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 ⓒ 롯데엔터테인먼트

 
대한민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다. 아파트는 고대 로마 시대부터 시작해 파리 등 유럽 부르주아 주거지에서 근대로 오며 노동자의 주거 양식으로 진화했다. 현대로 넘어와 한국에서 정점을 이루게 되었는데 좁은 땅에 많은 사람이 밀집되어 살 수 있는 아파트는 매우 유용했다.

70년대 여의도의 시범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강남 아파트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70- 80년대 투기 대상이 되었다. 현재 아파트는 대한민국에서 집 이상의 의미를 투영한 꿈이 되었다. 집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고급 아파트에 사는 자와 못 사는 자 같은 새로운 계급, 부의 척도다.
 
황궁 아파트 주민이 아니면 빌런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를 무대로 벌어지는 인간 군상을 다룬다. 한정된 공간이라 연극적인 느낌이 강하고,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하며, 피부로 체감되는 리얼리티가 살아있다. 여름 성수기에 개봉하는 텐트폴 영화로는 무겁다. 밝고 경쾌하며 때로는 신파와 감동의 도가니를 만드는, 웃고 즐길만한 엔터테인먼트 요소의 영화와는 결이 다르다.
 
어느 날,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세상.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황궁 아파트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마치 융기한 듯 보이는 103동은 주민과 외부인이 뒤엉키며 전쟁터가 되어간다. 아파트 입구에 암시장이 열렸다. 생존에 필요한 식량, 연료 등이 물물교환 되었고 돈이나 금, 명품은 무용지물이었다.
 
활기도 잠시. 추위와 굶주림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지쳐간다. 구조대를 기다리지만 헛된 희망일 뿐 불신만 커진다. 그러던 중 화재로 타고 있는 어느 집을 향해 자기 일처럼 뛰어들었던 영탁(이병헌)과 이를 도왔던 민성(박서준)의 활약으로 폐허가 된 세상에 스타가 탄생한다. 이후 부녀회장 금애(김선영)의 주도 하에 주민 회의가 소집된다. 희생정신 투철하고 믿음직한 영탁을 주민대표로 선출해 대책을 마련하고자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형편은 나아지지 않는다. 생존자들이 몰려들며 트러블이 생긴다. 위협을 느낀 주민들은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하기에 이른다. 우리 아파트 주민이 아니면 빌런이라 선언한다. 황궁 아파트 주민은 자가, 전세할 것 없이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때보다 똘똘 뭉쳐 수칙을 정하고 살기 좋은 곳을 만들어 갔다. 힘겨웠던 대대적인 정비 사업 이후 황궁 아파트는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가 되어 갔다. 그 선두에 있는 사람은 영탁이다. 처음에는 구석에서 귤이나 까먹고 있던 어리숙한 사람이 리더로서 카리스마를 발휘하게 된다. 점차 권력 맛을 보면서 더욱 대담하고 독단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할 때쯤 생존자 혜원(박지후)이 황궁으로 돌아오며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는다. 겨우 평화를 찾았던 황궁 아파트에 위기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의 모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스틸컷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유토피아'란 단어는 '어디에도 없는 곳'을 의미한다. 1516년 영국의 인문학자 '토마스 모어'가 쓴 공상과학 소설의 제목이다. 'u'에는 '없다'와 '좋다'는 중의적 뜻이 들어있고 'topia'는 장소를 말한다. 따라서 'no-place'이자 'good-place'가 되는 것이다. 외부와 단절된 어딘가의 섬을 뜻한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한 끗 차이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준다. 해석하는 자에 따라 허황된 꿈일 수도 있고, 군주가 찾던 낙원, 행복한 사회가 될 수도 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 공간인 게임 속 세계, SF 세계관도 유토피아로 불린다. 다른 관점에서는 제국주의를 뜻하며 파시스트 사회라고도 불린다. 그래서 종교계와 공산주의(공유, 평등)에서 열렬히 추앙했을 이상향이 바로 유토피아다.
 
영화는 아파트를 의미하는 콘크리트와 이상 세계 유토피아를 붙여 아이러니함을 극대화한다. 감독은 박기천의 인문서적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영감받아 제목을 정했다고 밝혔다. 극도로 현실적인 문제, 한국인만이 알 수 있는 상황이 집약되어 있는 블랙 코미디다. 아파트의 변천사를 한 번에 정리한 기록 영상과 '즐거운 나의 집' 음악까지 더해지면 스산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생존 게임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재난으로 모든 게 리셋되면서 제도가 재편되고 새로운 계급이 생겨났다. 부자든 빈민이든, 대출 껴서 샀든, 어제 이사를 왔든 이제는 생존력이 중요한 세상이 왔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버리고 권력에 취한 영탁,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변해가며 갈등하는 민성, 리더를 무조건 따르고 의지하는 금애. 이들의 삼각편대로 황궁 아파트 정비 사업이 완성되고 완벽한 천국이 완성된다. 작은 나라로 보일 만큼 단단한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이 필수다. 식량을 찾는 외부 탐사 시 투철한 희생정신도 가져야 한다. 남을 해쳐야 하는 잔인한 순간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내가 먼저 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 살인은 점점 무감 감해져만 간다. 먹을 것 때문에 벌어지는 싸움은 원시시대로 회귀한 현대의 씁쓸함을 뜻한다. 인간성 퇴보의 다양한 양상이 펼쳐짐에 따라 누구나 악인과 선인을 넘나든다. 안과 밖이 확실하게 구분된 거대한 성이 된 아파트는 차츰 썩어간다. '우리'와 '너희'만 있고 '나'와 '너'는 없는 이분법과 파시즘이 생기는 건 당연한 결과다.
 
이타심은 죄가 되고 이기심만 팽배해진다. 민주적인 투표로 결정했으니 반대 의견이 있다고 해도 다수결에 따르는 민주주의의 단점이 재현된다. 서로 다른 의견 사이에서 양극화가 발생하고 다수의 횡포로 소수의견은 묵살된다. 점차 분열을 야기하고 군중심리로 몰아간다.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이 모두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는 거다.
 
영화는 130분 동안 관객을 붙잡고 끈질기게 묻는다. '만약 나라면 외부인을 받아 줄 것인가, 내칠 것인가'. 끊임없는 딜레마가 좇아온다. 이를 계속해서 불편해하는 인물은 명화(박보영)다. 집으로 귀환한 혜원의 말을 믿고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작은 불씨가 번져 집을 태우듯. 견고했던 황궁 성은 균열이 생겨 무너져 버리게 된다.
 
극장을 나서는 데 지난겨울 갑작스러운 폭설에 한국 관광객을 도운 미국 부부 이야기가 생각났다. 본인도 힘들 텐데 침실과 음식을 나눈 온정에 모두가 훈훈했던 일화다. 엄청난 추위 속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 베푼 인류애가 떠올랐지만 반면 섬뜩하게 다가와 공포스러웠다.
 
덧붙여, 하필이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바로 앞 아파트 한 동 전체에 전기가 나갔다. 영화 속 우려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화려한 불빛과 활활 타오르는 열기, 식을 줄 모르는 열대야에 깜깜해진 블랙아웃이 한 시간 넘게 진행 중이다.

시원한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앞 동은 그야말로 무간지옥일 것이다. 폭염에 지친 일요일 밤. 정전은 쉽게 복구될 기미가 없어 야속하기만 하다. 내가 저 집에 살았다면 어땠을지 생각했다. 하룻밤만 재워 달라고 부탁한다면 들여보내 주어야 할지 갈등에 빠진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장혜령 기자의 브런치에도 게재 됩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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