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속의 여행자들은 산천의 형세를 보거나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면서 목적지를 찾아간다. 태양이나 별의 위치를 보면서 움직이는 등장인물도 있지만 흔하지는 않다. 이에 비해, 도로 표지를 확인하는 여행자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 장면은 사극과 친숙하지 않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옛날 사람들도 도로 표지판에 꽤나 신경을 썼다. '한국형 도로 표지판'이라고 불릴 만한 것도 개발했을 정도다. 지난 7일 방영된 SBS 드라마 <악귀> 제5회에 나온 장승도 그런 역할을 했다. 마을 입구의 장승도 표지판 역할을 했던 것이다.

<악귀>에 등장하는 '노표장승'
 
 SBS 드라마 <악귀> 한 장면.

SBS 드라마 <악귀> 한 장면. ⓒ SBS

 
<악귀> 제5회가 5분을 넘었을 때, 민속학 교수 염해상(오정세 분)이 귀신들에게 길을 안내하는 장승의 신비한 기능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때 염해상이 이렇게 말했다.
 
"장승은 그 마을의 수호신 역할만 한 게 아니에요.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이 있었죠. 마을의 동서남북 방위에 위치해 있는 장승은 당시 나그네들에게 나침반 역할을 해줬습니다. 그뿐 아니에요. 주요 목적지까지 거리를 표기한 노표 장승은 현재의 표지판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장승은 현재의 내비게이션 역할을 했던 겁니다."
 

장승이 도로표지판으로 부각된 것은 임진왜란 100년 이전의 어느 시점이었다. 염해상의 대사에 언급된 '노표 장승'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노표(路標) 장승 고찰'이란 논문에 따르면, 1592년에 일본군이 침략하기 1세기 이전에 장승의 그런 기능이 두드러졌다.
 
한국민속학회가 1980년 8월에 발행한 <한국민속학>에 실린 김두하 민학동지회장의 위 논문은 "15세기 후반에는 이미 리수(里數)를 적은 노표가 노방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것이 장생(長栍)으로 표기됐다며 "이 노표는 상부에 장승의 면상을 조각"했다고 설명한다.
 
논문에 제시된 참고문헌 중 하나는 유학자 성현의 <용재총화>다. 이 책 제5권에 나오는 "김해에서 밀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이야기하다가, 장승을 보면 반드시 하인한테 거리의 원근을 자세히 보게 하고"라는 대목이 근거 중 하나다. 장승에 지명과 거리가 표기돼 있었기 때문에 노비에게 장승을 보고 오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현대 한국인들은 노비 같은 서민층은 글자를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관청 민원실에서 서류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관노비였다. 그리고 한문은 모르더라도, 한자로 표기된 이두문자를 이해하는 서민층은 많았다. 민간의 계약서는 한문이 아닌 이두로 표기되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서 선비들이나 지주층뿐 아니라 상당수 서민들도 장승에 적힌 지명과 거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식자율이 어느 정도 확보됐기에 장승을 도로 표지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같은 장마철에는 장승이 제기능을 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청장관전서> 제2권에 실린 '광주(廣州) 가는 도중'이란 시에서 "이정표가 망가졌다. 가을 장마에 거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같은 책 제62권에서 그는 요즘은 이정표가 장승으로 불린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제2권에 나오는 이정표는 장승을 가리킨다.
 
이 시대 사람들이 말하는 가을은 음력 7월부터다. 여름 장마로 인해 장승 표면의 글자가 어느 정도 훼손된 상태에서, 가을 장마 때문에 장승이 더욱 훼손됐던 것이다. 이 시대 사람들은 비가 심하게 오면 도로 표지판이 지워지지 않을까도 걱정해야 했다.

이정표 역할 했던 흙무덤
 
 SBS 드라마 <악귀> 한 장면.

SBS 드라마 <악귀> 한 장면. ⓒ SBS

 
 SBS 드라마 <악귀> 한 장면.

SBS 드라마 <악귀> 한 장면. ⓒ SBS

 
처음부터 장승이 표지판으로 활용된 것은 아니다. 훨씬 오래 전에는 사물이 아닌 '인간 내비게이션'에 의지하던 시절도 있었다.
 
