참여자들은 계속 줄고 있었다.

결국 광부의 아내, 어머니, 딸이 나섰다. 여성들은 자체적으로 조직위원회를 만들고 시위에 참여했다.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전단지를 만들었다. 다른 광산 광부들과 그 가족들에게 파업 상황을 알렸다. 파업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자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여성들과 지역 밖의 노동자들까지 파업 투쟁에 연대하는 모습을 보이자, 구사대는 총을 사용해 위협했다. 갑자기 마을에 총성이 울리고 한 광부는 가족들과 도망쳤다. 광부 집에 담장이 부서지고 총알이 박혔다.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짐작은 갔다. 마을 사람들은 밤에 울린 총성에 대해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생명에 위험을 느낀 광부들도 총을 들고 피켓라인으로 나왔다. 시위대와 구사대가 총을 들고 서로 겨누었다. 여성들은 막대기와 피켓을 높이 들었다.

절박한 상황, 총격을 막은 건 다큐멘터리 촬영 카메라였다. 법원은 총격 사건의 범인인 구사대 중 한 명에게 체포영장을 발부 했지만, 경찰은 체포하지 않았다. 이런 경찰의 방관 속에 구사대는 노조위원장을 살해했다. 결국 경찰은 노조위원장 살해 공범 혐의로 탄광 사장을 체포한다.
 
노조위원장의 죽음이 알려지며, 브룩사이드 파업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광부 12만 명이 참여한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전국 총파업으로 미국 광산 회사 손실이 늘어나자, 연방 정부가 개입한다. 강제 협상이 시작되지만, 협상 과정에 청년 광부 한 명이 총에 맞는다. 22살 광부의 죽음은 전국적인 관심을 받았다. 결국 정부의 중재로 노사협상이 타결된다.
 
   다큐멘터리<할라카운티 U.S.A> 관련 이미지.

다큐멘터리<할라카운티 U.S.A> 관련 이미지. ⓒ 바바라 코플

 
수 백명이 광산에서 쫓겨나고 노동자 2명이 죽은 파업에서 광부들은 노조를 결성할 자유를 얻었다. 이제 회사가 부당한 대우를 하면 파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일상이나 대우는 달라지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마지막 장면에서 파업이 끝난 후 노년의 광부가 광산으로 출근하는 모습이 나온다. 제작진은 "새로운 계약서는 마음에 드시나요?"라 묻는 말에 광부는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일해야죠.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면"이라고 대답한다. 계약서를 새로 썼지만 노동자에게 원하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암시했다.
 
2010년 미국 할란 브룩사이드 광부들은 모두 광산에서 쫓겨났다. 회사는 광산 6개를 폐쇄하고 광부를 무급으로 내쫓았다. 그들은 다시 피켓을 들었다. 그리고 광산을 지켰다. 하지만 노동 계약서에 퇴직연금에 관한 조항은 없었다. 할란카운티 노동자들은 피켓 라인을 넘어서지 못했다. 결국 합의문은 아무 의미도, 소용도 없었다. 노동자는 쫓겨나고, 광산은 폐쇄되었다. 미국 광산 노동자 투쟁의 역사 80년… 파업 승리는 어떤 의미일까? 합의를 하면 이기는 것일까? 여러 의문이 들었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국회 정문 앞에 멈춰 섰다. 34도가 넘는 더위, 화물연대 노동자 한 명이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비 때문에 천막이 찢어져 쉴 곳도 마땅치 않아보였다. 작년 정부와 언론은 화물연대노조를 한국 경제를 위기에 빠뜨린 주범으로 지목했다. 정부는 강제업무명령을 내려 일방적인 복종을 원했다.

몇 가지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남아 있다.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 지입제 폐지 등 중요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합의가 되었지만 일부만 시행되고, 새로운 합의를 위해 다시 싸워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일부 언론은 노동자를 악마로 만들고, 경찰과 검찰은 노동자를 법정에 세울 것이다.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1인 시위를 하는 노동자는 나를 보며 웃었다. 체감온도 38도, 그 팥빙수 같은 웃음에 발걸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국회 앞, 장맛비 온 뒤 쓰러진 천막들.

국회 앞, 장맛비 온 뒤 쓰러진 천막들. ⓒ 최설화

 
 
뮤지컬 할란카운티 국회 노동자 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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