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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남 공원에 마련된 그의 형상 앞에 헌화하고 있는 후배들의 모습
▲ 후배들이 헌화하는 광경 여정남 공원에 마련된 그의 형상 앞에 헌화하고 있는 후배들의 모습
ⓒ 김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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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어 민청학련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구속된 지 3주일 후인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에 의해 인혁당사건이 다시 발표되었다.

1차사건이 있은 지 10년 만에 또 인혁당 이름을 내걸었다. 혐의사실도 10년 전과 거의 똑같았다. 현정부를 전복하고 노동자ㆍ농민에 의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학생데모를 배후조종했다는 것이다. 

정부는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세력으로 인혁당을 지목하면서 이 사건 관련자 서도원ㆍ도예종ㆍ김용원ㆍ우홍선ㆍ송상건ㆍ여정남ㆍ김한덕ㆍ유진건ㆍ나경일ㆍ전재권 등 23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이들은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에 의해 국가보안법ㆍ반공법ㆍ내란예비음모ㆍ내란선동 등 혐의로 구속ㆍ기소되어 비상보통군법회의, 비상고등군법회의, 대법원 확정판결에 이르기까지 3심을 거치는 동안 형량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특히 도예종ㆍ서도원ㆍ하재완ㆍ이수병ㆍ김용원ㆍ우홍선ㆍ송상건ㆍ여정남 등 8명의 피고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형이었다. 이들을 희생양으로 지목한 것이다. 

인혁당사건을 둘러싸고 이번에도 고문에 의한 조작설이 드러났다. 피고인들의 법정진술과 가족들에 의해 고문사실이 알려졌다. 고문과 조작설을 대담하게 터뜨리면서 항의하고 나선 사람은 외국인 조지 오글 목사와 제이스 시노트 신부였다. 이들은 인혁당사건이 수사기관의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밝혔다가 얼마 후 한국에서 추방당했다.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된 고 여정남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된 고 여정남
ⓒ 인혁당사건 열사 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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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혁당사건'의 피고인이 아닌) 여정남 군의 항소심 변호를 맡게 되었다. 그의 1심 변호인이던 강신옥 변호사가 군법회의 변론 도중 구속되는 바람에 내가 '인계'를 받은 셈이었다.

민청학련의 배후로 검거된 인혁당 관계자들은 주로 대구ㆍ경북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혁신계 인물들로서, 그들은 민청학련의 유신반대투쟁을 배후조종하고 북한의 지령에 따라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았다. 그들 피고인 22명 중 도예종ㆍ서도원ㆍ하재완ㆍ이수병ㆍ김용원ㆍ우홍선, 송상진 등 7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민청학련사건에서는 유일하게 여정남 군만 항소심에서도 사형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주석 4)

인혁당사건의 고문과 조작설에 대해 박대통령과 황산덕 법무장관이 이를 부인하는 가운데 4월 8일 대법원은 8명의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확정했다. 이례적으로 대법원 판결 바로 다음 날인 4월 9일 이들 8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감행되었다. 확정판결 다음날 사형을 집행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시신도 유족들에게 인도하지 않았다. 정부 당국은 고문흔적을 없애기 위해 불법적으로 화장을 하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여 군은 법정 진술과 항소이유서에서 몸서리치는 고문 협박의 참상을 폭로하면서 억울한 혐의를 벗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마이동풍이었다. 전반적으로 피고인들의 진술은 법정에서조차 제지를 당했고, 피고인 측 증인 신청은 무작정 기각되는가 하면, 검찰 측 증인은 변호인 측에 알리지도 않은 채 비밀리에 신문했다.

대법원에서도 판결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1975년 4월 8일, 그날 대법원에서 인혁당사건 피고인 중 위의 7명과 민청학련사건 피고인 중 여정남에 대한 사형이 확정되었고, 선고 18시간 만에 그들은 형장으로 끌려가 불귀(不歸)의 몸이 되었다.  

그때 여 군의 변호인이던 나 역시 반공법으로 구속되어 그들과 같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들이 저승의 문으로 끌려가던 날 새벽, 나는 그의 형 집행은 꿈에도 모른 채 같은 감옥의 다른 사방(舍房) 마룻바닥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주석 5)
1975년 4월 8일 새벽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사법살인' 당한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도예종(삼화토건 회장), 서도원(전 대구매일신문 논설위원), 하재완(무직), 이수병(일어학원 강사), 김용원(경기여고 교사), 송상진(양봉업), 우홍선(무직), 여정남(전 경북대 총학생회장) 8명의 사형이 집행된 서대문형수모 사형장.
 1975년 4월 8일 새벽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사법살인' 당한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도예종(삼화토건 회장), 서도원(전 대구매일신문 논설위원), 하재완(무직), 이수병(일어학원 강사), 김용원(경기여고 교사), 송상진(양봉업), 우홍선(무직), 여정남(전 경북대 총학생회장) 8명의 사형이 집행된 서대문형수모 사형장.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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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의 과거사위원회는 인혁당사건이 조작된 것을 밝혀내고, 사법부는 뒤늦게 재심에서 무죄를 판결하였다. 

이 때문에 재심이나 탄원을 시도해 볼 여유도 없었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의는 인혁당사건의 최종판결이 난 4월 8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으며,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에서는 야만적인 살인행위라고 박정희 정부의 처사를 비난했다.

1995년 4월 25일 문화방송(MBC)이 사법제도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판사 3백 15명에게 보낸 설문조사에서 인혁당사건 재판이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이었다고 응답하여 법조인들도 이 사건이 정상적이지 못했음을 시인했다.


주석
4> <자서전>, 169쪽.
5> 앞의 책, 17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한승헌, #시대의양심_한승헌평전 , #한승헌변호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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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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