<고려사> 병지(兵志)에는 마지막 왕인 공양왕 때 이성계·정도전의 동지인 조준 등이 제출한 상소문이 나온다. 음력으로 공양왕 원년 12월, 양력으로는 1389년 12월 18일에서 1390년 1월 16일 사이에 나온 이 상소문은 여행하는 관리에게 관용 말을 넘겨주는 지로(指路)나 지로(知路)같은 역졸을 언급한다. 현지인들로 충원된 이들이 길 로(路)가 들어간 지로로 불린 것은 단순히 말을 넘겨주는 일만 한 게 하니라 길을 안내하는 일도 했으리라는 판단을 갖게 한다.
 
인간 내비게이션인 지로가 여행자를 위해 먼 데까지 동행해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여행자는 내비게이션이 해준 말을 기억하거나 기록해둘 수밖에 없었다. 이 내비게이션의 임무는 여행자가 다음 내비게이션을 만날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것이었다.
 
위 상소문이 나온 지 얼마 뒤인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됐다. 이 시기 사람들의 머릿속에 '인간 내비게이션을 통한 길 안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물을 이용한 이정표도 있었다. 건국 22년 뒤인 음력으로 태종 14년 10월 17일(양력 1414년 11월 19일)에는 도로의 거리를 새로 측정해 이정표를 세우라는 왕명이 있었다.
 
여기에 언급된 이정표는 후자(堠子)로 불린 흙더미 혹은 흙무덤이다. 베이징과 몽골 초원을 잇는 초원길에도 이와 비슷한 표지가 많았다. 말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멀찍이서 식별할 수 있도록, 언덕 위에 흙더미를 쌓아 이동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였다.
 
위 날짜 <태종실록>에 따르면, 호조(기획재정부)는 후자의 크기에 따라 소후와 대후를 나누어 정비할 것을 건의했다. "옛 제도에 의거해 자(尺)로 측량하여 10리마다 소후를 두고, 30리마다 대후를 설치해 1식(息)으로 삼으소서"라는 내용이다.
 
30리 간격인 대후와 대후의 거리를 1식으로 인정하라는 내용을 담은 이 건의는 후자를 처음 설치하자는 제안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리를 새로 측정해 후자를 세우자는 것이 건의의 핵심이었다. 그 전에도 후자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정표의 재질이 꼭 흙더미로만 한정됐던 것은 아니다. 태종의 아들인 세종 때는 흙더미 외에 돌더미 또는 수목을 활용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음력으로 세종 23년 8월 29일자(양력 1441년 9월 14일자) <세종실록>은 병조에서 새로운 거리 측정을 건의하면서 "30리마다 푯말을 하나씩 세우되, 토석을 모아놓든가 수목을 심어서 표지하게 하소서"라고 말한 사실을 알려준다. 세종은 이 건의를 재가했다.
 
위와 같은 제도적 정비들이 축적된 뒤에 나온 것이 15세기 후반부터 시행된 <경국대전> 공전(工典) 규정이다. "지방의 도로에는 10리마다 소후를 세우며 30리마다 대후를 세우고 역참을 둔다"는 규정이 이 법전에 들어갔다. 지금처럼 도로 표지판이 많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10리만 가면 이정표를 확인할 수 있게 해놓았던 것이다.
 
단순히 이정표만 달랑 세우는 것은 아니었다. 위 <경국대전> 규정에는 거리와 지명을 새기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오늘날의 도로 표지판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장승 표지판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토속 신앙을 반영하는 장승을 도로 표지판으로 활용했으니, 오늘날의 도로 표지판보다 훨씬 철학적인 안내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드라마 <악귀>에서는 이런 장승이 귀신의 이동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상상력을 펼쳤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것이 역병균의 이동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장승을 세운 이유 중 하나는 호구마마로 불리는 천연두 등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 일종의 팬데믹 관리 차원에서도 장승을 활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도로 표지판은 인간의 이동을 돕는 동시에 병원균의 이동을 막는 의미가 있었다. 오늘날과 달리 조선시대 표지판에는 철학적 의미와 더불어 보건의학적 의미도 담겨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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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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